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비스타 - 강인한
깊은 서랍 속 내 4B연필이 그리고 싶은 것은
렘브란트의 야경 밑으로 배어 나오는 따스한 추억
호수 위에 조는 아라베스크 희미한 별빛,
그러나 실연의 아픔에 머리 풀고 우는 버드나무처럼
노을이 빌딩 유리창에 던지는 거대한 실루엣을 나는 본다
어떤 새들이 노래하고
어떤 새들이 울고 갔을까 연필로 그린 새소리가
청계천 돌돌거리는 수면 위에서 지워져 가는 동안
내 안호주머니엔 부쳐야 할 축의금과 조의금이
무순으로 섞여서 우체국을 꺼낸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
철사처럼 가늘다
냉장고에 숨어서 가슴을 부여안고 조금씩 미쳐버린
검은 비닐봉지 속의 안부가 걱정스럽지만
속상한 햄과 진작 토라진 우유팩이
골수 보수정당처럼 뭉쳐서 부패의 향연을 벌일 때,
라일락나무의 개화로부터 은행나무의 낙엽까지
나는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다
타르 3.0과 타르 6.0 사이의 거리를 오고가며 선택하며
무수한 경고를 얼마든지 나는 무시하였다
어쩔 것인가
묻노니 도저한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력인가 끝끝내
아프간에 뿌리내리고 싶은 선교의 야망인가
나는 살고 싶어요,
김선일의 목젖을 떨어 울리는 비참한 단말마를
돼지고기 한 근 썰어 저울에 올리듯
무슬림의 칼이 천천히 베어내고 있을 때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는가
너의 기도는 턱없이 모자라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는 영세하고 영세한 슬픔이었던가
밤에만 눈뜨는 루체비스타
허깨비의 풍경이여, 동아일보사 앞에서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청계천에 나는 감동한다
유령잉어가 유유히 헤엄쳐 가는 거기
산소호흡기를 물고 뛰노는 붕어와 날치들
위대한 전기의 꿈으로 이 도시는 불멸의 역사를 향하느니
친애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이층과 삼층의
어느 전시실에도 빈센트 반 고흐의 잘려진 귀 한 짝을
찾을 수 없고, 그의 침실은 소실점으로 졸아들다가
마침내 감자 먹는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서
십이월이 다 가도록 오지 않았다
네온의 십자가 아래 기도가 충분치 못한 탓이었다
보라, 루체비스타가 휘황한 이 광장 지하에는
지상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개미집의 개미들처럼 웅성거리며 여기서 스테이크를 자르고
저기서 카푸치노를 마신다 아니, 아니,
거대한 냉장고 속 검은 비닐의 옆구리를 비집고
천원짜리 중국산을 만나러 깊이 깊이 들어간다
꿈보다 깊은 마취를 즐기러 땅속 깊이 들어가는 순간
온라인으로 충돌하는 약소한 기쁨과 슬픔
허공에서 문득 파랗게 파랗게 스파크를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