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3. 풀과 목숨
3-1. 싹과 사이
'싹수가 노랗다'고 한다. 처음에 나오던 싹이 노오랗게 메말리다 이상 자라지 못하므로 기대한 결과가 없음을 드러낸 표헌이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이르고 있다. 입버릇처럼 사람들은 '싹 쏠어 버려' 혹은 '싹쏠이'라고한다. 참으로 무서운 정서를 일으키는 말이다. 씨앗으로부터 이제 갓 나온 싹을 쏠어 없앤다면 엄청난 가능성을 모두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씨앗에서 처음 움터 나오는 어린 잎이나 줄기를 '싹'이라고 한다. 새싹은 어린이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린이가 지닌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까닭이다. 원형적 인 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싹은 사이를 뜻하는 중세어 '삿/슷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어떤 판계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상호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이에 따라 삶의 조건들을 하나씩 풀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부분의 가치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값매기기가 이루어지듯이, 자잘한 삶의 조건들도 혼자가 아닌 서로의 걸림틀 가운데에서 그 지위가 튼튼히 자리를 잡는다. 짐승의 새끼들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태어나며 자라난다. 좀더 미시적으로 자라나는 정황을 보면,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솟아 나와 개체를 드러낸다. 식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이 되어 싹이 트는 걸 보면 잎 사이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고, 뿌리와 뿌리사이에서 새싹이 나온다.
형태의 특징을 보면 '삿'은 기역(ㄱ)특수곡용을 한다. 기역 (ㄱ)곡용 어미가 아예 본래 말에 달라붙어 하나의 꼴로 되면서 꼴바썹이 일어나 싹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과정은 '삿(ㄱ>사>삯>쌍>싹'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삿(?)' 에 접미사 '-이'가 붙으면 새끼가 된다[삿(ㄱ)+-이>삿기>사끼>새 끼>새끼. 오늘에 와서는 식물의 새끼는 '싹'이 되고, 동믈의 싹은 새 끼'로만 드러나게 되었으나 그 말 겨레의 뿌리는 하나라고:하겠다. 형태들이 분화하는 가장 보꾄적인 틀은, 모음이 바뀌거나 음절머리 또는 끝에서 자음이 바뀌거나 점미사가 더 붙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모음교체의 경우는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이 대립하는 수가 제일 많고 여기에 증성모음의 계열로까지 발전하는 일이 있는데, 한마디로 간추려 '양성-음성-중성' 형은 가장 체계적인 분화의 틀이라고 하겠다.
먼저 '삿. 샅'을 중심으로 한 분화형태의 말 겨레를 보면, '손삿, 삿갓(대오리나 갈대로 엮어 만든 갓으로서 그 사이에 들어가 볕이나 비를 피한다), 삿갓가마(초상 중에 상제가 타는 가마), 삿갓구름, 삿갓나물, 삿갓반자(천장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른 반자), 삿기낫(오정이 채 안된 낮), 삿쟁이 (새끼), 삿춤(돌이나 벽돌을 쌓을 때 돌과 돌 사이에 양회나 흙을 바르는 일), 삿갓연(내부의 지봉 밑에 천장 없이 보이게 한 서까래)'과 같은 말들이 있음을알 수 있다. 보통 일을 해 주고 그 대가로 받는 몫을 '삯'이라고 한다. 이 말도 '삿(ㄱ)'에서 갈라져 나온 말로, '파>삯'과 같이 받침자음의 앞뒤가 바젼 형태이다. 일한 사람이 일을 시킨 사람에게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니 노동가치를 이루어 낸 셈이 된다. 일을 했기때문에, 어떤 물건을 빌려 주었기 때문에 노동과 시설이 새끼를 쳐서 벌어 들인 싹이라고 생각해 봄직하다. 이와 관계있는 말로는 '삯꾼(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 산돈(삯으로 받는 돈), 삯말[세를 주고 빌려 쓰는 말(馬)=, 삯메기 (먹지 않고 품삯만 받고 하는 농삿일), 삯방아(삯을 받고 찧어 주는 방아), 삯일(삯을 받고 하는 일),삯전 (삯돈), 삯팔이(삯을 받고 막일을 하는 품팔이)'와 같은 낱말들이 있다. 곁들여서 플이할 것은 '샅'의 경우다. '삿'은 말음법칙과 같은 소리의식 때문에 '섣'으로도 표기되는데, '삼>샅'과 같이 음절말 자음이 유기음화한 결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말 겨레에는 '샅(두 다리가 갈린 사이), 샅바, 샅걸이 (씨름에서 오른발을 상대방의 다리 사이에 넣고 왼다리를 뒤로 뻗치는 것), 샅샅이 (빈틈없이 모조리, 사이사이마다), 샅폭(바지 따위의 샅에 대는 좁다란 헝겊), 사타구니 (샅十아구니>사타구니)'와 같은 말들이 있다.
'싹'은 '삿'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말 겨레에는'싹눈, 싹독(연한 물건을 토막쳐 자르는 모양), 싹수(앞길이 트일 징조), 싹트다'의 형태가 있고, '새끼'와 관련이 있는 말로는 '세끼발가락, 새끼가락(새끼발가락과 새끼손가락의 통칭), 새끼똥구멍(항문 위의 조금 옴폭 들어간 부분), 새끼발돕, 새끼집 (짐승의 자궁), 새끼 치다'와 같은 말이 있다. 짚으로 꼬아 놓은 줄을 새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새끼는 두 줄의 짚을 꼬아 만든다는 데 그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 결국은 두 개의 끈을 꼬아 하나의 또 다른 끈을 만드는 생산성을 바탕으로 하여 '싹-새끼' 로 이어지는 공통의 속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삿'의 분화형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음이 바뀌거나 자음이 바뀌는 음절구조의 변동을 따라서 말들의 떼를 거느려 가게 된다. 우선 모음이 바뀐 경우 '삿/섯'의 보기를 살피기로 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사물이 뒤섞여 있는 것을 네 갈리다'라고 한다. '섞-' 은 '삿>파>삽>싹'의 '삯'과 대립되는 형태로 보인다. 모음의 음상(붐理)이란 관점에서 보면 '싹'은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밝은 상태이며, '섞'은 사이사이에 끼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소리의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물건에 다른 물건을 넣어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작을 '섞다'라고 하는바, 기실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사이를 뜻하는 네-' 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동사라고 볼 수 있다. 네-'과 상관을 보이는 말의 겨레를 들어 보면, '섞갈리다, 섞다, 섞바꾸다(먼저 것과 다른 것으로 바꿈), 섞 박지 (절인 배추나 무우, 오이를 넓적하게 썰고 고명에 젓국을 넣어 한데 버무린 김치), 섞사귀다(환경이 다른 사람끼리 서로 사귀다), 섞이다, 섞 임월 [混文]'과 같은 말의 떼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섯/섣/설'과 같이 '섯'은 자음이 바뀌면서 또 다른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 '섣'과 걸림을 보이는 말에는 '섣달, 섣달받이(섣달 초순경 함경도 앞바다로 몰려드는 명태의 떼), 섣부르다(솜씨가 어설프고 설다)' 등의 말이 있다. 굳이 년 달'을 풀어 보면, '한해의 마지막과 또 다른 새해가 시작하는 가운데에 끼이는 달'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삿/섯'은 사이 공간이나 사이에 끼이는 시간의 의 미자질로 간추릴 수 있다. '설 (초두해), 8-24)' 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새해의 첫 머리' 로, 묵은해와 새해 사이의 경계선 구실을 한다. 그래서인지 중세어 자료를 보면 델'은 년령((초두해), 8-24)' 을 뜻하기도 하였다. 현대국어로 오면서 살과 설은 별개의 형태로 나뉘어 쓰이게 되었다.
그럼 피부를 뜻하는 '살' 은 어떻게 볼 것인가. 피부와 뼈 사이에 있는 근육조직 모두를 통틀어 '살'이라고 한다 이는 '삿'의 분화형태로서 두 물체 사이에 생겨난 생성물을 뜻하는 낱말의 겨레라고 판단된다. '삿/섯'계와 합께 모음이 바뀌어 사이를 뜻하는 말의 계열로는, 중성모음으로 바뀌어 쓰이는 '슷(숯)/숟/슬/(숯)' 계의 말 겨레가 있다. '슷'계에는 '슷다({(가례해), 1-25), 슷봇다(셋어 흠치다 ;(석보), 11-25), 슷이다(시끄럽다 ; {(월석), 7-19), 숫이다(시끄럽다 ;(삼강)열 14)' 등이 있고, '슬`계로는 '슬다(알을 낳다 ; ((한청,, 446d), 쏠다(송강,, 1-9)' 등이 있다. '숫'계에 드는 형태로는 '숫다(씻다 ; ((중두해,, 5-22), 숫돌({(동문,, 상 48), 숫등걸 ((유씨명), 5火), 숫불(((동문,, 상 63), 숯((계축)' 과 같은 낱말겨레가 보인다.
'슬'과 관련하여 발달한 말에 ㅅ다((용가, 91), 슬프다((초두해:,8-21)'가 있다. 유추하건대, '싫어함'은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서로 꺼려하는 일이요, '슬퍼함`은 싫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슷(숯)'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선 숯은 나무를 불에 태우되 완전하게 재간 된 것이 아닌 중간 상태의 가연물질이란 특성을 갖는다. 숯은 '숫' 에서 파찰음화하여 발달한 형태로 보면 되고, '숫~숯'으로 넘나들며 쓰이다가 뒤로 오면서 '숯'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숫(숯)'은 방언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숙껑 (경북 영천), 수깡(경북 문경), 수꿍(경북 울진 대구), 숫겅 (경북 영천 포항. 영덕. 의성. 안동. 영주), 숫기(함경도 일원), 쑥(평북 영변. 희천. 정주. 선천. 강계. 자성. 후창/전북 순창)'과 같은 변이형들이 있다. 이들은 '숫'이 '삿(ㄱ)'과 마찬가지로 기역(ㄱ)곡용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형태들이다 '숫'이 '삿(ㄱ)' 과 같은 뜻으로 발달하여 오늘날에는 접두사로 쓰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예 컨대, '숫총각, 숫색시 (남자와의 교접이 없는 여자), 숫접다(순박한 모양-새싹과 같이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숫하다(순박하다)'와 같은 말의 겨레가 있다. '숫' 은 '술'계의 말로도 발달하여 쓰이는데, 음절말의 받침이 흘림소리 리을 (ㄹ)로 바뀌어서 가지덛음을 한 것이다. '술'계에 드는 형태로서는 '술술(물. 가루 등이 잇대어 새거나 흘러 나오는 모양), 술(장식용 실/숟가락 ; (증두해,, 6-2), 술렁거리다 (시끄럽다)'와 같은 꼴이 있다. 음상으로 보아 '술'계는 흐르는 모양을 상징하였으며, '숟가락'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음식 사이에 꽂아 먹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음이 바뀌어 발달한 '삿'계의 또 다른 한 계열은 '실'계의 낱말 겨레로 보인다. 그러니까 '슷>싯/싣/실'과 같이 전설모음으로 되면서 형태가 갈라져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실례를 풀이할 수 있는 것은, '싯/실'의 낱말겨레라고 할 수 있다 '싯-' 계로서는 싯다(능엄 9-9), 씻다<동문> 하 55), 씻기다, 씻부시다(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이 하다), 씻김굿' 등이 있고..실_'계로는 실고추, 실구름, 실꾸리, 실국수/질경이, 질기다, 질금거리다' 등의 형태가 있다. '질-'계를 '실' 과 관계지은 것은 파찰음화에 따라서 발달한 '실'의 의미자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앞에서는 모음이나 자음이 바뀌어 이루어진 형태들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이제 음운이 덧붙어 만들어지는 형태들을 간추려 살펴보면 '삿'계의 변이형에 접미사 '-다, 이'가 붙어 이루어지는 것들이 증심을 이룬다. '-다'에 대하여는 '섞다. 싯다. 슷다'와 같은 예들을 보았으므로 줄인다. '-이'계의 낱말에는 '사이'. 서로.서리' 등이 있다. 사이는 '삿十-이>사이~새'로 쓰였으니, 공간이든 시간이든 틈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서로'는 '설 十-오>서로'와같이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걸리는 사물들의 관계가 복잡하듯이 '사이'를 드러내는 '삿/섯'의 말겨레들은 폭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우리들의 인식이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그 값이 결정되기 때 문에, 이를 되비추는 말의 갈래가 여러 모양으로 펴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2 풀과 목숨
'풀베기 싫어하는 놈이 단 수만 센다' 고 한다. 베라는 풀은 베지 않고 얼마 베지도 않은 풀단의 수만을 헤아림을 이른다. 하는 일에 싫증이 나서 해 놓은 일의 성파만 만지작거리면서 빈등거림을 꼬집는 말이다. 초본과의 식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혼히 '풀'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살아 있는 생물은 물과 함께 풀이나 나무와 같은 녹색식물이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삶을 누릴 수 있다. 물과 풀, 그리고 불(태양)이 있을 때, 비로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잣으로, 자연을 어떤 방법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언어사고의 장(場)이 달라진 다. 이는 다시 음성부호인 소리의 체계로 되비치어, 그 형식들은 형식들 나름으로 굴절하여 혹은 사라져 가기도 하며 혹은 되살아나기도 하며, 흑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풀의 경우, 우리 배 달겨레에게는 어떤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형식으로 투영되어 분화. 발달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자연물에 대한 인식은 그 모양이나 성질, 크기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있고, 빛깔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특히 빛깔로써 대상을 가리는 것은 시각상의 효과로 보아 가장 두드러진 인식의 실용가치를 더하여 준다 이른바 모든 감각은 시각적인 전이가 아주 자연스레 일어난다. 물과 불이 없는 세상이란 생명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요컨대 물과 불은 삶을 이어가는 가장 윈초적인 요소이며, 그 색깔은 자연물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됨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불(태양)은 빛의 원천이니 빛나는 모습에 관계없이 태양은 위대한 가능성이요, 희망이다. 우리는 '푸른 바다' 라고 하여 푸른색으로써 물을 알아차린다. 그럼 물과 풀의 푸르름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풀의 빛은 불의 빛으로 보이는 금빛의 주황, 그리고 물의 푸른색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자연의 위대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생명의 색깔이라고 하겠다 땅 속에 뿌리를 내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빨아들인 영양을 태양열로 광합성작용을 일으켜 사는 것이 식물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시험 삼아 필자는 색의 배합과정을 살펴 본 일이 있다. 블의 색으로 보이는 주황과 물의 푸른색을 섞어 보았더니 초목의 푸른색이 됨을 확인하였다. 자연현상 가운데에서 벚의 갈래, 즉 빛깔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가 아닌가 싶다. 태양이 없는 믈체의 빛깔은 검은색이다. 어두운 밤에 바라다 보이는 바다의 빛깔은 바로 이러한 방증이 될 수 있다. 솟아 오르는 밝은 태양이 있으매 무지개 및깔의 자연계는 더욱 멎나 제 모습을 드러내 살이 숨쉬게 된다. '빛칼' 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빛의 갈래'란 뜻인바, 그 빛이 서로 다름으로써 밝고 어두운 공간과 대상을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초목의 푸른 빛깔은 생명의 원천 같은 것이어서 물과 더불어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먹거리로서의 풀의 의미를 더하여 준다. 식물이 없이 동물은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먹이의 사슬에서도 풀이되는 바와 같이 그 비롯됨은 푸른 녹색식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리의 상징체계로 본 '플'의 푸르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어사적으로 보아 유기음 피읖(ㅍ)은 푸기음 미음(ㅁ)과 비읍(ㅂ)보다 뒤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물과 불의 빛깔이 먼저 언어에 투영되고 그 뒤에 '풀'의 빛깔이 인식됨으로써 '물/불/풀'의 자음체계에 맞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풀' 은 증세어에 '플(월석), 9-23)' 로 나타나며 그 변이형에 '풋(중두해 17-57)' 이 보이기도 한다 '플'에서 모음이 바뀌거나 접미어가 붙어 다양한 낱말의 겨레를 이룬다. 이를테면 '푸르-/퍼떻-/파랗-' 이 그러한 분화유형에 드는 형태들이다. '퍼 렇-'에 드는 말로서는, 퍼렇다, 퍼렁, 퍼렁이, 퍼르스름하다, 퍼르죽죽하다, 퍼릇퍼릇' 등이 있고 '푸르-'계에 드는 말로는, '푸르다, 푸렁(푸른 물감이나 및깔), 푸르대콩(열매의 껍질과 속살이 다 푸른 콩), 푸르디푸르다, 푸르락누르락, 푸르무레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퉁퉁하다, 푸른곰광이, 푸릇푸릇'과 같은 낱말의 겨레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풀'은 그 받침이 바뀌거나 탈락하여 일정한 말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풋-/푸-' 따위가 그것으로, 주로 접두사로 쓰이는 일이 많다. 예컨대 '푸새, 푸서리 (잡풀이 무성한 땅), 푸성=, 푸대접 (~고기대접)/풋나기 (-이제 갓 돋은 풀에 비유한 말), 풋감, 풋걸음, 풋머리 (햇것이나 맏물이 나오는 무렵), 풋바심 (채 익기 전의 벼나 보리를 떠는 것), 풋밤, 풋술(맛도 모르고 마시는 술), 풋윷(서투른 윷 솜씨), 풋잠, 풋장(잡목의 가지를 푸른 채로 말린 것). 풋콩' 등과 같은 형태가 있다. 옷에 풀을 먹인다고 할 때, 혹은 '풀 먹은 개 나무라듯 한다`고 할 때의 '풀'과, 앞에서 풀이한 초목으로서의 '풀'과는 어떠한 유연성'이 있을까. 둘 다 먹이의 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질의 구성요소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푸른 풀이 물과 불(태양)의 빛이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옷에 입히는 풀은 밀가루 등에 물을 타서 불에 끓여서 만드는 것으도 서로 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보인다. 이렇게 '액체에 다른 액체나 가루 같은 것'을 타는 것을 '풀다' 라고 하는데, 이 말도 원한을 씻어 없애듯이 응어리진 것 또는 얻고자 하는 정도의 감으로 다시 만들어 내는 '만들어 냄'의 특징을 보인다. 풀이 있으므로 다른 생명들이 식량과 같은 삶의 중요한 문제를 헤결하여 살아가므로 그러한 풀의 생산성을 중심으로 풀의 뜻을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물과 불과 풀을 소리 상징으로 보면, 물이 가장 부드럽고 불은 두 입술이 닿았다가 터지는 파열의 느낌을 환기한다. 한편 풀은 완전한 유기성 히웅 (ㅎ)이 첨가되어 있는 거센소리의 상징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답고 그윽한 꽃내음을 바람에 날리는 풀꽃의 일생을 생각해 보라. 울긋불긋한 여러 빛깔의 씨 앗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어 푸른 빛의 삶이 하늘과 땅 사이에 너울댄다. 그 고운 꽃은 타오르는 불처럼 피어나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씨앗의 상태로 돌아가 흙에 묻힌다. 물과 불은 어울려 푸른 산과 들에 엄청난` 목숨살이를.길러내고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현상의 연금술을 꽃피운다. 때로는 풀꽃으로, 목련으로, 호랑이로, 양으로, 사람으로의 죽살이를 빚어 내어 이른바 삶과 죽음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그것은 무지개의 빛을 모두 어울리게 흐트러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아마 횐색으로 보일 것이다. 빛을 모두 어우르면 희게 보이니까. 살아 있음도 죽어 있음도, 물과 불을 다스리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이루어지나니,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태양(빛)의 밝음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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