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 박희진
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우리도 자라면 처음의 자리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어요.
내 어린 수정의 눈동자가 맑기만 해서
뭇 형상이 그 안에 도사릴 티가 없었을 때
또 이 손이 고사리처럼 귀여웠을 땐.
시간은 없었지요. 연지빛 노을 속을
뜨는 해, 지는 해가 낮과 밤을 번갈아 불러
들였을 따름. 울긋불긋한 세상은 언제나
조금은 무서웠고 조금은 덩달아 즐거웠지요.
그런데 나의 잔뼈가 굵어진 먼 여로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보았어요 산천은 어이없이
바뀌었다는 것을. 내 거기 벗들과 멍석딸기를
따기도 하고 뛰놀던 숲이 겨우 다복솔 몇 그루
뿐인 것을. 또 사철 가슴의 높이까지 흐르던
냇물의 신비는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나서 송사리
한 마리 없다는 것을. 내 기억 속에 그 빛바랜
이름만 남겨 놓고 지금은 그림자도 없는 벗들.
나는 알았지요 우리도 이젠 떨어졌다는 것을,
가없는 사막 위에 촉각을 잃은 개아미처럼
헤매는 우리, 이제 다시는 그 천상의 보석 방석 같은
처음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동안 함부로 눈물을 탕진해서 흐려진 눈동자와
그동안 지은 죄로 더럽힌 이 손을 가지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