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 이기철
오늘도 나는 산새만큼 많은 말을 써버렸다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물소리만큼 많은 목청을 놓쳐버렸다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씻고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며 본
너무 많은 꽃을 매단 아카시아나무의 아랫도리가 허전해 보인다
그 아래, 땅 가까이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한 나팔꽃이 묵묵히 울타리를 기어 올라간다
말하지 않는 것들의 붉고 푸른 고요
상처를 이기려면 더 아파야 한다
허전해서 바라보니 내가 놓친 말들이, 꽃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못이 되어 내게로 날아온다
아, 나는 내일도 산새만큼 많은 말을 놓칠 것이다
누가 나더러 텅 빈 메아리같이 말을 놓치는 시간을 만들어놓았나
이기철 시집"가장 따뜻한 책"[민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