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천상병(1930~93)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일기가 아니고 편지다. 일기는 쓰는 사람과 쓴 글 사이에 거리가 없지만,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시간과 공간이 개입한다. 일기는 지울 수 있지만, 부친 편지는 되돌릴 수 없다. 일기와 편지는 독백과 대화만큼 서로 다르다. 모처럼 배가 든든한 내가 굶주렸던 나에게 쓰는 편지. 나를 '자네'라 부르며 쓴소리하는 편지. 나를 배반하는 것은 주로 나다. 나의 자네에게 편지를 자주 쓸 일이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