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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천상병
1
부슬부슬 비 내린다.
지붕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도
멀고먼 고향의 소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득한 곳에서
무슨 편지라든가
나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저 하나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향수여 나의 향수여
나는 직접 비에 젖어보고 싶다.
향이란 무엇인가,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본향이여
그곳은 어디란 말이냐?
그건 마음의 마음이 아닐런지--
나는 진짜가 된다.
2
저 구름의 연연한 부피는
온 하늘을 암흑대륙으로 싸았으니
괴묵은 그냥, 비만 내리니 천만다행이다.
지금 장마철이니
저 암흑대륙에 저 만리장성이다.
우뢰소리 또한 있을 만하지 않은가.
우주야말로 신비경이 아니냐?
달과 별은 한낮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비는 그 청신호인지 모르지 않느냐?
3
새벽같이 올라와야 했던
이 약수는
몇월몇일의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산과 옆의 바위는 알 터이나
하늘과 구름은 뻔히 알겠지만
입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약수를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고
맛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니
재수형통만 빌 뿐이다.
4
상식적으로 비는 삼라만상 위에 내린다.
그런데 지붕뿐인 줄 알고
내실의 꽃병은 아니 맞는 줄 안다.
생각해보라
삼라만상은 이 우주의 전부이다.
그러니 그 꽃병도 한참 맞고 있는 것이다.
생리는 그 꽃병을 안 맞게 하지만
실존은 그 꽃병의 진짜 정신을
지붕 위에 있게 하여 비를 맞는 것이다.
5
물의 원소는
수소 두 개와 산소이지만
벌써 중학생 때 익혀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수소와 산소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공포할 만한 야수가 들어 있다.
수소 뒤에는 수소폭탄이
산소 뒤에는 원자폭탄이.
6
나는 국민학교 때는
비가 오기만 하면
학교에 가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천국에 가신 어머니에게
한사코 콩을 볶아달라고 하여
몸이 아프다고 핑계했었다.
이제는 나가겠으나
이미 나이가 사십이니
이 세계를 거꾸로 한들 소용이 없다.
7
팔월 장마비는 늦은뱅이다.
농사에는 알맞아 들 테지마는,
인간에겐 하찮은 쓰레기일 것이니.
먼데 제주도 생각이 불현듯 나니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제주도여
마치 런던 옆에나 있는 것이 아니냐.
애오라지 못 갈 바에야
바닷가로나 가서 먼데까지 가야지
그러면은 그 섬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8
백두산 천지에는
언제나 비가 쏟아진다드냐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산을 쓰셨겠다.
압록강의 원류가 큰소리를 칠 것이니
정암이 소용돌이 쳐
법조차 그 공포에 흐늘흐늘일 것이다.
백운을 읊는 고전시는 있어도
이 산을 읊는 고전시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읊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9
나뭇잎이 후줄근히 비를 맞는다.
둥치도 맞고 과일도 그러하다.
표면이란 표면은 같은 운명이다.
냇물도 맞으니
이건 손자가 할아버지하고 악수하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보고 흐뭇할 수밖에.
숲속 부락은 축제나 마찬가지다.
아낙네들은 내일 일을 미리 장만하고
남편들은 아람드리 술 퍼먹기에 바쁘다.
11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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