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궁지에서 기다리다 - 유현숙
소요산 길, 무량하게 뻗은 길의 끄트머리를 잡고 발가락이 짓무르며 걸어요
산길에 핀 노루귀꽃, 꽃꼭지보다 목덜미에 돋은 솜털이 여리고 희어요
오래 들여다봐요
스무 댓 발자국만큼 거리를 두고 우리는 자주 어긋나요
앞섰거나 뒤 선 당신, 나를 기억할까요
아가리에 꼬리를 쳐 문 우로보로스 뱀처럼 우리가 언제 한 처마 밑에 꿰인 적
있든가요
옛 선사들은 불상도 쪼개어 불구덩이에 넣기도 했다지요
보세요, 오늘은 저 궁 다리를 건너와 파계무참조차 자유자재하시지요
허름한 별궁지에 무더기로 핀 들꽃들 자죽자죽 눈물이어요
그 눈물 사무치게 붉어요
지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무도장의 조명이나 또독또독 밟히는 무희의 스텝이나
자재암의 저녁연기만 같은데
그 연기 가슴 끝에 찍어 당신 이름 써요, 뜨겁게 크게 써요
요석(遙昔),
이 어스름도 쪼개어 불구덩이에 넣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