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암각화 - 최정진
마당에 고인 웅덩이를 어머니가 빗자루로 쓸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사냥한 짐승의 울음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흙은 비에 젖고 동굴의 벽은 빗소리에 젖던 날이 있었습
니다 짐승의 비명을 사랑한 물이 하늘까지 달아나 구름이
되었고, 인간에게 연민을 품은 물이 지상에 돌로 남은 날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빗소리를 주워 남들 몰래 동굴의
벽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빗소리를
숨기다 그만 사냥을 나서려면 아버지들에게 들키고 말았습
니다 내 모습을 기이하다 여긴 아버지들이 돌칼로 겨누고
달려든 순간, 내 몸에 뚫린 굴에도 어떤 형상들이 그려졌
을까요 돌칼의 하염없이 날카로운 딱딱함에 내 몸에서도
자꾸만 빗소리가 새나왔습니다
비가 오면 아버지들은 동굴 밖의 빗줄기를 보며 돌칼의
날이 아직 무디다하고, 어머니들은 그런 아버지들의 어
깨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던 날이 있었습니다
쓸어내도 마당의 웅덩이는 내가 쓰러졌던 자세로 고입
니다 저 웅덩이들의 나열이 비 오는 날에서 비 오는 날
로만 이어지는, 비의 연표임을 알겠습니다 지상에 웅크
리고 울음마저 썩어가는 내 육신 앞에 앉은 어머니 하나
멍한 눈빛을 하늘에다 쏟아 붓고 있었나요 피부에 갇힌
구름이 되어 자신의 몸에 빗살무늬를 새기고 있었나요
나는 한 없이 깊은 동굴입니다 인간들이 옷으로 꿰어
입기도 하고 말려뒀다 먹기도 하는, 사냥 당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