酩酊(명정) | |||||||||||||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 던지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三日長醉(삼일장취)의 酩酊(명정)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時速(시속)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큰 땅이 내 사는 곳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 -임병호(1947∼2003) 시집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에서 <안동작가>라는 잡지가 집으로 배달되어 온 적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들추다가 임병호라는 시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모르는 시인, 문단에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잊혀진 시인, 그러면서도 평생을 시인으로만 살다간 시인다운 시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병호 시인은 1970년대 말에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다룬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공단』이라는 시집을 1990년에 부산의 <글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냈다고 하는군요. 그 전에 안동에서 글밭 동인을 이끌었고, 1988년에는 『실천문학』으로 등단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문학사에서 임병호라는 이름은 빠져 있습니다. 책에 인용된 몇 편의 시를 볼 때 결코 진부하거나 선동 위주의 거친 작품도 아니고 서정이 담긴 노동시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쩐 일인지 241명의 시인을 다룬 『한국대표노동시집』(김윤태, 맹문재, 박영근, 조기조 공편)에도 그의 이름은 빠져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임병호 시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문학적 복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안동에 붙박혀 살면서 평생 술과 시만 끼고 살았던 모양입니다. 작년에 작고한 박영근 시인 못지않은 일화들이 안동 문단에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하는군요. 작년 겨울 작가회의 총회가 끝나고 뒤풀이 때 마침 안동의 안상학 시인과 마주할 기회가 있어 잠시 임병호 시인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에게서 전해들은 잠깐의 몇 마디를 통해 나는 또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초래한 상처를 온 몸으로 껴안고 살아야 했던 한 시인의 처절함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올초에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있었습니다. 8명에 대한 사법 살인이 있은 지 30년이 넘어서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일로, 부끄러운 과거사 정리에 한 발 다가가게 만든 역사적 판결이었습니다. 그 동안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아야 했던 유족들의 고통은 일반인들이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병호 시인의 가까운 인척이 인혁당 사건에 관련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로 인해 임병호 시인이 젊은 시절에 좌절과 방황의 시간들을 거쳐 와야 했고, 1981년인가에는 다리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서 불구를 자초하기도 했다는군요. 고인은 평생 인혁당 사건과 그와 관련되어 겪어야 했던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입을 다물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그가 평생을 술과 시로만 살아야 했던 이유가 고통스럽게 가슴으로 전이되어 올 따름입니다. 위 시는 임병호 시인이 스스로도 대표작으로 생각했던 시라고 합니다. ‘명정’은 술이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를 말하는데, 시인은 그때 비로소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명정의 상태가 가장 인간다운 상태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며 좋겠다’고 하던 그가 이제는 닷새가 아니라 영원히 ‘오욕의 땅’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명정과도 같이 맑고 순수한 상태의 저 너머 세상에서 인혁당 관련자 무죄라는 판결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도 위 시는 절창입니다. 거리낌 없는 호방함과 막힘없는 정신의 툭 트임이 느껴져 내 마음도 덩달아 ‘광활한 대륙’으로 달려갑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