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역전 - 이기와
그 역전은 대낮에도 어둡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습습한 그림자가
개기월식처럼 역의 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이하게 생긴 물체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웃음의 쪽지를 보낸 지 석 달째
드디어 녹빛 경계(境界)의 칼을 내려놓고
답신이 오기 시작했다
고장난 분수대 옆에서 그녀가 웃는다
그녀는 사내들의 슬픈 욕정에 기생하는 포주다
한 때 그 색과 향이 역전 바닥에선 최고였을
물 좋은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그녀의 몸은 텅 빈 대합실이다
어둠의 딸들에게 물어다 주기 위해
사냥감을 골라 찌든 그물을 던져보지만
걸리는 건 잔챙이 바람뿐
무의미한 것들로 꽉 차 만사 지루해진 표정으로
그녀는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린다
짝 잃은 갈매기 울음에 휘감기는 항구처럼 기다린다
그녀의 상처뿌리가 풍란의 뿌리처럼 공중으로 나와
노골적으로 읽히고 있는 역전의 정오
그녀의 비애는 늘 중천에 떠 있고
시계탑의 바늘은 꼬인 인생처럼 헛바퀴를 돌고
누구 하나 도색잡지 같은 그녀를 정독해 주지 않지만
그녀는 아직 무덤이 아니다
나는 석 달째 거울을 보듯 그녀를 본다
그녀도 거울을 보듯 나를 본다
발을 담가 보지 않아도 그늘의 깊이를 서로 알 것 같은
오늘은 산들바람처럼 그녀의 웃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