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은 자라서 저녁이 되고 - 박남희
그늘은 꽃을 지나는 동안 꽃그늘이 된다
그늘은 꽃의 향기나 꽃의 아름다움보다
꽃의 몸짓에 민감하다
한떼의 그늘이 꽃을 지나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이 땅의 햇빛 속에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수한 그늘들,
그들은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
꿈틀거림 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울음이 되고, 생각이 되고, 바람이 된다
햇빛이 그늘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제 속의 어둠을 털어낸다
그늘 하나의 행복을 붙잡고
민들레 하나 기울어진다
민들레는
어디론가 날려보내야 할 것들을
미처 날려보내지 못하고
바람이 웅성거리는 산등성이 너머로
제 키 만큼 자라있던 울음을 숨긴다
그렇게 산은 자라서
밤마다 숲 속에 꽃을 피우고
햇빛 속에 숨겨져 있던 그늘은 자라서
제 몸뚱이만한 크기의 저녁이 된다
그늘은 천천히 저녁의 이름으로
숲 속의 꽃들을 하늘 위로 밀어올린다
비로소 저녁 하늘이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