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전기수(傳奇叟)의 성공시대 - 양해열
한 파수 그가 다녀갑니다
기미만세 부르듯 팔을 치켜든 메타세쿼이아 나뭇가지
행과 행 사이를 꼼꼼히 훑고 갑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붉갈색 바늘이 땅에 꽂혀
비장한 글자가 될까 봐 안절부절,
오늘부터 마음 누그러뜨리기로 합니다
나무는 쇠침 뽑힌 갑옷을 입은 패잔병처럼
치욕스러워 잠시 푸르르 떨기만 할 뿐
겨드랑이 찢어지도록 앞뒤 손을 잡습니다
이열종대의 사열 가운데로
문자의 길이 쇠리쇠리 흐릅니다
몸에 돋은 뾰족한 낱글자 한 획 한 획을 빼내야 하는
저들은 태생이 문사(文士)입니다
칼에 베여 눕지 않아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온몸이 꼿꼿한 글자요 올찬 목간(木簡)입니다
우뚝 서서 따끔한 책 한 권의 배움배움을
길 위에 던질 줄 아는 지장(智將)이지요
어디선가 박수소리 들릴 때 낮달은 항상 거수경례를 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책이 될까 봐 광대가 될까 봐
가슴 졸였던 전설적인 이야기꾼 풍(風)씨도
살아 움직이는 글자를 밟지 않으려 까치발로 건들건들, 글과 길 위에서 실직을 만끽합니다
사대문 밖에는 서당이 생기지 않길 원하던 그는
혼자 터득한 문자를 입에 물고 난장마다 떠돌았지요
영웅담을 읽어주고 벙거지에 떨어지는 동전을 챙기면서 평민의 문맹이 오래오래 지켜지길 바랐지요
또 입담 좋은 입으로 몇 문장 쪽쪽 빨고 있군요
나무가 입안에 가시 돋은 바람을 보드랍게 낭독할 시절이
코, 코앞에 왔는데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