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 도종환(1954~)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시 속의 나는 산 '옆에' 있다. 산의 위나 아래, 앞이나 뒤가 아니라 옆이다. 상하 혹은 전후는 지배관계다. 위는 아래를 누르려 하고, 앞은 뒤를 무시하려 든다. 하지만 옆은 다르다. 옆은 바로 동행하는 사람의 자리다. 벗은, 사랑하는 이는 옆에 있다. 위로, 앞으로 나서기보다, 말없이 그의 옆으로 가자. 더불어 함께 가자.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