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사랑에 빠져 있다 - 구재기
나무는 사랑에 빠져 있다
태어난 자리, 바로 선 자리 옮길 줄을 모른다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한 눈을 판 적 없다
진흙이건 황토이건
그 한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라
길고 곧은 뿌리를 내리고
나무는 사랑에 빠져 있다
봄물이 풀리기 시작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사랑을 구가할 줄 안다
뿌리로부터 빨아올린 작은 물기 하나로
잎을 피우고, 아름다운 빛깔로 꽃을 피운다
바람결에 몸을 흔들고 새들을 불러
마침내 사랑을 노래한다
가장 눈부신 사랑은 꽃보다도 고운 것
한 알의 열매를 남기고
모든 이파리를 쌀쌀히 뽑아내어
추운 날이 오기 전
태어나고 바로 서 온 자리, 쏠쏠히 흙을 덮는다
흙을 덮어 제 몸의 온기로 뿌리를 적신다
도시 근처 아파트 공사장
이별처럼 어둠에 묻혀질 무렵
화물트럭 위에서 잘린 뿌리를 총총 감은 채
사랑에 빠진 소나무 한 그루
잎잎에 차운 이슬을 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