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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은 다양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는 사학가요 수필가요 시조작가였다.
처음에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던 노산이 본격적으로 시조작가로서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후반에 일어났던 시조부흥 운동 이후였다.
그의 시조는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인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향수와 감상
과 무상과 자연예찬을 노래하였다.이러한 그의 서정성이 우리 가곡에 걸맞아 인구에
회자하는 주옥 같은 노래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이 지금까지 국민
가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 분단의 아품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가들에 대한
찬양 등 개인서정보다 사회적인 면에 치우쳐있어 국토 어디에 가나 서도가 김충현과
함께 그의 노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어 노산을 기리고 있다.
1.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
苦難의 운명을 지고 歷史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心臟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성불사 1수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너는 지금 어드메 있나
누더기 한 폭 걸치고 土幕 속에 누워 있나
네 소원 이룰 길 없어 네 거리를 헤매나
오늘 아침도 수없이 떠나가는 봇짐들
어디론지 살길을 찾아 헤매는 무리들일랑
그 속에 너도 섞여서 앞 山 마루를 넘어왔나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落照보다 더 쓸쓸한 祖國아
긴긴 밤 가얏고 소리 마냥 가슴을 파고드는 네 이름아
새 봄날 桃李花같이 활짝 한 번 피어주렴
오륙도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맑으락 함에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단데
오늘은 비 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갓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나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 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 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 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 잠 들어 죄 없은 몸이
그 바다 물 소리를
밤 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 바다 물을 따라
나명 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 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봄처녀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 쓰고 眞珠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길에 내 집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냥 나가 물어 볼까나
2. 노산의 생애
경상남도 마산에서 이승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사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조선
일보사 출판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하고, 사상범으로 광양경찰서
에 유치 중 광복으로 풀려났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이었다.
1932년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
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 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 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
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시험하여,시조의 단형화를 시조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
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 순례 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가 죽자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