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 성미정(1967∼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디나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사랑은 사소한 데서 출발한다. 가늘게 떨리는 귀밑머리, 정맥이 드러나는 희고 긴 손, 영화표 한 장, 그날 처음 가까이에서 본 그 남자의 턱수염 따위. 사랑은 저렇게 미미했다가 이윽고 창대해지는 것인데, 사랑의 끝은 왜 그토록 추레할 때가 많은가. 사랑은 늘 시작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다가 죽을 수 있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