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1970~ ), '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1890년에 세상을 떠난 화가. 아직 죽지 않고 자화상을 대변한다. 뒤늦은 영광.
과거의 형식이 오늘의 자리를 차지하고, 오늘의 얼굴을 그리는 자는 또 귀를
자른다. 그렇지만 현재여 슬퍼 말아라. 기어코 우리는 부활하리라.
박상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