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백 - 박장호
지하철에서 스친
20세기의 여자를 기억한다.
이름은 모르고 얼굴만 남은 여자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까
그녀의 얼굴을 지워 주어야 할까
줄 수도 없으면서
‘주다’라는 보조 동사를 붙여 놓고 보니
짓거나 지우거나 의미 없긴 매한가지
그녀의 얼굴을 지워 버리면
지어낸 이름을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본동사를 통일해도
버리기 힘들긴 매한가지.
나는 여드름 터지는 봄의 얼굴로
그녀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지하철의 좌우 좌석에 앉아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목적이 다른 우리의 노선으로 지하철은 달렸다.
노선이 같은 우리의 목적으로 지하철은 달렸다.
노선이 같았기에 목적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지만
목적이 달랐기에 노선의 같음도 중요하지 않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신세기의 내가 20세기의 여자를 기억한다.
라디오에서 들은 음악 같은 여자.
제목을 모르는 음악 같은 여자.
주파수를 맞추느라 중간부터 들은 음악.
광고에 묻혀 끝까지 듣지 못한 음악.
음악을 찾는 밤은 아름다웠지.
하나를 찾기 위해 둘과 셋도 알게 되고
화성과 박자를 지켰기에
밤의 음악들은 정의로웠지.
음악이 여자라면
나는 그녀의 반듯한 이마를 기억한다.
그녀의 높은 콧날과
가을의 열매 같은 입술을 기억한다.
이름을 몰라 자문 구할 수 없는
그녀의 목을 잘라버려도 될까
자문할 수 없어 얼굴이 괴로운
그녀의 목을 잘라 주어도 될까
동사를 거들지 못하는 보조 동사
붙여도 되고 띄어도 되는 보조 동사
목적을 잃은 노선 밖에서
채널을 잃은 주파수가 된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건 아닐는지.
시간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파수가 바뀐다, DJ가 바뀐다.
협찬이 붙은 여자는 면도를 한 뒤
라이방의 호수에 비단 백조를 띄우고,
대머리 신사는 낡은 거울에
좌우로 갈라진 가르마를 비춘다.
험한 세상의 다리마저 무너지던 날
학생들은 연습장에 써 가며
주요 과목의 핵심 내용을
강 건너는 방법인 양 암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