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 허수경(1964~ )
간곡한 기계가 있었다 우리 앞에
우린 그 기계 앞에 서 있었다
기계는 우리를 온 힘으로 찍었다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너를 동물원에 앉아 있는 나를
돼지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종사촌과 나를 찍었다
머리칼을 잘라 팔던 날
우연히 지나가던 사진사가 날 찍었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나에게로 왔다
사진첩을 넘겨도 내게는 돌잔치 상을 받은 사진이 없다. 예닐곱 살의 누이와 봉숭아꽃밭에 서 있는 어느 아침의 풍경이 첫 사진이다. 누이는 윗도리 옷을 내게서 물려받아 입고 있다. 소맷부리가 너덜너덜하다. 안장이 높은 짐 자전거에 올라탄 사진도 한 장 있다. 페달에 닿지 않는 두 발은 공중에 있다. 그 흑백사진을 보면 평면의 필름 바깥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와 먼 벌판까지 내달리고 싶어진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