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 정영선
눈물 빠지게 불린 콩알들
뚫린 시루에 주르르 붓고
검은 보자기 덮는다
콩알 자존심 상한다
자라목처럼 안주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슬픈 습관을 두드려 부수느라
퍼부어지는 물줄기 돌풍, 돌풍
세상 밖에서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콩알 속
허물어져야 할 일
허물어지는 일만 남는다
저리 깐깐한 침묵을 버틴
콩 껍질을 후딱 날리는 모자처럼 들고
검은 보자기 씌운 막막함을 대못같이 밀어올리고
사랑은 눈부시게 노오란 해를 한 덩이씩 이고 나올 날
그대 속에도 잠재해 있을 저 힘
기다리느라 나는 질겨지고 있다
정영선 시집"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랜덤하우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