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 유종인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들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유종인 시집"교우록"[문학과 지성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