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1965∼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 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a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그대와 만나는 순간부터 그대와의 이별도 시작한다. 민들레에게서 배우자. 민들레꽃은 바람이 무거워하지 않을 만큼 가볍고 투명해진 다음,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옛 애인,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애인도 언젠가 옛 애인이 된다. 민들레처럼, 서로 버리지도 말고, 버려지지도 말자.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