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있다 - 정숙자
비오는 날 산책로에선 발부리에 눈을 두고 걸어야 한다
모처럼 나온 지렁이들이 허리를 고르고 있다
어디서 운명 바뀌었을까
줄기줄기 부풀고 멍든 보라빛
내디딜 발이 없는 그들은 평생을 기어도 깃털 한 잎 움트지 않는 이 세상 토씨들이다
들판에서 난바다에서 빌딩 숲 틈서리에서 꺾이고 으깨진 그들
그 아픈 세월 속에선 목숨보다도 질긴 슬픔이 멀리멀리 자라곤 했다
지금도 내 우산 뒤에서 몇몇 밟힌 몸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만
한마디 비명도 없이 별로 뜬 토씨들이 대사원(大寺院)을 이룬 밤하늘
내가 버린 자획과 종잇장들은 어느 곳으로 돌아갔을까
먼 길 둘러온 빗방울들이 꽃 한 송이씩 놓고 흐른다
정숙자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천년의 시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