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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03 호
단기 4340. 6. 24 (음력 5.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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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시와정신 신인상 작품 모집
21세기의 새로운 시정신과 열린 시세계를 일구어 가기 위해서 창간된『시와정신』이 다음과 같이 신인 작품을 모집합니다.
미래의 한국 문학을 짐지고 나아갈 패기 있고 야심찬신인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기대합니다.
분 야 |
시 10편이상, 비평 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
마 감 |
상반기 1월 20일 하반기 7월 20일 |
발 표 |
『시와정신』봄호와 가을호 |
심 사 |
본지 편집위원 및 권위 있는 시인과 평론가를 위촉하고 심사위원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 |
시 상 |
고료와 상패를 드리며 작품활동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함 |
응모요령 |
봉투에 '시와정신 신인 작품 응모작'이라 쓰고 원고 뒤에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밝힐 것 |
보 낼 곳 |
300-150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33-15 광진빌딩 3층 303호 시와정신사 TEL : 042)629-7523, 042)254-9668 , FAX : 042)629-7523 E-mail : siwajeongsin@hanmail.net Homepage : www.siwajeongsi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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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모욕을 주는 사람은 모래 위에 글을 쓰는 것 같지만, 그 모욕을 받은 사람에게는 청동에 끌로 판 것처럼 새겨진다. / 조반니 과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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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주어라, 또 주어라
너희들은 항상 버릇처럼 말하기를 '일가친척 중에 한 사람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고 개탄하였다. 더러는 험난한 물길 같다느니, 꼬불꼬불 길고 긴 험악한 길을 살아간다느니 하며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말투로 큰 병이다. 너희들은 아픈 데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돌봐 주게 마련이었다. 날마다 어떠냐는 안부를 전해 오고, 안아서 부지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약을 먹여 주고 양식까지 대주는 사람도 있어서 이런 일에 익숙해진 너희들이라 항상 은혜를 베풀어주기만 바라고 있으니 이는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도움만을 받으면서 살라는 법은 애초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남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절로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화평스러워져 하늘을 저주한다거나 사람을 원망하는 그런 병폐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여러 날 밥을 끓이지 못하고 있는 집이 있을 텐데 너희는 쌀이라도 퍼다가 추운 집에는 장작개비라도 나누어 따뜻하게 해주고, 병들어 약 먹어야 할 사람들에겐 한 푼의 돈이라고 쪼개서 약을 지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있는 집에는 때때로 찾아가 무릎 꿇고 모시어 따뜻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공경하여야 하고, 근심 걱정에 싸여 있는 집에 가서는 연민의 눈빛으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며 잘 처리할 방법을 함께 의논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일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집에서 너희들이 위급할 때 깜짝 놀라 허겁지겁 쫓아올 것이며, 너희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달려올 것을 바라겠느냐?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오기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평상시 일이 없을 때라도 항상 공손하고 화목하며 조심하고 자기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 일에 조심하고 자기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쓸 것이지 마음속에 보답 받을 생각은 갖지 않도록 하여라. 뒷날 너희가 근심 걱정할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답해 주지 않더라도 부디 원한을 품지 말 일이다. 비록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렇게 저렇게 해주었는데 저들은 그렇지 않구나!' 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뱉지 말아야 된다. 만약 그러한 말이 한 번이라도 입밖에 나오게 되면 지난날 쌓아 놓은 공덕은 하루 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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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2. 반주자학
양명학
2. 양명학의 수용과 배척
조선에서 양명학에 최초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로는 남언경과 이요를 들 수 있다. 남언경과 이요는 양명학을 좋아하였고, 또 그들의 이런 사정이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을 최초의 양명학자로 취급하는 것은 "선조실록"에 의거한다. 거기에는 선조와 이요, 선조와 유성룡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대화에서 보면 이요는 양명학의 장점을 고하였고, 선조는 양명학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유성룡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또한 그 문집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 장유와 최명길이 있다. 장유는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이며,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학문 풍토가 지닌 폐쇄성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학술은 다양하여 정학도 있고 선학도 있고 단학도 있으며, 정주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왕을 배우는 자도 있어서 문경이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유식 무식을 막론하고 산통을 끼고 독서하는 자는 모두 정주를 칭송하여 다른 학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나라의 학문 풍토가 중국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중국에는 학자가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학자가 없다." 그런 이유로 장유는 주희를 비판하고 오히려 양명학을 좋아하였다. 그는 문집 속의 '지리자자찬'이라는 글에서 수려한 문체로 은근히 즉물궁리의 지리성을 지적하여 주자학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신독잠'에서는 계구, 신독, 치중화를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곧 양명학적 입장에 수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유와 동시대인으로 최명길도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문헌에 자세한 것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그의 문집에서 그가 양명학을 독신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이 당시 시대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의 손자인 최석정은 그 조부가 양명학파가 아님을 역변하였고, 그의 가학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는 사람으로서 양명 좌파의 사상을 수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허균이다. 그는 왕수인과 양명 좌파의 하심은, 이지 및 공안파의 신문예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과 통하는 점이 매우 많았다. 이상에서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들을 살펴보았다. 양명학에 관한 서적들은 중국에서 발행된 시기와 큰 시차 없이 비교적 빨리 조선에 유입되었지만, 양명학을 신봉한 학자들이 나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학자들이 양명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배경으로는 우선 두 가지를 둘 수 있다. 첫째, 왜란에 대한 원군으로 온 명나라 사람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접촉할 기회가 많았으며, 이 당시 명에서는 이미 양명학이 풍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에서 온 일부 장수들이 양명학을 권장했으며, 이것이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할 것이다. 둘째, 참담했던 전란을 겪으면서 학자들 중에 주자학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현실을 재인식하려는 태도가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주자학에 대한 회의 또는 비판이 곧 양명학으로 전향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후의 사상사에 나타나는 것처럼 몇 가지 주자학 비판의 갈래를 엿볼 수 있다. 양명학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흐름 가운데 하나로 나왔다고 하겠다. 주자학이 풍미하던 조선에서 양명학은 일반적으로 배척되었지만, 이론적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배척한 사람은 이황과 그 문하생들인 조목, 유성룡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한 이황은 일찍이 '전습록변'을 지어 양명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이 글의 초점은 왕수인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 우선 본심만을 중시하고 사물의 이치를 무시하는 심즉리설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주관주의에 빠져서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수인이 지행합일을 주장하면서 미인이라고 판단하는 인식과 미인을 좋아하는 행위가 분리될 수 없다고 설명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황은 이에 대해 왕수인이 감각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황이 비판의 대상으로 인용한 문장들은 "전습록" 초두의 몇 조에 불과하여 그가 왕수인의 글을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논리도 왕수인의 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은 이후로 양명학의 배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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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답습
본뜻 : 먼저 사람이 밟고 간 길을 그대로 따라 밟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전부터 내려온 정책이나 방식이나 수법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오늘날 전기 작가들은 옛날에 쓰던 천편일률적인 일대기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서술 형식을 개발하고 있다. -버려야 할 낡은 습관을 답습하는 것과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원군
본뜻 :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 중에서 임금을 세우는데,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봉하던 작위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국태공이라고 한다.
바뀐 뜻:임금의 아버지에게 내리던 작위였으나 역대 대원군 중에서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너무나 유명해서 대원군이라는 보통명사가 마치 흥선 대원군 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잘못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을 가리킬 때는 반드시 '흥선 대원군'이라 써야 한다.
"보기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라는 말은 엄밀히 얘기하면 틀린 말이야 적통이 아닌 손에서 임금이 나왔을 때 그 아버지에게 내리는 작위인 대원군 칭호를 받은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거든 -조선 시대 대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들라면 역시 흥선 대원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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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영원한 유랑 민족의 초상 - 집시
불가촉의 천민, 집시의 수난사
고대부터 모든 사회는 특정 분파를 일탈 집단으로 규정하여 통제하고 배척해 왔다. 예를 들어 살인자, 창녀, 정신 이상자, 노예 등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대개의 경우 이 일탈 집단들은 우발적 사건이나 사회의 신분 질서에 의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집시는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공식적 배척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 문명인들은 낯선 떠돌이 집단인 집시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품었고, 그런 편견은 숱한 법제적인 박해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지금 집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집시가 쓴 집시의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의 집시 역사는 서구인들이 제정한 집시 박해 법률의 기록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집시의 여정이 곧 박해와 수난의 과정이었음을 이 사실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집시는 종종 그들의 고유한 기예 때문에 질곡의 삶에 빠져들었다. 특히 금속 제품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집시들은 비잔틴 제국을 거치면서 금속 제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칸 반도에 도달한 후 한동안 그 기술은 생계 유지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집시의 유용성을 인식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집시를 곧 노예화하고자, 14세기 초반 집시들을 고용주의 재산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한다. 그래서 애초에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난 집시 전체의 절반 정도가 향후 5세기 동안 노예 상태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에 붙박혀야 했다. 루마니아의 경우 1855년에 이르러서야 집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 신세를 면한 나머지 집시들이 발칸 반도에서 서부와 북부 유럽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의 삶도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집시가 유럽 본토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 때문이었다.
13세기 후반까지 약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지배하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결국 유럽 사회 전체에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불러왔다. 15세기경 집시들이 유럽 서부 지역에 도달하자, 유럽인들은 집시를 이슬람 세력으로 한동안 오해한다. 집시는 이집트인(Egyptian) 이외에도 터키인(Turks), 타타르인(Tartars) 등으로 불렸던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유럽인들에게는 이슬람 공포를 유발할 만한 외모를 지닌 집시들은 그래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집시가 이슬람 세력의 침략 때문에 고향을 잃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시가 박해를 받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낯선 풍습과 속성을 지닌 집시들이 대거 밀어닥치는 일은 기존 체제에는 위험이 아닐 수 없었고,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발칸반도를 떠나 유럽 본토에 도착한 집시들은 수세기 동안 차별과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집시가 불가촉 천민, 즉 천민 증의 천민이었다. 실은 많은 경우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존재였고 때로는 돼지 한 마리 값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8세기 프러시아에서는 집시들의 유랑 생활 자체가 불법으로 여겨져 18세가 넘은 집시는 재판없이 교수대에 매달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1499년에서 1783년까지 집시의 의복, 언어, 관습을 금지하는 공식적 법령이 10여 차례 이상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539년 최초의 공식적인 집시 억압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함선인 갤리선의 노를 젓는 소모품 노예로 집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네델란드에서는 집시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각했는데, 169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추방 명령이 내려졌고 그 이후에 발견된 집시에게는 첫 번째는 공개 태형, 두 번째는 낙인, 세번째에는 공개 처형의 처벌을 내렸다. 영국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서의 반집시 법령은 헨리 8세 때부터 제정되었다. 1530년에는, `이집트인 법령(Egyptions Act)`이 제정되어 집시의 영국 이주를 금지했다. 메리3세와 엘리자베스1세에 의해서도 집시는 극형에 처해졌다. 1743년의 한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집시의 모습을 하거나, 이집트인의 모습이나 관습에 따라 방랑하는 자 또 예언하는 자는 모두 부랑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집시가 한곳에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집시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해와 편견은 증오심으로 발전하여 집시들을 끊임없이 도피하게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도 집시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예는 나치의 집시 대학살이다. 약 40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위험 세력으로 몰려 학살되었던 것이다. 집시 희생자의 수는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에 비하면 적지만, 유럽에 거주하던 집시의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 점을 확인하면 얼마나 철저한 집시 사냥이 진행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집시의 대재앙은 정확히 규명되지도 않았으며 현대 대중들에게도 낯선 정보이다.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양심들이 큰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집시는 여전히 큰 위험을 감내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는 집시들의 비극이 더욱 분명하다.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면서 집시는 또 다른 곤경에 처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할 강제적 공권력이 약화되면서 집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되살아난 것이다. 1995년 부활절,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서는 교회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성직자와 지방 관료들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은 집시의 집을 향했고 26채의 집시 가옥에 방화를 자행했다. 체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집시들의 집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몰락 후 수만명의 집시들이 동구 지역을 탈출하여 독일로 피신했으며, 보호 시설에 수용되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듯이 극우 신나치가 설치는 독일은 집시들에게 안정된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집시는 힘없는 소수 집단이기에 그런 사회적 박해와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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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3. 부모로부터 멋진 독립을!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미래지향의 반역아
자녀에 대한 부모의 부정적 사고의 경향은 아이에게 비추어진 부모자신들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일 경우가 많다. 부모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거니? 하고 말할 때, 그 말 뒤에 숨겨진 의미는 나는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다. 남자는 너를 이용하려 하고 있을 뿐이야 라는 말의 진의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자신을 매도한 나의 전철을 밟지 말아라 하는 것이며, 못쓰겠네 에 숨겨진 메시지는 나는 쓸모없는 여자, 그러니까 너도 착실한 여자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학대나 방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성장해서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은 불굴의 정신력의 소유자로 자기의 독자성을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까? 그들은 중요한 성장기에 부모와의 사이에 스스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부모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반향적인 낙오자가 되는 대신에 미래지향의 반역아가 외었던 것이다.
나는 여자의 행복은 결혼에 있다고 듣고 자랐습니다 라고 뉴욕의 어느 여성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느 큰 회사의 간부사원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직업을 가져 가계를 도와달라는 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셨으나, 나는 시간제로 일하면서 내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셨지만, 성공한 지금은 반대로 언니를 본받으라고 동생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런 부모를 둔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달리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확실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부모와는 다른 방향으로 살린 것입니다. 역경을 성공의 힘으로 바꿈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개척했다. 부정적인 메시지에 굴복하여 결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대신, 그 부정적인 메시지에 도전하고 마침내는 극복해 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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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오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중용', '대학'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써 내려갔다.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 김시습이 대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끔틀거립니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여러 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 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소문 없이 잘 길러서 학업이 성취된 뒤에 크게 쓸 예정이었다. 세종이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주면서 네 힘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습이 그 끝자락을 잡아매 그 한끝을 손에 잡고 끌고 나갔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은 천하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3세에 김반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배우고 윤상에게 '주역'과 '예기'와 '사기'를 배웠다.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읽던 책을 불태운 뒤에 도망쳐 나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불명은 설잠, 청한자, 벽산청은, 동봉, 췌세옹이라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호기가 넘치고 예의 따위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성격이 꼿꼿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하고 드디어 몸을 숨겨 전국을 방랑하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천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든 돌멩이든 잡히는 대로 던지고 때로는 활도 쏘아서 거절하였다. 산에 오르면 나뭇잎에 시를 쓰고 혼자 읊조리다가 금방 울면서 그 나뭇잎을 따 버렸다. 비오는 밤이면 흰 종이 100여 장을 꺼내어 물가에 앉아 혼자 읊조리면서 시를 쓰고 쓴 다음엔 그 종이를 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종이가 다 없어져야 그만두곤 하였다. 때로는 나무를 깎아 농부의 모습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지켜보며 목놓아 울다가 태워 버리곤 하였다.
벼슬한 고관을 만나면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앞에서 "이 백성이 무슨 죄냐?" 하며 통곡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청초한 목소리로 '이소경'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자주 취했으며 취한 뒤에는 "우리 영릉(세종의 능호)을 다시는 못 뵙는구나"라고 한탄하며 슬피 울었다. 이때는 김수온, 서거정이 국사(온나라에서 특히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하루는 서거정이 조정에 가는 길에 김시습을 만났다. 김시습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강중(서거정의 자)은 편안하신가?" 시습이 큰 소리로 무례하게 대하였지만, 서거정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서거정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는 그림을 주고 시를 부탁하니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올 땐 위천의 물고기랑 욕심이라곤 모르더니 어찌하여 늘그막에 응양장이 되어서 공연히 백이 숙제로 하여금 굶어 죽게 하느냐
이 시가 쓰인 그림을 되돌려 받은 서거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다.
세조가 내전에 법회를 열고 김시습을 초청하였는데, 그는 몰래 새벽에 도망쳤다. 사람을 보내어 뒤따르게 하자, 그는 더러운 오물 속에 들어가 얼굴을 반만 내밀고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김시습은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예전처럼 방랑 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소송의 일로 관가에 들어가면 분명한 잘못인데도 괴변을 늘어놓아 반드시 이겼으며, 재판이 끝나면 큰 소리로 웃으며 이긴 문서를 찢어 버리곤 하였다.
한번은 시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벼슬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여 시습과 절교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종실 수천부정 이정은과 남효온, 안응세, 홍유손 등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강릉과 양양 사이를 오갔다. 이때 유자한이 양양군수로 있었다. 그는 김시습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가정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시습이 사양하는 편지를 썼다.
낙백하여 세속을 살기보다는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 낫다.
59세에 죽었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시에 자기의 자화상 두 폭을 남기고 찬을 썼다.
네 모양은 너무도 막연하고 네 말은 너무도 미련하다 언덕 밑 구렁텅이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조에 집의에 증직되고 정조 8년(178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 놓았다가 장례할 때 보니 생시의 얼굴과 같았으므로 무량사 승려들이 부처님으로 여겼다. 화장을 하고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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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몫
하루는 사자와 당나귀와 여우가 사이좋게 사냥을 하러 갔다. 뜻밖의 많은 사냥감이 있어 다들 기분이 좋았다. 사자는 먼저 당나귀를 시켜서 잡은 것을 나누게 했다. 당나귀가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 사자를 보고 먼저 가지라고 하자 사자는 화를 내어 당장 당나귀를 잡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여우에게 분배하라고 일렀다.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의 몫으로 주고 자기는 조금만 차지했다. 그러자 사자는 지극히 흐뭇해하며 어째서 그렇게 나누었느냐 하고 물었다. 여우가 말했다.
"당나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앞세워 더 많이 차지하고 부를 가진 자는 부를 이용하여 더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힘도 없고 부도 갖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쥐꼬리만한 몫이 돌아오게 마련. 고충 건물이 들어서는 서울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지만 이지러진 지붕의 시골 풍경은 십 년이 하루 같고 보면 위의 '이솝' 이야기를 한갓 우화로만 들리지 말고 위정자들은 한 번 되씹어 볼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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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클레망소의 금연법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총리로서 유럽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클레망소는 의사에게 엄중한 경고를 들었다.
"건강에 크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클레망소는 시거를 매우 즐기는 애연가였다. 그런데 의사는 시거를 하루 여섯 개비로 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클레망소는 아예 이렇게 선언했다.
"겨우 그것밖에 피울 수 없다니, 차라리 피지 말자."
그런데 그의 책상에는 여전히 시거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뚜껑까지 항상 열려 있었다. 도무지 금연을 선언한 사람 같지 않아 어떤 사람이 물었다.
"각하는 금연하셨다고 들었는데 다시 피우십니까?" 클레망소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 좋아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있는 거라네. 고난이 클수록 승리의 기쁨도 크니까. 그리고 기뻐해 주게. 아무래도 승리가 임박해 오는 것 같네."
담배뿐 아니라 즐기던 기호를 끊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조그마한 핑계라도 생기면 그 하찮은 핑계에 의지하여 욕망의 포로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지간한 의지가 없으면 지속적으로 온갖 욕망과 유혹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클레망소가 담배를 끊는 과정을 다룬 이 작은 일화의 재미는 그 지독한 유혹의 대상을 일부러 눈앞에 늘어놓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는데 있다. 이 의지력의 실험은 , 금연이라고 하는 보잘것없는 싸움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초월하고 있다. 크게 소리내서 웃는 클레망소의 인간성에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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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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