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구상나무의 요술장갑 - 정연희
붉은구상나무는 가지마다 눈장갑을 두툼하게 끼고 있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쪽이 뭉툭뭉툭하다
소복이 눈이 덮인 눈 장갑 속으로
끊어진 가지 뼈가 보이고
그 상처에 굳은살이 볼록하게 올라와 아문 것 같았다
상처에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들끓는지
소복이 덮어주는 눈의 온기에 감각이 살아난 듯
김이 오르곤 했다
언젠가 보았던 요술장갑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낄 수 있는 만능장갑입니다
사내는 장갑을 꺼내 지하철 승객들에게 펼쳐 보이더니
손을 쫙 펴서 장갑을 끼었다
검지와 무명지 없는 손가락이 약간 아래로 처졌지만
장갑 다섯 손가락이 상처를 감싸자 멀쩡해졌다
그때도 나는 사내의 끊어진 손가락에
무언가 자라는 걸 보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만능장갑이 아니라 요술장갑이라고 생각했었다
붉은구상나무가 문득 양털 빛 요술장갑을
내게 내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