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 - 고운기
어느 땐들 살라고 했지 죽으라고 했겠는가만
죽자 죽자 해도 버젓이 살아 있고
살자 살자 해도 홀연 죽는 일이 있었다
내 누이 한 분 여고를 졸업하던 해 대학 시험에 붙고도
갈 형편이 못 되어 종일 방구석에서 천정을 바라보다 초
등학교 다니는 날 앉혀놓고 죽는 방법을 읊어대곤 했는데
수면제를 먹되 한 군데선 죽을 만큼 살 수 없으니 읍내
약국을 차례차례 죄다 돌아 모아오면 그날 밤으로 한입에
털어 넣으란다고 그런데 실은 그 말이 내 귀에 전혀 와 닿
지 않았던 것은 수면제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읍내
약국 죄다는커녕 한 군데 가서 살 돈도 그의 호주머니에
는 없었으므로
그보다도 대학 문 한번 밟아보지 않고서는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가슴이 불덩이가 얼굴에 활활 타오르고 있
어서 죽기는 뭘 죽어 갓 스물 발갠 낯빛만 더 이쁘게 하는
것이었다
내 누이 끝내 대학에도 갔고
졸업하던 해 시집갔고
그런데 웬걸 다섯 해 만에 남편 앞세우더니
어린 자식이나 잘 키우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이 악물더니만
갓 마흔에 덜컥 병 걸려 애들 아빠 뒤를 따랐다
부질없기로는 사람의 일이라
죽겠네 죽겠네 그 한마디마저 입에서 나오면 선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나 나나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