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모자가 떨어진 날 - 박미산
지금 계신 곳은 따뜻한가요?
우리의 계절은 겨울뿐이었지요
내가 혼자 있는 곳은 여전히 겨울이에요, 너무도 익숙한
오늘은 흑백영화를 한편 돌릴까 해요
이화동 사거리의 카페가 보입니다
키가 큰 남자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갑니다
흔들리는 겨울과 젖은 어깨가 위태롭습니다
줄줄이 흘러내리는 낡은 스크린
초록빛 모자의 불빛이 꺼집니다
여자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터를 옮겨봄이 어떠냐고, 아기도 함께
그대의 말이 푸른 강으로 분분하게 달려갑니다
수면 위에 떠오르는 마음이 파닥거렸어요
여자에게 주인공은 그대가 아닌 엑스트라 아이였지요
아기를 안은 여자는 눈물이 너무 깊어 강을 건너지 못했어요
기다림에 지쳐 취한 그대
푹 꺾인 머리, 긴 다리, 뼈마디 마디,
그대로 초록빛 모자에 흐릅니다
그때 흘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데
영화필름은 자꾸 돌아갑니다, 그대
겨울이 한 칸쯤 남아 있나요?
가슴 한가운데 따뜻한 부장품처럼, 혹은
유품처럼 차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