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생트, 랭보의 에메랄드빛 하늘 - 고현정
두 개의 압생트 잔과 물병이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막연한 시간
아르튀르 랭보는
푸른빛 도는 술이 가져다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하
늘이라 중얼거린다
압생트 한 잔을 마시는 일은
마취 없이 현실을 수술하는 것
내겐 악마의 술, 향쑥 냄새가 탁자를 뒤흔든다
나는 압생트에 취해 가끔 황홀하게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라는 그림을 밤이면 들여다본다
1910년 파리에서 3,600만 리터의 압생트가 사라졌다
입은 때론 거짓된 기관
파편화된 가난을 변명한다
자기 이야기의 재구성이 흘러다니며
사소한 규칙을 만든다
잠을 박탈당하는 일
때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일
의식의 자각 너머에서 발생하는 해리의 신호가 울린다
그에게 유일하게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것은
값싼, 알코올 도수가 70도에 달해 취기를 빨리
느끼게 해주는 사고뭉치 압생트가 있는
특정한 공간이다 내겐 그러한 특정한 공간이 없다
1910년을 전후해 제조를 금지당하는 압생트
얼어붙은 경계, 랭보의 잔과 나의 잔 사이
모든 것이 납작하게 보이고
모든 것이 차갑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