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1948~ )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 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질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님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랑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된 산골 마을 뒷산에 서서 비를 다 맞는 느티나무에게
나는 고개 숙이리
인간이 자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을 지배했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먼저 회복되어야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