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문인 회고( 李鎬雨 편)
차례
● 작품(개화, 청우, 달밤, 살구꽆 핀 마을, 낙화, 춘소, 균열)
● 이병기 추천사
● 이호우 연표
● 이호우 작품세계/리태극, 대방가/서벌, 이호우연구/김창완, 30주년 이호우/행사
1940년 문장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 해방 후 죽순 동인으로 창작시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시조는 인간의
삶이 자연을 받아들이고 향수하는 수동적인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한 시대와 한 민족
이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핵심으로 그의 정신세계를 몰고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기빨', '춘한', '촉석루' 등과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힌 찬미나 영탄에서 벗어나 시인의 현실과 대상현실을 일치시킴
으로써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창완 정형시에의 향수와 일탈
개화(開花)
꽃이 피메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제
-「현대문학」1962
휴화산(休火山)
일찍이 천길 불길을
터뜨려도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달래어
자듯이 이 날을 견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믿어
함부로치 못함일세
-「시조문학」6집 1962.11
청우(聽雨)
-1961년 가을. 미소 원폭실험 경쟁에 즈음하여
무상을 타이르는
가을 밤 빗소린데
서로 죽임을 앞서려
뿌리는 방사능진
두어도 백년을 채 못할
네나 내가 아니가
-「시조문학」1964
달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 날밤도
할버진 율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낙화(落花)
두메에 비가 오니 개울에도 낙화로고
이왕 질 바엔 차라리 옳앳도다
곱다리 유수(流水)에 부쳐 종적없이 하여라
-「죽순」11집 1949
춘소(春宵)
오붓이 봄 한밤을
무르익은 너의 젖가슴은
너무도 달디단 꽃술
나는 취한 한 마리 호접
이대로 꽃잎 오무라
하냥 옥고만지라
- 여백록
균열(龜裂)*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줄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이호우 시조집에는 "바위 앞에서"로 수록
◆이호우 연표◆
1912.3.2 경북 청도 대성면 내호동(현재 청도읍 내호리) 259번지 부 본관 경주 이 종수와 모 구 봉래 사이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필명 이호우(爾豪雨)
1924 밀양보통학교 졸업
1926 일본 동경 예술대학에 유학
1930 신경쇠약 증세 재발과 위장염으로 학업 포기. 귀국
1934 경북 칠곡의 본관 김해 김 진희의 영애 김 순남과 결혼
1936 시조"연춘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없는 가작 입선
이후 40년 추천전까지 동아일보 독자투고에 <낙엽>,<진달래>,<새벽> 등을 투고, 선을 맡은 이 병기 선생이
엽서를 보내 문장지 추천제를 안내함
1940 시조 <달밤>이 문장지 추천됨
1946 고향 가산정리 대구 대봉동으로 이사. 이후 한 때 대구고등법원 재무장, 적산인 문화극장 사무국장
1949 남로당 도간부로 모략 받아 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 받음
1950 봄, 무죄 방면(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인 시인 김 광섭의 진언으로 석방)
1954 윤 계현과 함께 「고금 명시조정해」(문성당) 출간
1955 시조 <바람벌> 대구대학보(현 영남대)에 발표, 이 작품이 반공법에 저촉.
첫시조집 「이호우시조집」(영웅출판사) 출간
1956 "경북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956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
1958 KAL기 납북사건 때 매일신문 사설로 필화
1960 청마 유치환과 전국예술단체 총연맹(예맹) 결성
1967 영남시조문학회장(초대)
1968 시조집 「휴화산」(중앙출판사) 발행
1970.1.6 대구 동문다방을 나와 귀가 중 심장마비로 졸도 경북대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타계
1970.1.10 10시 협성상고 교정에서 문인장 거행
1972.1.6 대구 앞선 공원 이 호우 시비 제막
1991 이호우 문학상 기금 마련 전시회
1992.1.6 이호우 시조 전집 「차라리 절망을 배워」간행
1992.1 제1회 이호우시조문학상 시상
가람 이병기 추천사/ 달밤/ 이호우
秋江 밝은 달에 一葉片舟 혼자 저어
낙대를 떨쳐 드니 잠든 白鷗 다 놀란다.
어데서 一聲 漁笛은 조차 흥을 돕나니
小船에 그물 실을 제 酒樽 행여 잊을세라
東嶺에 달 돋앗다 어서 배를 띄어스라
아희야 盞자로 부어라 李白 본 듯 하여라
蘇仙七月 이달이오 赤壁江月 이 달이라
이 달은 그 달이나 그 사람 어대 간고
두어라 이 달 두고 감은 날 위한가 하노라
이상은 옛날 사람의 달밤을 읊은 것이다. 으레히 江이면 白鷗 漁笛 興 酒樽 盞 李白 蘇仙 등을 썼다. 정말 그밤
그 강에 백구 어적 주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독특한 느낌과 용어를 쓰지못하고 그저 한시에서 항용
쓰든 것을 되풀이 하였다. 그런 수작을 지금에도 하는이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호우씨의 '달밤'은 이호우로서의 느낌과 용어를 썼다. 새롭고 깨끗하고 술술하다. 아무 억지도 없고 꾸
밈도 없고 구김도 없다. 시를 짓는이가 무슨 어뚱한 굉장한 소리를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그럴 때에는 도리어
잡치고 만다. 시는 그런 야심보다도 그 靈感을 얻어야 한다. 그 靈感을 얻지 못하면 도저히 될 수 없다.
고려 김황원이가 부벽루에 올라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이라는 한 聯句만 짓고 그 全首를 못얽어 苦吟
하다가 통곡을 한것도 그 靈感을 잃었든 것이었다.
과연 이 '달밤'은 범상한 제재를 가지고 이와 같은 詩를 지은 건 그의 천품과 조예가 어떠함을 능히 짐작하겠으며
우리 詩壇의 한 자리를 그에게 許與 않을 수 없 다.
'문장' 제2권 6.7월호 합
◆이호우의 작품 세계◆
이호우는 초기작인 <달밤>에서는 가람과 노산의 작풍을 본받아 낭만과 悠適을 나타냈으나. <바위>에 와서는 그의
작품관이 세워진 생활상을 진지하게 구상화하였고, <개화>에 이르러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 현대시조의 면모를
확립시켰다. 가람과 노산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작가라고 하겠다
<리태극, 「한국현대시조개관」중에서
◆대방가, 즉, 대가란 필요에 따라 아무에게나 가 붙는 호칭이 아니다.
한 시대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고, 해당 전문 분야는 물론이려니와 사회 전체가 고루 수긍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의 면모가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이 그를 따르면서 존경하고, 언제까지나 우뚝한 존대로 마음에
새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뒷사람들에게까지 변함없이 공감할 바를 주고, 적잖게 끼쳐 줄 바를 확보해둔 사람만이
대가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첫째, 이호우는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보여 온 시조 습작과 추천 과정을 거쳐 타계한 1970년 벽두까지 줄곧
시조 작품을 출중하게 노래해 왔었다. 그처럼 30년이 넘도록 그때마다 남다른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는 점에서 시조
분야의 마천루(摩天樓)다.
둘째, 이호우는 현대시조를 열어 준 선두 주역 중의 하나였다. 갑오경장 이후부터 진전된 것이 신시조이고, 그것을
제대로 탈바꿈시킨 것이 혁신시조이며, 다시 그것을 오늘의 문학이 되도록 탈바꿈시킨 것이 현대시조다. 이호우가
취한 현대적 시조 역할은 8·15 국어 광복으로부터 비롯되어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오늘의 세계 문학 사조와 기
법에다 잇닿게 한 첨단의 가락이었으며, 중후한 지성인의 시적이면서 국제감각을 도외시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적
사회적 시조 지향의 길이었다.
셋째, 이호우의 일생은 안으로 드높이 세운 기품을 격조로 잘 조절한 삶이었다. 그것은 그가 함부롭지 않게 살면서
도 멋지게 살다 갔음을 뜻한다. 이는 그의 시조 품격과 일치도어 있는 삶이다.
넷째, 이호우는 고매하면서도 과감한 인물이었다. 투철한 역사적 안목으로 현실태에다 발딛은 정의와 자유인으로서
의 그였고, 그러한 그의 정신적 파급성과 행동 역능은 오늘 이 시각에 더 파장되고 있다. 더러운 시속의 결이 일면
초연히 대처하고, 부당함이 극에 달하면 결연히 저항한 그였다. 그 때문에 6·25 와중에서 그를 아낀 문단 일각에
서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여 목숨만 건졌으나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그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정몽주 혹
은 사육신의 기개를 받아 내린 그였고, 남궁억, 신채호 장지연 한용운 같은 근대적 지사형의 문인 면모와 맥이 통
하는 그였다. 그가 대구매일신문 등에서 보여준 강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칼럼을 통해 봐도 여실히 증명되는 일이다.
다섯째, 이호우의 문학관을 움직인 철학과 사상 성향은 <한> 혹은 <하나>로 집약되어 있거나 표출되어 있다. 그것
은 무엇보다도 분단 없이 온전해야 한다는 조국 민족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백 범 김구의 투지 의연한 신념과
행동과 다르잖은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이나 신념에 찬 어휘 능력은 그의 시조 도처에 철근처럼 세
워져 있고 받쳐져 있다. 그런 그는 현대적 지사형의 문인, 그 한 기둥이자 대들보이다.
<서벌, 「현대시조의 마천루, 이호우」홈토피아 1989 1월호
◆이호우의 시조는 (중략) 한국 현대시조의 고민을 그대로 안고 있는, 한국 현대시조의 전형성을 보여 준다. 율격
을 지키고자 하는 전통에의 염원과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변혁에의 의지가 그의 시조에는 교차하고 있으며,
소재와 내용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자유시적인 것이 섞여있다. (중략) 이호우의 변형 의지는 형식적인 면에서보다는
내용의 면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시조의 많은 부분이 전시대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의 언어가 많이 고전적인 '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시의 이미지와 상징 수법을 시조 속에
차용하고 있는 점과 비시조적 소재를 끌어들이려 노력한 점은 잊정해야 될 것 같다.
<김창완,「정형에의 향수와 일탈」,한국현대시문학대계22「김상옥, 이호우」
- "시조문학' 2000년 겨울호
◆제30주기 이호우 시조문학회 밤 행사 거행
시조문학의 현대적 계승에 큰 업적을 남기신 이호우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2000년 추모 세미나와 시상식이 11월
25일 4시 수성구 두산동 200-1 아리아나 호텔 7층 백합홀에서 이호우 문학기념회(회장 심재완) 주최로 거행되었다.
제1부 세미나에서는 이호우 시조론연구/문무학, 이호우 선생의 인간적 면모/류상덕, 현대시조의 위상과 전망/ 유재
영 등의 주제 발표가 있었고, 제2부 행사로 거행된 시상식에서는 이우걸 시인이 작품 '수저'외 1편으로 영예의 이호
우 시조문학상(제10회)을 수상하였다.
- "시조문학' 200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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