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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1955~) '무늬들은 빈집에서' 전문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방이나 집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 살다 떠난 자리에 도란도란 남아 있는 무늬들. 그 무늬들 위에 또다른 무늬를 남기며 사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빈집에서 무늬들이 서로 어룽거리다가, 깔깔거리다가, 때로 싸우기도 하다가, 누군가 들어서면 일제히 입을 다문다는 것을. 엷디엷은 무늬로 다시 벽 속으로 스민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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