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포데로사 1992~ - 김태형
불가능한 것을 찾아다녔으니 그런 면에서 나는 리얼리스트다.
― 어느 날, 메모 중에서
1
마른 물로 목을 축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끈적끈적 흘러내리는 악마의 검은 눈물을 태워 쭈욱 길을 긋고
잉크 냄새 채 마르지 않은 지도 위에서 태어난 낯선 짐승
검은 생고무끈으로 허리 굵은 몸통을 질끈 조여 매고 밤길을
나서자 속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몇 개 더 바닥에 달라붙는다
몇 개의 빈 생수통을 싣고
군데군데 살 벗겨진 녹슨 상처를 감춘 채 얼굴을 지워버린
짐승이 흔적도 없이 골목을 빠져나간다
2
그래도 가끔씩 검고 길게 끌린 발자국을 남길 때가 있다
길을 재촉하다가 양쪽 귀에 느닷없이 성난 모래폭풍이 밀려들면
딱딱한 길 위에 둥근 속도가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찢어진다
사막의 도로를 오가던 트럭 운전수들이 야생 낙타를 잡아먹어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미디어가 버젓이 이 메마른 상징을 모래바람 속으로 실어나른다
모래바람이 종일 눈을 감고 제 울음소리를 발바닥 밑으로 구겨넣는다
고통은 노예들이 잃어버린 오랜 기억일 뿐이다
3
나는 그 어디로 가지 않고 다만 어디로든 가고 있다고 지금 나는
진화하는 중이라고
그래도 거친 물을 몇 모금 마시며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나는
어깨뼈 앙상한 잔등 위에 벌거벗은 한 명의 사내를 태운다
발자국 속에 마른 울음소리가 고인다 더 무거워진 길이 길 위에
눌러앉아 뒤에서 또 지워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는 것은 보이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