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진 - 원구식
-행자를 위하여
내 꿈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유난히 잘한다.
그저 무심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은 저절로 살아진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훈수하며 타이른다.
신문지 몇 장으로
노숙의 찬 서리를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영혼이 과연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그래, 나도 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단 밥을 먹어야 하고
가정을 무시해야 하며
알량한 직업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도 쓰지 말고
생의 목적도, 연애도, 사랑도, 증오도
피식! 한 방의 코웃음으로 날려보낼
철학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판단력이 흐려져
머리도 감게 되지 않고
매사가 귀찮아지며,
품었던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친구도, 처자도, 부모도
모두 지쳐 떠나고
자잘한 세속의 인연마저 모두 끊어져
마침내 정신이 파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불쌍하도다, 나여!
무일푼이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드러누울 땅 한 평 없으니
마침내 온 우주가 네것이로구나.
내가 끊어버린 세속의 인연들아.
이제야 겨우 아무런 이유없이
인생을 헛되이 써버릴 준비가 되었으니
나를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라.
나는 난봉꾼도, 노름꾼도, 파락호도 아니다.
나는 앵벌이도, 뽕쟁이도, 양아치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는
오늘밤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탕진이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여,
새로운 시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