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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1957~) '저녁의 수련' 부분
무엇을 느끼니? 숨차 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중략)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눈이 많이 내리던 아침, 원고를 쓰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급히 시내로 나갔으나 가게문이 닫혔다. 문을 연 다른 문구점
에는 내가 찾는 잉크가 없다. 눈을 뒤집어쓴 채 망연히 걷고
있는데 명함을 찍어 파는 오래된 인쇄 가게 진열장에 내가 쓰
는 잉크 두 병이 먼지를 쓰고 앉아 있다. 품에 껴안고 돌아오
는 눈길. 몇 번씩 미끄러지며 넘어져도 헤, 웃는다.
내가 하얀 종이 위에 만년필로 쓰는 글들이 저녁의 수련처럼
고요했으면 좋겠다. 텅 빈 스크린에 펑펑 쏟아지는 흰눈처럼,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 위에 느리게 불어오는 저녁의
한숨소리처럼….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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