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장에 가야 하는 날이 있었다'정윤천(1960~ )
草집들이 끝나는 마을 저편의 그 집. 지붕이 높았던 洋개와 집에는 내 또래의 가시내가 하나 살고 있었다.
내 성장통은 늘 인후부로부터 기척이 비쳤고, 어쩌다 마음의 絃이라도 가뭇이 울렸던 날에는 한 사흘 심
하게 편도염을 앓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양계장에 가야 하는 날이 싫어졌다. 빨랫줄로 늘어선 성한 여름
의 햇살 아래, 그 아이가 입었음직한 보랏빛 속옷 밑을 흡사 죄짓는 마음처럼 지나칠 때면, 자글거리던
매미 울음소리의 푸른 監聽 너머로는, 어쩐지 또 아카시아 하얀 꽃송이들이 자꾸만 피어오르기도 했었다.
밭고랑 빠져나온 감자알 같은 소년은 이웃 마을에 사는 '숙'이라는 이름의 감꽃처럼 풋풋한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그 애가 나타나면 멀리서도 마구 뛰는 동계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소년에게 여자아이는 세계의 전부였다. 모든
사물은 그 애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었다. 산간 마을에 내린 첫눈처럼 순백했던 영혼이여, 냇물을 건
너고 언덕을 넘어오는 동안 소년은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아도 되는, 마음에 그을음 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재무<시인>
이재무<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