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1~6)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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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의 하늘. 하늘 위의 흰구름. 구름이 아름다운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잠시 시선을 둔 사이 어느새 모양이 바뀌는 구름. 어린 시절 그리 했던 것처럼 잔디밭에 누워 흰구름을 실컷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구름에 대한 노래, 구름에 대한 시, 구름에 대한 그림을 모으며 나는 구름이 좋아 수녀 이름도 구름(Cloud)으로 하지 않았던가. 시인 헤세(Hesse)와 셸리(Shelley)의 `구름`. 성서에 자주 나오는 구름의 상징성을 논문으로 쓰고 싶던 나의 갈망도 이젠 구름 속에 숨고 말았다. 푸른 하늘 위에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생각들을 종종 종이 위에 적어 둔다. 그래서 `흰구름 단상`이라 부쳐 놓고 내 생각들을 그려 넣으면 이것이 후에는 시와 수필의 소재가 되고 편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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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귐, 새로운 만남이 혹시 사랑으로 오더라도 왠지 두렵다. 누가 이것을 케케묵은 생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항아리 속의 오래된 장맛처럼, 낡은 일기장에 얹힌 세월의 향기처럼, 편안하고 담담하고 낯설지 않는 것이 나를 기쁘게 된다. 새 구두를 며칠 신다가도 이내 낡은 구두를 다시 찾아 신게 되고, 어쩌다 식탁에서 자리가 모자라서 두리번거리다가 새 얼굴인 수녀들이 오라고 해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들을 얼른 찾아가게 된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개방성과 선선함이 좋은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역시 옛 것이 좋고 오래된 것, 낯익은 것에 집착하는 나이기에 가끔은 답답하리만큼 보수적이고 고루하다는 평을 듣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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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유진 수사님이 어디서 구했는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조이스 킬머(Joyce Kilmer)의 사망 이후 그를 추모하는 글이 실린 1918년 8월 19일자 <뉴욕 타임스>의 추모 기사 원본을 오려서 보내 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거의 80년 된 기사이니 빛깔이 바래고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지만 원본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느낌... 여러 시인들이 추모 시구를 모아 놓은 내용도 마음에 들어 몇 개 복사해서 피천득 선생님과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벗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겠다.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뿐` 이라고 노래한 J. 킬머의 `나무들`이란 시가 어느 때보다도 생각나는 날이다. 사소한 일로 마음이 부대끼고 갈등 속에 있다가도 창 밖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뭐 그걸 가지고 그래?`하며 빙그레 웃는 것도 같고... 나무의 모습을 닮은 성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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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엔 웬 꿈을 그리도 많이 꾸었을까? 평소 생활을 반영해 주기도 하는 꿈의 세계.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많은 의미가 있음을 나도 자주 체험하는 편이다. 피정중에도 지도자들이 가끔 꿈을 주제로 묵상시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이 더 많지만 수도원에 오래 살면서 나의 꿈의 세계도 이젠 좀 정화되고 아름답게 성숙되고 있음을 문득 느끼며 스스로 고마워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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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잘 있었나? 실은 간밤 내 꿈에 수녀 얼굴이 보여서 말이야. 혹시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가 하고 전화 걸었지.” 아침에 걸려 온 구상 선생님의 전화. 몇 년 전. 내가 매스컴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때도 옆에 함께 안타까워하시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셨던 선생님은 내가 당신의 조카딸쯤 되는 것 같다고 웃으신다. “시인 노릇보다도 수녀 노릇을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선생님은 오늘도 사면이 시집으로 둘러 싸이고 새소리도 들리는 서재에서 시를 쓰고 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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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에서 마종기 시인이 보내 준 두권의 시집. <그 나라 하늘빛>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여러 번 읽었다. `바람의 말` `나비의 꿈` `비오는 날` `우화의 강`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들이다. 평범한 일상의 삶. 남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그토록 깊고, 절제되고, 따뜻한 시를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의 눈과 마음을 한껏 부러워했다. 장미꽃 우표가 붙은 그의 편지도 시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하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기념 삽질을 하며 흙을 붓다가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왈칵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아버지 마해송 씨의 동화 모래알고금` `앙그리께`를 밤새워 읽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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