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수확철을 앞둔 농부들의 마음은 마냥 흥겨운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태풍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우영의 시 「서울호박」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서울 호박'을 통해 생명의 불임(不姙) 현상에 대한 자기성찰적 사유를 보여줍니다. 내일모레면 이른바 9·11 미 테러 참사 1주년을 맞습니다. 그러나 '피의 보복' 전쟁은 좀체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이웃 나라로 확전할 태세입니다. "제발 그만 죽이십시오"라고 호소했던 동화작가 권정생의 절규(『녹색평론』제61호)가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삶의 조건은 갈수록 "소담스런 애호박" 하나 영글지 못하는, 사막 같은 불모(不毛)의 땅으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 살아야 할 때입니다.
서울호박
정우영
화분에 심은 호박이 제법 물도 오르고 암꽃 수꽃도 피워 무공해 호박 맛 좀 보나 했더니 벌나비가 오지 않는다 수정되지 못한 애기 호박 줄줄이 시커멓게 타 죽어가는데도 벌나비는 끝내 찾지 않는다 쓸데없는 똥파리만 잉잉거릴 뿐, 기다리는 벌나비는 영 오지 않아서 수술을 통째로 끊어 암꽃마다 박아놓았더니 그 중 몇 송이 소담스런 애호박 둥글게 키워올렸다 출퇴근길 물 뿌리며 어서 커라, 이놈아! 살맛나는 호박아! 염불 외듯 다독거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랫도리부터 잎사귀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그예 줄기까지 싹 타버렸다.
- 출전: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문학동네, 1998)
▶ 정우영 시인 약력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1989년 『민중시』에 시 발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1998)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