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부분 - 구석본 (1949~ )
공허로 가득한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간다
공허 안에서 누군가의 하느님처럼 말한다
문이 닫힙니다, 그러자 문이 닫힌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공허 속에 담긴다
몸 없는 누군가가 말한다
올라갑니다, 스르르 올라간다
공허의 말씀은 이제 계율처럼 엘리베이터에 새겨진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오롯이 물처럼 고여 있어요
당신이 찾는 집도 공허로 가득한 세상일 뿐이죠
이십 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얼굴 없는 소리를 ‘공허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만이 아니다. 얼굴 없는 공허한 목소리는 도시 곳곳에서 들린다. 버스에서 듣는다. 지하철(역)에서 듣는다. ‘이번 역은 정부과천청사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오이도행 열차가 전역을 출발했습니다’-. 공허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공허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른다. 공허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절대적으로 따르니 공허한 말씀이 ‘하느님의 계율’에 비견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공허의 말씀이다? 하느님은 공허하시다? 얼굴 없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공허하시다? <박찬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