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를 빌리다 - 임영석
엉덩이가 때로는 손이 될 때가 있다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유리문을 밀고 나갈 때
발은 땅에, 손은 무거운 짐에 묶여 있으니
화장실이나 가서 내밀던 엉덩이를 빌린다
그런데 지난 봄, 매화나무 가지마다
하얀 봉우리를 눈꽃처럼 가득 피어 놓을 때
그때도 엉덩이를 빌려 피웠는지
남쪽으로 뻗은 가지가 더 많은 꽃을 피웠다
아무래도 북쪽의 나뭇가지는 매화나무의
엉덩이였기 때문에 꽃망울을 잡지 않고
봄의 문을 밀고 들어섰던 엉덩이였나 보다
양 손에 꽃망울을 움켜잡았던 매화나무나
짐을 들고 있는 내 모습에서
엉덩이 빌리는 것은 마찬가진데
어찌하여 난 엉덩이에 구린내만 나고
매화나무 엉덩이는 꽃샘추위를 녹여 꽃을 피워내는가
꽃 같은 세상 만들겠다는 매화나무의 굳은 의지가
매화나무 엉덩이에 굳은살이 가득 배겨있으니
앉지도 서지도 않고, 평생 제 고집의 한 자세로
손과 발을 대신하겠다는 엉덩이의 다짐,
왠지 어정쩡한데 그 자세가 편해 보인다
작자미상의 모든 매화도(梅花圖) 손과 발을 쓸 수 없어서
그 시절 엉덩이를 들이 밀었던 그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