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정원 9 - 번짐 - 장석남(1965∼ )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번진다는 말, 참 오랜만이다. 습자지, 스케치 북으로 스며들던 먹물과 그림물감. 젖은 붓을 받아들이기 위해 종이는 잘 말라 있다. 그런데 종이가 완전히 말라 있을 때보다, 약간 젖어 있을 때, 잘 번진다. 물기가 있어야 한다. 네가 내게 올 때 나는 물기가 생긴다. 어디 번짐뿐이랴. 스밈과 어울림, 나눔도 그렇다. 다 번짐의 형제들, 사랑의 혈연들이다. 스며야 번지고, 번져야 나눈다. 어울려야 함께 환해진다. 번져야 사랑이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