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믿는다 - 김이듬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믿는다
오늘의 뉴스를 믿고
유랑극단을 믿고
노래와 서커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
사랑아, 너는 파리처럼 날아왔다 떠날 것이다
대충 이러다 멈춰줄 걸 믿는다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조용한 골목에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는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지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