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1965 ̄ ), '푸른 돛배' 전문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순간의, 그 꿈꾸는 듯한 속도에 실려 출렁이는
저 푸른 돛배의 계절을 보셨나요 가을이거나
또 다른 겨울의 틈새, 간혹 눈 내리는 초겨울
탁구공 같은 우주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흘러가거나 멈추는 것들의 영원,
그 매 순간의 황홀하고도 무거운 영원 속에서
수십 장의 나뭇잎들이 몸 뒤척일 때마다
푸른 돛배로 바뀌는 신비를 보았나요
촛불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푸른 돛배
그대 무심히 내뿜는 담배 연기 속의 푸른 돛배
그 푸른 돛배가 황금의 노을로 사라질 때까지
눈감지 못하는 그대 눈동자 속의 푸른 돛배
그대 눈동자 뒤편에서 출렁이는,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가볍고도 아름다운 그 동그란 공기 속에서
가기도 잘도 가는
푸른 돛배 한 척
탁구공 속에서 어떻게 푸른 돛배를 보았을까?
푸른 탁구대에서 튕겨 오르는 탁구공에서 푸른 바닷물이 출렁거리며
튕겨내는 배를 본 것일까? 거칠게 파도치다 갑자기 잔잔해지곤 하는
그 출렁거림의 운동성 속에서 계절의 순환과 항성들의 운행을 엿본 것일까?
탁구공과 푸른 돛배의 폭력적인 이미지의 결합에서
라켓과 탁구대에 부딪치는 탁구공 속의 가볍고 동그란 공기의 소리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