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박상순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고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안개가 짙다.
내 어린 낙타는 벌써 잠이 들었다,세상의 모든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저녁. 살아 있는 집과 죽은 집, 불 켜진 집과 꺼진 집. 모든 집들이
모여 긴 오징어 다리를 달고 흐느적흐느적 헤엄치는 흰 물결 속에 잠이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에 걸린 얼굴들이 움직인다. 낯익
은 젖은 얼굴들.비에 젖은 낙엽처럼 오징어 다리에 붙어 길바닥을 훑는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몰려온다.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잠들어버
렸다.
더 가까이,익숙한 집들이 몰려와 앞을 막는다. 내가 살던 집과 태어나던
집과…… 혼자 웃던 집과 불태운 집. 몰래 숨긴 집과…… 함께 떠들던 집
과 함께 떠난 집…… 함께 구멍을 뚫던 집…… 들이 다 한곳으로 몰려와
앞을 막는다.
수많은 오징어들이 충돌한다.잠든 내 낙타를 들이박는다. 몰려드는 집들,
젖은 얼굴들.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던,이미 사라진 내 옛집도 달
려나온 길 위에 굽이치는 흰 물결.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오래전에
잠들고 밤이, 흰 물결 속에서 밤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내 낙타안개/박
상순 를 닮은,죽은 내 낙타를 닮은 젖은 얼굴 하나가 황혼을 품에 안고 뒤
돌아,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인생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으며 그녀는 걱정한다.창
밖엔 늘 안개가 짙다.
詩/박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