우리시 시조의 이해
(원제)박영식 시조교실
[박영식]
1. 우리시 시조의 이해
시조(時調)는 우리 민족 전통의 시(詩)다. 다시 말해 이는 한겨레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노래다. 여기에는 시조가 뿌리내려진 천 여 년 세월동안의
토양과 기후, 체질과 생활습성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전통이란 뿌리정신의 바탕에서 계승과 발전이 주어짐으로 맥(脈)이 형성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각 나라마다 전통을 내세우는 시 형식으로 중국의 오언과 칠언율, 일본의 短歌와 俳句(하이쿠)가 있는 반면, 우리에겐 3장 6구(三章六句)로 이뤄진 아주 절묘한 시조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詩라고 하면 음악적 리듬 감각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한 문학 장르라고 생각하는 반면, 時調라 하면 어렵고 구태스럽다는 선입견으로 훌륭한 독창성과 전통성을 푸대접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선 문제는 시조에는 형식이 있다는 데서 걸림돌을 내세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현대라는 꽉 짜인 삶의 틀 속에서 빠르게 쉽게 편하게, 그리고 구속감에서 벗어나려는 인스턴트적 발상이 더욱 시조를 폄하 시키는 한 요인이라 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공교육에서도 시조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거나, 시조는 한낱 옛 선비들이나 읊었던 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더구나 현존 골동품 취급하듯 시골에서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노인네들이나 흥얼거리는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시조가 더욱 도태 될 수밖에 없는 우려를 낳는 것이다. 이는 엄청나게 잘못된 현상이며 적어도 한국 땅에서 만이라도 시조는 시 위에 있어야 된다고 본다. 앞으로 시조교실을 통해 기본적인 3장 6구라는 틀의 시조형식만 잘 이해하고 익힌다면 우리 국민 누구나 생활의 멋과 정서의 운치를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훌륭한 시조 시인이 될 것이다.
2. 시조의 짜임새 우선 시조의 종류를 보면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 세 형식이 있다. 이 세 형식에는 모두 초장(初章) 중장(中章) 종장(終章)의 3장이 있고 바로 이 3장이 시조의 골격을 이룬다.
좀 더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상대에게 운을 띄우면 화답식으로 읊어대는 3행시쯤으로 생각한다면 시조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평시조 외에 엇시조나 사설시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간혹 정형에서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자유시 형식을 모방하려는 분들이 오늘날 사설시조라고 쓰긴 하나 이는 기준점 없는 시조창작으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다.
시조의 으뜸시는 평시조(정형시조)이다. 그 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 밑줄 친 마디마다 적힌 숫자가 평시조(정형시조)에 놓이는 글자 수를 말한다. 이것을 자수라 하며 음수율이라고도 한다. 또한 괄호 안의 숫자는 3자 혹은 4자가 되어도 된다는 뜻이다. 앞으로 시조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위의 형식을 수없이 반복해 익혀야 한다. 이와 같은 자수율이 뼈 속에 녹아 체질화 되었을 때, 자연스런 시조의 가락을 앉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파격, 즉 자수의 변용을 시도해도 무리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지켜야 될 철칙은 종장 첫 마디는 꼭 3자 *(노을이) 여야 한다. 다시 말해 종장 첫 마디가 2자나 4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장 둘째 마디는 꼭 5자 *(서산 등마루)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3. 정형과 파격시조가 정형시라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정형시이기 때문에 시조만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고 운치를 더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되짚어 보면 꼭 시조에만 정형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정형시인 시조에 비해 자유시는 전혀 정형과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 자유시에도 어느 정도 정형이 유지되기에 음악적 리듬감각으로 운문이란 틀이 주어진 것이다.
만약 자유시에 음악적 요소가 없다면 시조형식에서 말하는 파격이 되는 것이고 이는 평문(산문)과도 별 차이가 없다.
시조 창작에서 정형을 좇다보면 어디엔가 숨어 있을 적재적소의 절묘한 시어를 찾지 못해 적당히 얼버무림을 가하게 되는데 이를 좋게 말해 내재율의 변용인 파격의 한 수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1)은 한 자의 오차도 없는 정형시조인 반면
예2)는 초장과 중장 *넷째 마디에 한 자를 더해 5자가 됨으로서 시의 흐름에 있어 더없는 유연성을 가져왔다. 이런 부분과 같이 글자 수가 더하고 덜함을 정형에의 파격이라 하는데, 그런 파격의 범위를 어느 정도 허용되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예시를 통해 시조창작에 임하면은 훨씬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4. 한 편의 詩(時調)는 어디서 오는가한 편의 詩(時調)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향기로운 마음의 꽃이다. 아니 시는 모든 문학 장르의 상좌에 앉혀진 꽃인 동시에 칠흑의 어둠속에서 뱃길을 열어주는 환한 등대, 반쯤 쓰러진 영육을 떠받치는 조그만 등불과도 같은 들꽃의 흔들거림이다.
삶의 노정에서 피워낸 마음의 꽃인 시는 곱씹고 음미할수록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가슴이 울렁거리고 때로는 눈시울이 붉어져 물기마저 배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아무 소리도 없는 절창의 명시의 위력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에 심취해 있는, 또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겐 어떻게 하면 좋은 명시를 만나고 빚을까 싶어 밤낮으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빵가게의 쇼윈도 앞에 섰다고 하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음직스러운 저 빵은 어떻게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인가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실제 제빵이 되기까지의 이면적 과정을 볼라치면 일시에 먹고 싶다는 충동이 확 달아날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편의 시 작품이 탄생된다는 것은 제빵의 그것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사물과 부딪히게 되고 여러 삶을 통해 겪는 감정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들이 체험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로부터 들었을법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읽었을 듯한 글귀, 가상적 공간에서 그려보는 밑그림, 무의식 속에서 잠재적인 것을 끌어내어 물화(物化)하는 작업 등이 추상에 해당된다. 이러한 추상, 즉 상상과 체험이 균형을 이루어 작품 소재인 밀가루와 물이 잘 융합되어 반죽이 되듯, 한 덩이 원자재가 될 것이다.
다음은 오랜 시간을 두고 얼마만큼 추고(퇴고)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부수가 나기 마련이고 그 완성도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준다. 조탁. 탁마. 연금술사의 노력이 화려한 변신을 가져오듯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동질의 미(美)적 언어인, 아름답다, 예쁘다, 어여쁘다, 곱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눈부시다, 찬란하다, 자랑스럽다, 별 같다, 꽃 같다 등 이러한 시어들을 적재적소에 선택하는 능력이 바로 기술자인 시인의 역할인 것이다.
단 여기서 명심해야 될 것은 체험에만 근거한다면 시가 거칠고 무거워지는 반면, 상상력에만 의존한다면 현실성의 결여로 무의미를 불러올 소지가 없지 않다. 일정량의 밀가루(소재)에 적당한 물과 소금 설탕 향, 그리고 알맞은 불의 조화가 구미욕을 불러오는 빵이 되듯 한 편의 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5. 시어(詩語)에 관하여 가끔씩 열병을 앓는 문학 지망생으로부터 어떤 것이 시어(詩語)가 될 수 있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 선뜻 대답하기가 무엇해 '시어'란 사전 속에 다 있는 단어이며 한편으로 창자(創者)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고상스런 언어일 뿐이다고 치부해 버린다. 우선 시어의 사전적 의미를 볼라치면 ①시에 쓰는 말. ②시인의 감정(사상)을 나타낸 함축성 있는 말, 이렇게 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쓰는 일상적 언어가 다 시어가 아닌 것이 없다. 문제는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따라 시어(단어)가 달라질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에 부응할 수 있는 사고가 보다 좋은 시어를 낳게 되리라 여겨진다.
국민시인 김소월의 시는 대체로 순한 작품들이다. 작품구성이 매우 음악적으로 고매한 가락을 지녔으며 톡톡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그 시대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토속적 이미지로서의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 만인의 대변자로서의 솔직한 감정처리가 오늘날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시혼(詩魂)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초보자 일수록 김소월과 같은 시 경향을 으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문명의 속도는 광속과도 같은 천문학적 수치다. 꿈, 밤, 눈물, 그리움, 마음, 님, 생각 등등 관념적 시어는 별 효용가치가 없다.
혼란 속의 마찰음, 이율배반적 비정,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병폐. 이러한 경계스러운 급변의 구조 속에서 내면적 고찰과 현실적 직시를 보다 정확하고 심도 있게 간파하느냐에 따라 현대시(시조)에서의 시어적 성공을 거둘 것이다.
분질러진 안테나에
세상도 굴절되어
고르지 못한 화면
잡음으로 크는 세상
무언도
뜻이 깊은데
더듬다가 낮아진 생
〈박봉주· 까치 안테나 - 첫 수〉
위 작품은 희망이 절벽 끝에 가 닿아 있는 산동네의 현실을 그대로 클로즈업한 현대시조다. 분질러진 안테나/ 세상도 굴절되어/ 고르지 못한 화면/ 잡음으로 크는 세상 - . 여기서 보면 어디하나 정감 있는 시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창자(創者)의 눈에 비친 세상보기의 진실성이 성공을 거둔 동시에 내적인 큰 울림을 주는 것이다.
이렇듯 시어는 현실적 삶의 의미를 얼마만큼 적절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한 알의 보석이 될 것이다. 마치 돌멩이에 불과한 원석을 밀도 있게 가공하여 탄생된 한 알의 투명한 유색보석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눈부신 광채, 바로 그것이 시어인 것이다.
6.조어(造語)에 관하여
한 줄 한 줄의 시구(詩句)는 보석의 결정체와도 같은 오묘함의 함축성을 요하기 때문에 실로 적재적소에 영롱한 시어(詩語)를 앉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 자기만의 온갖 표현 방법을 다 동원하다 보면 간혹 조어(造語)를 쓰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사전에서 조어는 〈①말을 새로 만듦, 또는 이미 있는 말을 엉구어서 새로운 뜻을 지닌 말을 만듦. ②꾸며댄 말. 날조한 말.〉이렇게 표기돼 있다.
조어는 명사와 명사를 접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기만의 느낌과 표현으로 자연의 소리 뿐 아니라 인의적 소리, 특히 짐승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의성어인 면에서 적잖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어라 해서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다거나 혼자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인 양 해독 불가능한 암호와도 같은 조어를 만듦으로서 문장 전체를 잃게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조어에서의 성공은 독자 쪽의 반응여하에 달렸다. 그러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조어는 사어(死語)나 마찬가지다.
성공적인 조어의 예를 보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조지훈 ․「승무」中에서〉
위 밑줄 친 부분의 조어와 같이 어감이나 느낌이 무리가 없어야 되며, 작품 전체의 균형미에 있어서도 무게중심을 받쳐줄 수 있어야 된다. 〈나빌레라:'나비일레라'의 준 꼴로 '나비와 같구나', '일레라'는 '이겠더라'의 뜻으로 쓰였다.〉〈파르라니:파르라니는 파랗게의 운율적인 신조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근래에 언론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먹거리인데 〈먹거리는:'먹다+거리'이다.〉 또한〈조붓하다:조붓하다는 '조용하다+오붓하다'〉의 조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어는 함축적인 의미를 집약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오묘한 발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 창작에 있어 초보자 일수록 주의해야 될 것은 멋이나 무게를 주는 듯한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한자어 사용은 문장전체를 딱딱하고 굳히는 듯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문(死文)을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한자어는 약(藥)으로 한두 자 쓰였을 경우 꽃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이다.
7. 시제(詩題)의 의미
이름이 그 사람의 얼굴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제목은 한 작품의 전문(全文)을 대신하는 얼굴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난다고 가정했을 때 우선적인 관심거리가 그 사람의 외형적 모습, 즉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잘라보지 않고서는 무의 속을 모르듯 단적인 시간 속에는 그 외형적인 요소만이 그 사람의 성품과 진실성의 여부까지도 점지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모든 문학 장르에서 제목이 갖는 역할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제목은 미인의 얼굴과도 같다.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미인 앞에선 누구나 조건 없이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 듯 제목이 참 좋다거나 멋있다거나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섰을 때 빨리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그만큼 제목이 갖는 비중이 크다고 할 것이다.
적게는 3할 내지 많게는 5할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문학 작품에서의 제목 붙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내세워 독자들의 상상에 작품성을 맡기기도 하니 말이다. 특히 백일장에서의 시제(詩題)는 참가자의 의욕을 저울질 하는가 하면 당락의 결정적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습작하는 초보자일수록 제목을 먼저 정하고서 지향하는 주제에 벗어나지 않도록 작품을 써내려 가면 통일성을 잃지 않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쓴 다음에 제목을 부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가급적 초보자는 삼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제목 자체도 작품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학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처음 창작을 하는 경우엔 사물의 이름이나 단아한 이미지의 제목을 내세우는 예가 빈번하겠지만 수준이 향상 될수록 제목도 창작이여야 한다. 그렇다 해서 기존의 멋진 제목을 표절하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금물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아무리 보기 좋은 멋진 것이라 할지라도 남이 먼저 입은 것을 똑 같이 흉내 낸 것이라면 꼴불견 일 수밖에 없다.
필자 생각으론 주제의식이 강하고 작품 흐름이 빠른 경우엔 단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제목을, 반면 관조적이면서 배경화면이 서정성을 띠고 있으면 제목 자체도 그에 상응한 회화성을 가미한다면 훨씬 멋스러움과 작가적 운치를 더하지 않을까 싶다.
긴 밤이 깊을수록 꿈도 깊은 창가에서
아슴한 기억들을 풀벌레가 꿰는 이 밤
얼비친 이승 한켠을 달빛 보듯 하는가
〈한춘자 ․ 가을 밤에〉
8. 창작과 퇴고
한 편의 작품을 빚는데 있어 평소 마음속에 품었던 구상을 의도적으로 작품화하는 경우와 즉흥적 감흥에 의해서 작품화하는 두 유형을 누구나 경험했으리라 본다. 전자의 경우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자료수집으로 탄탄한 작품이 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다소 작품 질은 떨어지긴 하나 군데군데 반짝이는 (시귀)를 느꼈을 것이다.
이는 집에서의 글쓰기와 백일장에서 글쓰기의 차이점과도 흡사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품다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퇴고(추고)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 승패의 여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필자의 경험을 한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삼십 년 전쯤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나도 그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무지개를 어떠하면 시조작품에 앉힐까 싶어 많이도 고뇌하며 속을 다렸다.
예1)
내 가슴 뛰는 곳엔
개울물이 흐르는가
눈에 선 환한 기쁨
영롱한 그 꿈빛을
산 너머
먼 산 저 너머
피고 지던 꽃하늘 (비쳐주던 꽃하늘)
예2)
소낙비 울음 뒤에 하늘문이 열리던 날
○○○ 냇물 한 줄 내 맘속에 흘려 놓고
산 너머 먼 산 너머 사라지던 무지개
예3)
소낙비 울음 뒤에 하늘문이 열리던 날
천연색 냇물 한 줄 내 맘속에 흘려놓고
산 너머 먼 산 저 너머 사라지던 무지개
예1)은 초고다. 가만 살펴 보면 초장이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마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글쓰는 이의 양심으로 이건 창작이라 할 수 없었기에 수십 번은 뜯어고치며 6개월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예2)에 이르게 되었다.
예2)에서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무지개의 색상을 표현할까하고 깊은 회의에 빠져있던 중 우연찮게 직장에서 우편물 구분 작업 중 한 알의 영롱한 보석과도 같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TV 시청료 납부고지서에 보면 흑백 또는 천연색 두 가지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바로 이거야!’ 하고 탄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이후 내 역량의 한계로서는 예3)과 같이 퇴고를 완료할 수밖에 없었고 모 월간지에 작품을 투고한 결과 제 일석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위와 같이 어떤 계기로 작품을 빚기 시작했을 때 초고에서 퇴고 완료까지는 엄청난 시련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런 산고의 연후에서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창작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단수와 연작 ①
정형시인 시조에 있어 단수(短首)와 연작(連作, 또는 연시조)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단수란 말은 단형(短型) 시조 한 수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연작(연시조)은 시조 단수, 즉 시조 한 수 이상이 한 작품 안에 시형의 틀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제목의 작품 안에 단수가 2개 놓이면 두수 연작, 3개 놓이면 세수 연작, 5개 놓이면 오수 연작이라 말한다.
보기 1)
구만리 사랑 앞에 불면은 이끼 낀 달빛
그 달빛 사려 모아 가슴 깊이 묻었더니
감은 눈 한 장 수틀에 가득 피는 달맞이꽃
〈김무영 ․ 달맞이꽃〉
보기 2)
녹이 슨 배경 하나 비스듬히 버려졌고
그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앉는
바다는 4악장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 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유재영 ․ 월포리 산조〉
보기 3)
내 유백의 살을 풀어 돌덩이에 옮겨보면
멍이 든 아픔도 다 네게서 삭아지고
어느새 한 점 혈육의 영혼이 눈을 뜬다.
사무치는 비원도 유품에 새긴 옛님
몇 생을 돌려놓은 이승은 못담으랴
창호에 묵이 스미듯 손을 꿰어 넣는다.
때로는 사는 일이 풀 한포기 거두는 일
하던 일 밀어두고 강가에 나 앉으면
낯설고 희미한 손금 내 슬픔의 강물이여.
〈최길하· 손〉
보기 1)은 단형시조 한 수인 단수다. 보기 2)는 단수 둘을 합친 두수 연작시조이고, 보기 3)은 단수를 3번 앉힌 세수 연작이다. 이렇듯 단수를 여러 번 중첩함으로써 5수 연작 또는 한 작품 안에 한 수 한 수를 앉히는 수 만큼 12수 연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10. 단수와 연작 ②
뭐니뭐니 해도 시조는 단수다 라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시조의 묘미가 단수에 있음을 단적으로 대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수, 즉 평시조 한 수 안에 놓인 글자 수를 세어보면 어느 작품이건 45자 안팎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초, 중, 종장에 앉힌 한자 한자의 글자 수를 모두 합쳐보면 보편적으로 44. 45. 46자 정도라는 것이다. 이 45자 내외의 글자 속에 창자(創者)가 지향하는 모든 세계관을 일궈내야 하는 것이 단수가 갖는 특징이다.
혹자는 45자 내외로 된 그릇이 너무 적어 한편의 작품을 담아내기란 역부족이라고 염려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잎 틔우고 꽃피우는 냉이의 하찮은 듯한 한 톨 풀씨의 삶에서부터, 삼라만상 온 우주를 다 담아 낼 수 있는 절대의 그릇이 삼장 육구 십이절로 형성된 시조 단수인 것이다. 이러한 비법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탁마와 퇴고에 있다고 하겠다. 비견한 예로 우리의 고시조에는 연작이라는 것이 없다. 더구나 그 작품을 예견하는 시제 또한 따로 붙이지 않았었다.
단수에 비해 연작은 한 작품 안에 창자가 의도한 시상을 다 펼칠 수 없을 때 연작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득이 연작을 빚어야 했을 때 외형적 무게감을 주는 듯한 시형만 늘린다 해서 연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네 수 연작을 빚었다고 했을 때 어느 한 수를 떼어놓아도 독립성을 갖는 작품으로 빚어 단단히 구워져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단편적인 소재로 작품을 빚고자 했을 땐 단수를, 오늘날과 같이 극도로 문명화된 현대적 삶을 노래하고자 했을 땐 연작을 쓰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이 때 여럿 소재의 설정을 차분하게 앉혀 가면 창자(創者)가 원하는 만큼의 질량도 따를 것이다. 특히 연작에 있어 주의할 점은 작품의 내면적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조는 절제와 긴장감을 놓치게 되면 작품 전체를 잃게 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1. 시형 앉히기의 여러 형태
굳이 시조에서의 시형(詩形)을 말한다면 3장(三章)이 기본이다. 이는 즉 초장, 중장, 종장을 뜻한다. 자유시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3행시(三行詩)인 셈이다. 시조하면 3행으로 쓰는 것이 기본 틀이긴 하나 오늘날 시조 형식은 자유시 못지 않는 여러 형태를 구사하는 것도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에 적절한 변화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각도의 행(行)이 만들어 낸 연(聯)은 시각적 효과 뿐 아니라, 읽히는 맛과 작품의 이해를 넓히는 데도 적잖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1)
호미자국 땀내음 뙤악볕에 남겨둔 채
풋고추랑 따들고 산색시 떠난 산밭
그 고운 손길을 머금어 콩꽃 한창 일었다.
〈이주석· 산밭〉
예2)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 개화〉
예3)
초침은
달리는 말
분침은
달팽이 발
가는 건지
마는 건지
시침은
부처님 손
손 얼른
움직이셔야
도시락
먹을텐데...
〈서벌· 넷째 시간〉
예1)은 시의 이미지가 물 흐르 듯 유연성을 띄는 3행, 즉 3장으로 구성된 전통적 평시조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예2)는 구(句)로 이뤄진 6행시 인데, 알맞은 시귀로 끊어준 결과가 마치 겹겹의 꽃잎이 벌어져 한 장 한 장의 하늘이 조심스럽게 열려옴을 시각적 미학으로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예3)은 시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초침 분침 시침의 행보를 두고 짤막짤막한 비유법을 구사함으로써 앙증맞도록 귀여운 작품으로 탄생되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이 동시조는 한 음보를 행으로 구분 지음으로서 마디(節)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시조에서 한 장이 행이 되고 연작 시조 중 한 수 한 수가 연에 해당 되겠지만 3장 6구 12절로 형성된 단수 하나만으로도 시귀를 어떻게 앉히느냐에 따라서 행과 연이 달라지고 시각적 효과와 읽히는 맛이 또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시조에서의 시형 앉히기란 창자의 의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구분 짓기 어려울 만큼 천차만별이지만 초보자는 가급적 위 예시와 같은 시형에서부터 조금씩 발전해간다면 시조만이 지닐 수 있는 단아한 멋을 잃지 않을 것이다.
12. 현대시(시조) 무엇을 쓸 것인가
모든 향유의 유혹을 뿌리치고 왜 글을 쓰는가? 혹은 왜 시(시조)를 쓸 수밖에 없는가? 하는 황당한 물음에 대하여 창자(創者)로부터 여럿 답변이 사뭇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멋부리기의 취미쯤으로, 그냥 글을 쓰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분출 시키고 싶어서, 쏴아- 변기에 물 내려가 듯 생활의 스트레스를 배설하고 싶어서 등등. 어찌보면 이는 삶의 한 부분과도 같은 정신적 사치라 하고 일축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추리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린다는 창작의 고통 속엔 분명 사명의식이 수반 되어야 한다.
『권세가 인간을 교만으로 이끌어 갈 때 시(詩)는 그에게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라고 말한 美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명언이 시인의 사명의식을 단적으로 암시하듯 필을 쥔 창자의 역할이란 당대의 등대지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보며, 누구랑 부딪히고 있는가. 말 그대로 고뇌하는 지적 감각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진찰하고 어디가 어째서 아픈지를 읽어내어 처방전을 쓸 수 있어야만 명의와도 같은 현대 시인이란 칭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좀더 포괄적 의미로 우주의 생성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대라는 괴리감과 병폐된 사회현실 속에서 시간의 포충망에 걸려든 문제들을 극명하면서도 함축적인 강한 메시지를 타전했을 때 비로소 현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적어도 한 시대를 대변한 시인의 역할을 했다 할 것이다. 오늘날 시조쓰기란 영탄적 정서나 음풍영월적인 소재는 자제하고, 보다 삶의 본질을 노래한 개성적인 표현과 감각적인 언어로 쓰여졌을 때 빛나는 작품으로 어필될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 시조의 멋스런 운율을 이입시킨다면 더없는 현대시조로 거듭날 것이다.
■ 박영식
시조시인.「박영식 시조교실」운영
[《울산시조》제14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