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퍼의 주장에 의하면 시가 힘을 가지게 되는 근원은 “추상적인 상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은 묘사에 의해 획득된다. 지배적 인상의 구체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 <점묘>는 파이퍼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시이다. 또한 이 시는 이동 시점을 택함으로써 우리에게 풍경의 내용을 다채롭게 펼쳐내고 있다. 즉, 시인의 시선은 싸리울 지는 해- 끝마당- 허드렛군- 뻐꾸기 소리-도리깨 꼭지 등으로 이동하면서 점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 <점묘>가 보여주고 있는 풍경은 새롭거나 낯선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도 낯익어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시는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은 시적 감흥을 가져다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의 특징이기도 한 객관 묘사와 주관 묘사의 절묘한 궁합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이 시에서 두 묘사의 어울림은 하나의 사물(해)이 다른 사물들(싸리울, 푸슷푸슷 튀는 연기, 도리깨 꼭지)에 관여함으로써 본래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와 미적 공간을 만나게 해준다. 이 시의 객관적 풍경은 이렇다.
어느 가을 저녁, 보리 타작을 마친 농사꾼들이 모여 타작 뒤의 검불을 모아 불을 지피고 있는데 때마침 뻐꾸기 소리와 징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만약 이 시가 이러한 객관 묘사에만 충실한 것으로 멈추었다면 우리에게 별다른 생기와 감동을 주지 못한, 범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시가 수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따라서 객관 묘사에 힘을 실어준 주관 묘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는 해가 싸리울 밖이었으므로 그 해는 마치 실뭉치가 풀리듯 ‘올올히’ 풀렸다는 것,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으로 지는 해였기에 해가 ‘이중으로’ 풀렸다는 것,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였기에 그것은 ‘또 하나’ 올올히 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등이다. 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이것은 사물과 사물 현상에 대한 시인 특유의 섬세하고도 민감한 관찰과 감성이 아니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미적 표현의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주는 감동은 묘사의 탁월함뿐이 아니다. 이 시의 또 다른 묘미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능숙한 구사이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라는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질적인 의미 체계를 갖는, 다시 말해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말과 말의 충돌과 어울림을 통해 전혀 새로운 정서적 충격을 이 시는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박용래 시는 평자들에 의해 몇 개의 카테고리로 구별되어 평가되어 왔다. 그 가운데 송재영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그의 시는 유년기의 끝없는 회상, 한국의 농촌적 전원적 풍경 묘사,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경외심 그리고 냉혹한 관찰력, 향토에 깃든 정한의 세계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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