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섭(1965~ ) '세한도(歲寒圖)' 전문
당나귀 타고
달리는 차도를 지나
창 많은 문우(文友) 집들도 지나
소나무, 잣나무 네 그루 서 있는 집을 찾아가다
때는 여름인데
여기는 벌써 겨울이고
여름나무들은 방자히 푸른데
이 집의 송백(松柏)은 흰 눈 속에 푸르다
집이 한 채밖에 없으니
주인은 귀양 온지 알겠고
창이 하나밖에 없으니
오래 외로웠음을 알겠다
돌아나오려 하나
당나귀는 자꾸만 뒷발로 버티고
흰 눈은 무량무량 왔던 길을 지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세상을 향해 낸 작은 창문과 같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이 외롭고 아름다운 집에는 차를
타고 못 간다.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어슬렁어슬렁,
그게 시를 찾아가는 데는 제격이다. 세한도(歲寒圖)
속의 적막한 집을 한 채씩 품고 사는 시인들이여,
세상은 무성한 여름인데 그대의 소나무.
잣나무 위에는 흰 눈이 얹혀 있구나.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