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6 19:44 【독서편지】: 제 77 호 風磬 조회 수 9,576 추천 수 14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7 호4339.12.06 (10.16)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책은 덥다고, 춥다고, 날씨 좋으니 어디 나들이나 가볼까 하며 늘 접어 놓아선 않된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러 가더라도, 출퇴근시간에도, 잠들기 전에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중독일까요? 책이 중독이라면 걸리고 싶은 病中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라면 어떨까요? 음... 죽기 전까지 읽고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風磬 -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누구나 다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개중에는 만일 그들이 나를 좋아하면 지금보다 나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질 사람들도 있기 때문. / 헨리 제임스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어린 기녀의 피맺힌 순절 -전계심 강원도 춘천의 봉의산 기슭에는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라 쓰인 낡은 돌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비석의 비명에 씌어 있는 "격기전성 계심명 소내모천 적교방......"이라는 내용과 그 고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애원 서린 사연을 더듬어 알 수가 있다. 계심은 조선 정조 때 여인으로 본성은 전씨요 춘천이 고향이다. 천성이 청결하고 유정한 그녀는 원래 미천한 가정에 태어난 탓으로 일찍이 기적에다 그 이름을 두게 되었다. 나이 어린 기녀 계심을 그러나 다른 '요사스럽고 앙큼한' 기녀나 '닳고 닳은' 기녀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마다, "계심아, 네 나이 그렁저렁 열여섯이라, 혼자 베게나 끌어안고 잠자리를 어지럽히기에는 좀 딱한 나이구나. 어떠냐, 오늘 밤 내가 네 베게 노릇 좀 해 주랴?"하고 추근거리는 사내를 대하게 마련이었으나, 웬걸 계심은 그럴 때마다 곱게 고개를 젓고는 했다. "소녀는 낙적이 될 때까지 손님들 베개 시중은 들지 않을거에요." "베개 시중 아니면 곧바로 잠자리 시중은 어떠냐?" "어머니, 손님께서 약주 한잔 잡숫더니 그 의젓하신 두상이 이리의 털로 곤두서시네요!" "하하핫, 이 사람 계심이한테 또 한 번 당했수면, 하하핫." 좌중은 그렇게 매양 웃음으로 끝이 나게 마련이었지만, 그 숱한 유혹을 물쳐 가며 고된 기방살이를 하는 동안 계심의 마음과 육신은 상할 대로 상한 채였다. 이러구러 나이 열일곱이 되자 계심은 낙적이 되었다. 다른 기녀들처럼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던 계심이 항상 정절과 부덕을 고루 갖춘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칭송을 받아 오자, 실상 눈독을 들여 오는 관속들도 적지 않았다. 수년간의 기방살이를 마치고 다시금 허술한 자기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에 계심은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얘야! 손님 왔다, 나와 보렴." 계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머니는 벌써부터 돈이 손안에 쥐어지기라도 한 듯 입이 벙그러졌다. "손님이라뇨. 어머니, 여긴 기방이 아니에요." "기방이 아니란 건 어미도 알고 있다. 허지만 이 고을 부사께서 찾아오셨는데 들이지 않을 수 있느냐?" "이 고을 사또마님께서 행차하셨다구요?" 계심은 그제서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김 부사를 방안으로 들였다. 눈치 빠른 어머니의 솜씨로 술상이 마련되어 오자, 계심은 부사 옆에 단정히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사또마님께서 누추한 집에까지 납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김 부사는 아직도 보송보송한, 이마의 솜털이 앳되어 보이기만 하는 계심의 얼굴을 그린 듯이 바라보다 따라 놓은 술잔부터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마셔 버린다. 김 부사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일부러 변복까지 하고 찌그러진 계심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으나 기방에서 진작부터 김 부사에게 가무를 들려준 적이 있는 계심은 갑작스런 사또의 내방이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계심아." "네, 사또마님." 술 몇 잔이 들어가자 김 부사는 계심의 그 야드르르한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계심아! 너 나하고 살지 않으련?" 별로 말주변이 없던 김 부사는 까짓것 말주변이야 유창하건 어눌하건 간에 본심부터 털어놓았다. "네? 살다뇨? 사또마님." "살림을 차려 줄 터이니 나하고 부부지정을 누리고 살아보자, 그런 말이다." "사또마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갑작스런 구애를 받고 계심은 가슴이 뛰었다. 자기에게 혹하여 농이든 진심이든 구애를 해 오는 남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렇듯 한 고을의 가장 높은 어른이 직접 자기를 요구해 온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어찌 하겠느냐? 나하고 평생의 인연을 맺어 보겠느냐?" "평생의 인연이라구요......?" "내 비록 한성의 본가가 있는 몸이기는 하나 한 입으로 두 소리는 하기 싫은 사람이다. 진작부터 너에게 먼 발치로 정을 기울여 온 나이니 이 진심을 뿌리치지 말아라." "......" 계심은 손에 잡았던 술병을 놓고 김 부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송구스럽고 황감한 마음이 그만 그녀를 울렸다. 자신의 무릎에 그 고운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는 계심의 몸에 손을 얹고는, 오랜만에 소유하고 싶어하던 보석을 손에 쥐고 매만지듯 김 부사는 정겨웁게 쓸어 주었다. 마침내 계심의 방에 불이 꺼지고 밤은 깊어갔다. 김 부사에게 몸을 바친 계심은 며칠 뒤 부사가 마련해 준 조그마한 집에다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김 부사를 모셨다. 계심은 이를테면 김 부사의 외처였다. 그 당시에는 관리들이 본가를 지키는 경처와 부임지에서 시중을 들게 마련인 외처를 두어 객수를 달래어 오던 일이 잦아서 낙적이 된 계심을 김 부사가 데려다 살림을 차려 준 일이 무엇 하나 괴이쩍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 부사란 사람은 원래 위인이 시쳇말로 청렴 결백했던 모양이어서 기대를 잔뜩 걸었던 계심의 부모를 적이 실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또의 사랑을 받게 된 딸 덕으로 늘그막에 호강 한 번 해보나 보다 하고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부모들은 얼마 못가 기대가 허물어지자 딴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영감, 계심이를 언제까지 부사 수청이나 들게 내버려둘 작정이슈?" 계심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번번이 선수를 썼다. 어미는 외처로 내준 딸이 그저 수청이나 들고 있는 꼴이거니 하고 못마땅해하였다. "내버려두지 않음 어떡하나. 한 번 정을 준 사람인데." "어휴, 딱도 해라. 계심이 나이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애를 주변머리도 쥐뿔도 없는 부사한테 맡겨 두었다가 비렁 거지를 만들 작정이슈? 난 그 꼴 두눈 멀겋게 뜨고 못 봐요!" "못 보면 그만이지 뭐." "뭐에요! 아이구 속 타는 소리 작작 씨부렁대세요......" 이래저래 비위가 뒤틀려 버린 계심 어미, 이튿날부터 부리나케 사립문 밖을 드나들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러 놓고야 말았다. "영감, 안되겠소. 사또인지 비렁 거지인지 그 사람한테 우리 계심일 맡겨 놓았다간 우리 신세까지 거지가 되고 말겠소." "허지만 이제 와서 별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나?" "어휴, 속 터지는 소리 작작 하슈. 이제라도 한성 교방에다 계심일 넘겨 주기만 하면 논마지기 값이나 톡톡히 준다는구랴." "어느 쓸개 빠진 자가 몸 안에 아이까지 밴 애를 기적에 올리려구 그럴까?" "아따 우리 애 몸 안에 사또 씨가 들었는지 아닌 말로 여우 새끼가 들었는지 배를 가르고 들여다보기 전에는 아는 재주 있답디까? 아뭇소리 말고 내 말대로 계심일 한성 교방으로 내놓읍시다." 계심의 부모는 한성의 교방에 입적시키는 대가로 땅 몇 마지기 값을 준다는 바람에 딸을 덜컥 그리고 팔아 먹고 만 것이다. 부모가 한 짓이라 원망도, 하소연도 할 수 없이 된 계심은 어미 말마따나 주변머리없이 청렴 결백하기만 한 김 부사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계심은 정이 들 대로 들어 버린 김 부사와 이별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죽기보다 더 싫었다. '교방에 몸을 던져 다시 뭇사내의 손길에 놀아나야 하다니, 화류계 여자로 어쩌면 평생을 수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당장 김 부사 앞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고도 싶었으나 부모가 한성 교방에서 미리 받아 쓴 돈을 갚기 전에는 이 마당에 와서 무턱대고 거역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계심의 몸 안에는 사랑하는 낭군 김 부사의 씨가 꿈틀거리고 있는 처지였다. 그날 밤 마지막으로 김 부사 품에 안겨 온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운 계심은 이튿날 퉁퉁 부은 얼굴로 한성길에 올랐다. 안타깝고 쓰라린 이별이었으나 차마 그 같은 심정을 겉으로 내보일 수고 없었던 김 부사는 그저 고을 백성들이 눈에 띄지 않는 자기 처소 담장 안에서 멀리 사라져 가는 계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김 부사가 계심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인정이었다. 계심은 몇 달 만에 다시 기적에 올라 가무와 웃음소리에 몸을 섞어 술을 따르고 억지 교태를 부려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야했다. 그러나 몸은 항상 청상청루 천한 자리에 섞여 있어도 그녀의 청결하고 유정한 마음은 향리에서 손님을 대하듯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단정하게 갖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그머니나...... 이게 뭐야?" 어느 날 기방에서 옷을 갈아입다 같은 방을 쓰던 기녀가 방바닥에 떨어진 계심의 장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머, 이건 장도칼 아니냐?" "응, 장도칼하고 약. 이리 줘, 언니." "에게게, 이런 걸 가슴에 품고 다니는 걸 보니까 너 아주 예사 계집애가 아니로구나. 여차하면 이 칼로 사내놈을 찌르고 약을 마시고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말을 건넨 기녀는 그만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고 놀랐다. 실상 계심은 제 몸에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그 약과 장도칼을 써먹을 작정이었다. 이 같은 계심의 단심은 곧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 기방 기녀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심은 자기의 몸을 늘상 경계하고 도사려 오는 만큼 짓궂은 사내들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고, 그 때마다 지극한 사랑과 고매한 인품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던 김 부사와의 기나긴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앳된 계심을, 게다가 마음씨마저 남달리 곱기로 소문난 계심을 한성의 한량이나 불량배들이 가만히 놓아 둘 턱이 없었다. 그들은 계심의 주위를 에워쌌다. "옛다 돈. 나하고 하룻밤 정염이나 불태워 볼거나?" 숫제 동전 꾸러미를 쩔래쩔래 흔들어 보이기부터 하는 부류에서 시작하여 쇠도둑놈 같은 구릿빛 몸으로 접근해 오는 축, 아니면 골샌님처럼 의젓한 풍모를 앞세우고 슬며시 전담 문서를 치마폭에 싸주는 애송이에 이르기까지 계심을 소유해 보려는 사내들은 꼬리를 이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까 마침내 불량한 사내 몇 놈은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양으로 야심한 밤에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었다. "버릇없고 콧대 높은 년! 얘들아, 저 년의 사지를 강아지 새끼 네 다리 비끄러매듯 꼼짝 못하게 비끄러쥐고 옷을 벗겨라!" "예이!" 불량배들은 계심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맡아 쥐고 옷을 벗겼다. " 이놈들! 이 손, 이 다리 놓아라!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난 홀몸이 아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두목인 듯한 자는 한 손으로 계심의 머리채를 잡고 한 손으로는 허옇게 드러난 유방을 주물러 대며 야욕을 채웠다. 두목이 물러나자 불량배들이 차례로 덤벼들었다. 계심은 이제 항거할 힘도 없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조를 강탈당하고야 말았다. 야욕을 채우고 불량배들이 물러가자 계심은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리며 물에 빠진 귀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일로 계심은 몸 안에 든 아기가 떨어지고, 김 부사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윤간당했다는 이 부끄러운 마음과 씻을 길 없는 수치심, 게다가 김 부사와의 사이에 가진 뱃속의 아기까지 낙태되자 그녀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죽어 버리자. 죽어서 이 씻을 길 없는 부끄러움을 씻어내자.' 계심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첫 정을 주었던 춘천의 김 부사에게 유서를 써 놓고 그녀는 가지고 있던 손 장도를 꺼내었다. '불량배들한테 잡혔던 머리칼, 그리고 이 젖가슴.' 그녀는 먼저 머리를 잘라 내고 뒤이어 젖가슴을 차례로 도려 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뒤 김 부사가 계심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밤의 꿈속이었다. 가뜩이나 계심이 떠난 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던 김 부사는 흐트러진 산발의 미인이 꿈속에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놀랐다. '아! 너, 너는......' '계심이옵니다, 사또마님.' 자세히 보니 계심은 벌거벗은 몸이었고 젖가슴이 칼로 도려져서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계심아, 네 모습이 그게 무엇이냐? 어쩌다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으흐으으, 사또마님. 폐일언하고 소첩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시어요. 네? 사또마님.'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애소하는 계심의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무슨 악귀와 같았다. 꿈에서 깨어난 김 부사는 그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날이 밝기가 바쁘게 서둘러 한성으로 달려갔다. 계심의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도려져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김 부사는 유서에 씌어 있는 내용대로 불량배들을 즉시 관가에 고발하고 계심의 시신을 거두어 춘천으로 운구, 봉의산 언덕에 묻어 주었다. 계심의 순절담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춘천 순찰사 이 사또의 심금을 울렸다. "허, 계심의 절개가 가상쿠나, 내 이를 혼자 듣고만 있을 수 없으니 중앙에 알려 정문을 세우도록 하리라." 순찰사는 속으로 계심과 같은 어리고 절개 굳은 기녀를 외처로 차지하고 살아 보지 못한 것이 섭섭한 노릇이었으나 그 같은 얄팍한 생각을 접어두고 마음먹은 대로 중앙에 알려 계심의 집에 정문을 해 세웠다. 순찰사가 그런 식으로 계심의 영혼을 위로해 주자 이번에는 그 고을 군수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군수는 고을 선비 몇몇과 회동하여 봉의산 언덕에 있는 계심의 무덤에다 비석을 해 세우라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21년 5월에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란 돌비석이 계심의 무덤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박종정이 비명을 짓고 유상륜이 글씨를 쓴 자그마한 이 기념비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어지러운 성 모럴에 커다란 교훈을 던져 주게 된 것이다. 아니, 실상 계심의 높은 정절담은 현대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춘천의 제1회 개나리 문화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서 춘천 시내 접객 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켜들고 시가 행진을 벌였던 일이 있었으니까 분명코 계심은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된 여인임에 틀림이 없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전환기의 갈림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 도현철(연세대강사) 고려 후기 사대부 앞에놓인 두길 조선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 후기 사대부는 정치적 행보가 달랐다. 우리 나라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 전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 이승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성씨 문중에서 흔히 자랑스런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도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절의를 다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도덕에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고려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정도전과 조준, 그리고 윤소종 등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권세가를 비판하고 정적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자학이라는 신사상을 이념으로 받아들이 사대부들이 고려말이라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 쪽은 고려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한 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 개혁을 하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뉘어지고, 궁극에 가서는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대부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리 사대부에게는 정치. 경제 운영에 대한 견래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누가 정치 운영의 주체가 되느냐, 인재를 어떻게 선발하느냐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색. 정몽주 등은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와 좌주문성제에 찬성하였다. 음서제란 조상이 끼친 음덕으로 그 후손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특별한 공이 없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이고, 좌주문생제란 과거에서 시험관인 좌주와 문생이 뒤에도 부모. 자식 관계처럼 돌봐주고 받드는 관습이다. 이색은 15살 때 아버지의 음덕으로 별장이 되었고 이색 계열의 한수. 우홍수 등도 음직을 받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음서제를 실시하면 고급 관리의 자손은 어려서부터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다른 관리들보다 고위직에 빨리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좌주문생제에도 찬성하였다.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색은 좌주와 문생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보고 그들 사이의 사적인 은혜와 의리가 국가의 원기를 배양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음서제와 좌주문생제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권세가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다른 사적인 인연도 없었다.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좌주문생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윤소종은 이승인. 권근 등과 더물어 이색의 문생이었으나, 이승인. 권근이 우왕. 창왕대에 요직에 있었던 것과 달리 윤소종은 향리에 내려가 있거나 한직에 머물렀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는 공민왕 20년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종 9품 벼슬에 9년간이나 머물러 있어서 장인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좌주문생 관계를 “공적인 선발로서 사사로운 은혜를 삼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경제제도 측히 토지제도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에서 방법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요즘처럼 화폐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는 방법도 요즘과 달랐다. 국가는 토지 주인에게서 생산물의 일정량을 토지세로 거두었는데, 관리들에게 그들의 지위, 직책에 따라 규정된 토지의 세금을 거둘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준 토지를 사전이라 한다. 관리 개개인이 토지 주인에게서 직접 토지세를 거두어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인정변 이후 토지제도 운영이 법대로 되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은 사전을 자손에게 불법적으로 세습시키고 힘없은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서 규정 이상의 토지세를 3- 4번, 심지어 8- 9번까지 내기도 했다. 그 결과 농민 생활이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대하여 이색과 권근 등은 농민이 곤궁하게 되는 이유가 하나의 토지에서 1년에여러 번 세금을 거두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농민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전 주인을 규정대로 잘 가려서 1년에 한 번씩만 세금을 거두면 된다고 하였다. 반면 조준 등은 관리들에게 사전을 나누어 주는 제도 자체를 혁파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사전을 전부 없애고 경기에만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다시 분배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관리 개개인이 농민에게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전을 축소하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수취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수조권에 의한 중간 수탈을 없애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의 경제적 이해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사대부들은 지배층이고 대개 지주였지만 그들간에는 차이도 컸다. 이색과 같은 수성파 사대부는 상대적으로 경제 생활이 윤택했다. 이색은 한산. 면주. 여흥. 광주. 덕수. 장단. 개경과 유포. 적제촌 등 10곳에 토지를 소유하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토지와 자신이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이 있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까지 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 100결, 노비 10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중소 지주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대토지소유자이자 중앙 정계의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으로서 과거나 군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서 봉급마저 지급되지 않았고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조차 권력자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정도전은 우왕 초에 나주 지방의 거평부곡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선향인 영주와 생가인 삼봉을 왕래하면서 4년을 보냈으며, 그 뒤에 유배가 완화되어 서울 근교에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띠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였다. 그의 부인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하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고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 때 그 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 입신양명하여 처자가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나라 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욕스럽게 되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며,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은 흩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도전은 사대부였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두 파 사대부의 사상적 차이 이 시기 사대부가 정치 현장에서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사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유학자로서 주자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하였다. 원래 유교의 예를 구성하는 원리로는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친친과 인위적인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존존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앞의 것은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간계를 설명하고 혈연에 의한 인정이나 사사로운 정감을 중시한다. 뒤의 것은 혈연보다 인위적이고 2차적인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계를 설명하고 공공성을 강조한다. 이 두 측면은 결합되어 있지만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수성파 사대부능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 요서 지방을 방비하던 조포라는 관리가 있었다. 이민족이 침입하여 어머니와 처자식이 인질로 잡히자 이민족을 공격하여 격퇴시켰으나,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하여 이색의 아버지인 이고은 조포가 ‘어머니를 죽이면서도 공적을 세우는 것이 충이라는 것만 알았지 자신을 보전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효라는 것을 몰랐다’라고 비판하였다. 자신을 보존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조포는 관직을 버리고 인질로 잡힌 어머니를 구해 은둔하여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공적인 관계, 혹은 군신 관계보다는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대의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색의 제자인 이승인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시험관이 되었다. 그 이유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생전에 아들의 영화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상중에는 벼슬에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이 명령하는 경우에만 벼슬할 수 있었지만, 이승인은 이를 어기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이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효자의 마음, 곧 혈연에 입각한 인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는 주자학을 통하여 국가의 공적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춘추) 의 ‘대의는 부모, 자식 관계에 앞선다’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하여 공적 의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혈연 가문을 중시하는 음서나 인적으로 결합하는 좌주문생제를 비판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차이점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군신관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냐 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색 계열의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견지했다. 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비유된 인간 관계, 불변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연 관계로 비유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 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군신 관계를 어떠한 여건에서도 받아들이고 지키려 하였다. 선왕인 공민왕의 말에 복종해야 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주자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하였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에 나오는 천명사상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역설하고,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동양 고대의 대표적 성군이라는 탕 임금이나 주나라의 무왕을 이상군주로 제시하였다. 혈연으로만 보증되는 군주상에 만족하지 않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는 군주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분에 맞는 정통의 군주를 원하게 되고 이에 어긋난다면 이를 정정하고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에 비춰볼 때 우왕이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명분에 맞지 않은 우왕과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물러나게했다. 나아가 명분에 맞는 군주의 즉위와 새로운 군신 관계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명분론은 혈연을 기조로하는 고려의 예론과 배치되므로 고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를 부정하는 논리가 나왔던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도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새 왕조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유도 사상적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충신과 공신의 차이 조선왕조는 개국 11일 만에 고려말에 당을 만들어 반란을 꾀했다고 하여 이색, 우현보 등 56명에게 죄를 주었다. 그리고 두 달후 정도전, 조준 등 44명을 개국공신으로 임명하였다. 충신과 공신이란 하나의 500년 왕조가 망하고 다른 하나의 500년 왕조가 들어서던 정치적 격변기에 사대부들이 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길이었다.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했든,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은 자기네의 이념에 충실하게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때론 목숨까지 버리면서. 강남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같은 사상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빛깔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런 빛깔의 차이는 때로 커다란 변혁의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빗속에서의 기다림 중학교 삼년 동안 그 친구와 나는 칠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그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도 변함없이 늘 함께 다녔다. 자전거를 나란히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삼학년 겨울 무렵 나는 그만 내 재산 목록1호인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학교와 온 동네를 뒤지며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당시 가정 형편상 새 자전거를 구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낙심해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 친구는 자신의 자전거로 같이 통학하자고 했다. 그 뒤 나는 친구의 자전거를 함게 타고 다녔다. 친구는 매일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우리 학교 정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고, 또 수업을 마치면 나를 태우러 다시 들렀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아침 저녁 늘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수업도 조금 일찍 끝났다. 학교 정문에 나가 보았지만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한 십여 분 기다리다가 그냥 뒤를 돌아보면서, 자전거가 보이기만 하면 친구가 아닐까 싶어 내 앞을 지날 때까지 서 있곤 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옷은 빗물에 젖어 차갑고 축축했고, 가방이며 신발도 온통 빗물로 범벅이었다. 집에서 한참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한 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내가 비맞고 그냥 걸어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버스라도 타고 가지 그랬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김춘수 님/전북 남원시 주생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7 - 독일관념론의 종언: 헤겔의 사망(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0년: 스탕달, "적과 흑"발표: 영국 차티스트 운동 1832년: 영국의회, 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베를린 자유대학 먼저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헤겔은 새로 창간되면서 학문과 사상계의 중심지로 떠오른 베를린대학의 철학교수로 초청을 받게 된다. 독일의 모든 대학은 국립대학인 셈이다. 지방자치제가 일찍 형성되었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말하면 주립대학인 동시에 국립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베를린대학은 국립이나 왕립대학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신흥학문의 본고장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헤겔은 관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베를린 대학의 초청을 받은 헤겔은 철학과의 중심교수가 되었고, 철학과의 중심교수는 교수중의 교수로 군림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철학은 학문중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교수로서의 존경과 명예를 함께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강의실에는 대학생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참여하는 상황이 되었다. 독일대학의 제도에 따라 수업도 좋아졌고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물론 일부 교수들로부터 어용교수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지나칠 정도의 높은 정신적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난해하고 중복되는 지루한 강의에 열성적으로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시의 한 풍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려운 체계를 만드는 것이 훌륭하다는 독일적 사고풍토였을지 모른다. 헤겔이 프랑스나 영국에서 그런 강의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음에 틀림이 없다. 헤겔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무렵, 정확히 말하면 1831년 여름에 독일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그 당시의 콜레라는 전체 인구의 몇분의 1씩을 희생시킬 정도의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헤겔의 가족들은 콜레라를 피하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있다가 병세도 자취를 감추게 되고 새로운 가을 학기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강의준비를 갖추고 개강이 되었을 무렵 헤겔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의사들의 정성어린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겨자를 전신에 바르는 치료법도 있었던 모양이다. 병세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결국은 헤겔이 불행하게도 그 해 콜레라의 마지막 희생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헤겔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베를린 대학과 철학계에 커다란 파문은 몰고 왔다. 철학계의 최대의 거목이 사라진 것 같은 여파가 일어났던 것이다.헤겔이 죽은 뒤 베를린 대학은 그 큰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다가 헤겔의 선배인 셸링을 초청하였다. 셸링은 아직 50대 후반기의 한창 원숙된 학문적 활약기였기 때문에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셸링은 큰 기대에 부풀어 베를린대학으로 부임했다. 그러지 않아도 후배인 헤겔에 대해 뒤떨어졌다는 생각때문에 불안을 안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헤겔로 끝나 있었다. 셸링의 강의는 헤겔보다도 더 일찍 끝장난 과거의 철학같은 인상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기대감은 좌절되었고, 모두가 셸링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때는 이미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셸링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올센과의 사랑의 괴로움을 안은 채 베를린에 들러 셸링의 강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철학에 관심을 보였으나, 곧 실망해 코펜하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헤겔의 죽음은 독일 관념론의 종언인 동시에 세계철학사의 커다란 종착역을 만들어놓았다. 플라톤부터 시작되었던 철학의 큰 흐름이 이미 끝을 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헤겔과 더불어 근대철학은 끝났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세계철학사의 가장 높은 산맥이었던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시작되어 1831년의 헤겔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꼭 반세기에 걸친 철학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칸트는 나귀와 같이 조용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많은 철학의 짐을 지고 출발했었다. 피히테는 호랑이와 같이 날쌔게 달리는 성격이었다. 셸링은 달리는 말과 같이 빨리 질주해 주어진 시대를 장식했다. 그러나 헤겔은 소와 같이 느리게 시작했으나 누구보다도 많은 짐을 지고 목적지에 도달한 격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철학자들은 중간의 피히테나 셸링보다도 헤겔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칸트가 아니면 헤겔을 택하는 것이 철학도들의 공통된 선택과 같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물론, 일본의 철학원로들이 양자택일을 하는 추세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철학도들도 둘 중의 어느 한사람에게 추종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헤겔 100주기와 최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헤겔연구에 뜻을 모으게 된 것이 사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딴따라패'는 영어 'tantara'의 음을 빌려 온 것 요즈음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연예인들을 '딴따라패'라고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전에는 곧잘 '딴따라패'라고 얕잡아 부르곤 했습니다. 언뜻 들어도 '딴따라'가 나팔 부는 소리와 같아서 연예인들의 행동을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었습니다. 옛날의 풍각쟁이들처럼 그 행렬의 앞에서 북치고 장구치는 사람들을 연상했을 테니까요. 이 '딴따라'가 우리 국어의 의성어에서 온 것 같지만, 실상은 영어의 의성어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의 'tantara'의 음을 빌려 온 것이지요. 나팔이나 뿔나팔 등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소리를 빌어 와서 '딴따라'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국어의 의성어 '딴따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국어에서는 '딴따라'라는 의성어는 없습니다. 이처럼 의성어는 언어마다 유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어에서 'flag'는 '깃발'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국어의 '펄럭펄럭'을 연상시키지요? 물론 영어의 'flag'는 의성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파스칼과 병의 선용 파스칼 [Pascal, Blaise] - 1623.6.19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 1662.8.19 파리. 블레즈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그리고 발명가이기도 하다. 39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면서 그것도 만년의 4년간은 병상에 누워지냈는데 그토록 여러 가지 일을 그는 해냈다. 10대에 벌써 그는 <음양론>과 <원뿔곡선론>을 써서 당시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컴퓨터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계산기를 발명한 것은 18세때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이며,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로 유명한 <팡세>의 저자로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파스칼은 크리스트교가 얼마나 훌륭하고 참된 종교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팡세>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회심을 결행한 것은 31세 때였다. 파스칼은 신의 계시와도 비슷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몹시 고양되어 그 날짜를 1654년 11월 23일 밤이라고 밝히고 감격한 내용을 적어 평생토록 옷속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회심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 철저한 금욕생활과 수도생활을 하였다. 모든 시간을 성경을 읽는 데에 바치고 일체의 쾌락을 포기하며 음식까지도 생존의 기본으로 제한하였다. 누군가 맛있다 는 이야기를 꺼내면 화를 내면서 관능에 빠지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오직 금욕과 신앙을 높이는 것만이 그의 목표처럼 보였다. 파스칼은 그의 유언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시기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 을 자주 서술하며,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불사(영생)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스칼은 계산기 발명에 너무 골몰해서 18세부터는 몸에 고통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심한 두통, 소화불량, 위의 통증, 다리 저림, 변비 등 그래서 의사는 아무 일에도 열중하지 말고 특히 머리 쓰는 일을 삼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죽음의 병석에 누워서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상과 생각을 손수 종이에 쓰기도 하고 또 조카나 하인에게 그것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는 병의 선용 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바쳤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섬기게 하려고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세속적으로 썼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 저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병을 보내 주셨습니다. 부디 제가 성급하게 이 병을 사용해서 당신을 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소서. 파스칼에 있어서 죽음이란 영원한 삶의 입구 이므로 그에게는 무서워 할 것이 못되었고 오히려 병은 환영해야 할 것 이라고 그는 말했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 그는 이 통증조차도 선용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죽기 4년 전, 심한 치통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파스칼은 전부터 마음에 걸려 있던 수학문제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룰렛 이론 혹은 상크로이드 이론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원이 직선 위를 구를 때 그 원주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궤적을 구하는 문제였다. 밤을 지새워가며 그가 이것을 풀었을 때 치통은 완전히 기시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인은 장결핵이라고도 하고 혹은 전신에 퍼진 암이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것을 참는 파스칼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마음 아파했다. 그때 파스칼은 제발 나를 동정하지 마시오. 병은 그리스도안에게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병은 도리어 사람에게 고통을 견디고 모든 안락과 오관의 즐거움을 끊게 하며 죽음을 기다리면서 야심도 욕심도 없이 인간에게 일생동안 따르던 모든 정욕을 끊을 수 있게 한답니다. 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여러분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심한 두통과 복통 끝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1662년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1.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 일반적으로 중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말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이 성장해 있었고 이에 따라 노동자 파업, 인력 시장의 형성 등의 현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6,7세기 특히 명말청초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산업 발전이 꽤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양자강 하류 지역에는 직물 수공업이 성행해서 소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위에 무수한 중소도시들이 연계돼 있어 직물타운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면화 재배, 씨빼기, 방적, 방직 등의 공정이 분화되어 있었고 상인 자본이 전체 과정을 통괄했다. 소주의 경우 직기를 수대에서 수십 대까지 가진 직물업소가 1만여 곳이나 되었고 이들은 직공, 무늬공, 염색공 등 분야별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렇게 고정된 일터를 마련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에 수십 명씩 모여 각 기능별로 정해진 다리 밑에서 직물업자가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일종의 일용노동 시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세계 학계에서는 이를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성립`,`자본주의의 맹아`로 보는 설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명재상 장거정이 죽은 뒤 환관들이 득세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들은 전국의 요로마다 징세관을 파견하여 오가는 상인들에게 상세를 강제로 징수했고 도시의 직물업자에게도 직기의 수에 따라 과중한 세를 물게 하여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1601년 마침내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는 직물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발생했다. 환관이 파견한 징세관 손융은 소주의 6개 성문에 각각 세관을 설치하고 기타 교통의 요충지에서도 상세를 강제 징수했다. 이 때문에 미곡상등 상인들은 소주에 발을 끊었고 모든 물가는 폭등했다. 소주 시내 상업은 마비되고 직물업소의 폐업은 속출하고 직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6월 6일 마침내 소주 시내의 직물 노동자들은 직장을 빠져 나와 거리 시위를 벌이다 손융 일파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손융과 결탁해 사리를 꾀한 그 지역 거부인 정원복의 집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정부는 상세의 폐해를 시정할 것을 약속해 폭동은 가라앉게 된다. 사건 수습과정에서 직공으로 자처하는 갈성이라는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스스로 사태의 주모자로 자처하며 중형을 청했다. 이에 책임 추궁은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의 의리에 감동한 소주 시민들은 그를 갈장군이라고 칭송했다.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띤 이 중국 최초의 노동자 파업과 시위에서 직물 노동자들은 시종 정연한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투쟁은 당시 소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지역 관리와 지식인들의 지원도 직,간접으로 받았다. 그러나 강남 지역(양자강 하류)을 중심으로 싹을 키우던 자본주의적인 경제 활동은 1644년 이민족인 청의 북경 점령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청은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지역을 불온시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이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가문이 주된 표적이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만약 청의 침입이 없었다면 17세기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상당히 진전되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13.신 고 립주의는 미국을 붕괴시킬 것이다 1) 저속한 보도관과 도덕적 기준 없는 보도의 자유 1994년 제16회 월드컵 축구경기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이다. 억 단위에 이르는 축구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푸른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숨막히는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거의 모든 방송국의 카메라가 사라져 버렸다. 미국 경찰이 '심슨 체포작전' 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헬리콥터, 경찰차, 고속도로등등으로 화면이 메워져. 텔레비전에 비춰진 장면은 마치 흔히 보는 할리우드영화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뉴스였다. 미국 시민들 마음속의 영?이고 특히 흑인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한 심슨이 살인혐의로 수배되어 체포 직전에 도주한 것이다. 그래서 축구는 갑자기 하찮은 일로 전락해 버렸고 전미국인에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이를 통해 나는 미국에서 말하는 보도의 자유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를 나타내는 비유가 하나 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바로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 없었던 사건이 발생하면 이는 곧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미국의 보도실태와 그와 관계된 문화적 배경 및 그들의 국가의식을 곰곰이 살펴보면, 보도의 자유라는 신성한 낱말은 미국의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보도관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속한 보도관의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도덕적 판단능력을 상실한채 사회적 책임감도 없이 추문을 캐낸 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과장보도를 일삼고,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사물을 판단하여 바깥 세상과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 외에 더욱 심각한 것은. 공리주의로 부추겨 가볍게 허위사실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이미 체포된 그 유명한 우편물폭탄 살인범이 {뉴욕타임즈} 등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논리를 기사화하라고 협박하였고, 이에 신문사측은 어쩔수 없이 보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그의 주장을 기사화하였다. 이런 식의사실을 왜곡하는 자유는 정말 가공할 것이다. 이 보도는 사실 따지고 보면 자유로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공갈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뉴욕타임즈}가 이런 결정을 한 순간 이미 신문사가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공의와 신념은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테러리즘을 질책하거나 그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강력한 의지는 이제 냉정한 조소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변명하더라도 {뉴욕타임즈}는 그 순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테러리스트들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된것이다. 스캔들을 찾아 그 스캔들을 더욱 크게 부풀리는 일은 미국에서비일비재하다. 언론의 감독기능이란 말은 신성한 단어에 불과한 것이고 대부분 미국 기자들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성추문으로부터 폭력,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캔들에 대한 대대적 보도는 판매량. 시청율, 지위, 명성등과 직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도와 살인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꾸며 쓸 뿐이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 따위는 필요할 때나 들먹이는 낱말에 불과하게 되었다. 다른 문제점은 미국인은 그들 자신 혹은 미국의 가치관을 지상 최대의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망언하며 유언비어를 날조하기도 하고 제멋대로 명령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대다수는 중국에 와 본 적도 없으면서 중국의 인권탄압에 대해 비판하며,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받은 공물이 대부분사람가죽과 뼈로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그를 비폭력주의자로 떠벌이고 있는 것 따위이다. 또한 {뉴욕타임즈}는 테러리스트에게는 머리 숙여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돌아서서는 중국에 대해 이를 악물며 거만하게 '우리는 왜 중국을 제재해야 하는가?'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중국은 테러리스트들처럼 '헛수작 마라,가만두지 않겠어'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 본단 말인가? 미국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공리주의는 이 나라를 망가트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 언론계의 선동은 이 나라를 더욱 빨리 무너지게 하고있다. 7살의 미국 소녀 제시카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기보다는그 부모가 실현하고자 했던 소위 '미국정신'이라는 것과 미국 언론계가공모하여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시카가 비행기로 창공을 날아 세계최연소 비행기록 수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의 매스컴들은 떠들썩하였다. 특히 3대 Tv 방송국은 앞장서서 미국인의 생활을 억지로 이벤트행사 속에 몰입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그러나 그들은 만 16세 이상이 되어야 항공기면허를 받을 수 있다는 법적기준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말하면 전미국을 놀라게 할 비행은 불법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사건발생 후 미국연방 항공국의 관련 인사는, 기술적인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제시카는 그저 한 명의 승객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소위 '세계 기록에의 도전'은 날조된 개념이고 항공기 조종의 관점에서 보아도 제시카가 한 행위는 어떤 효력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극은 결국 발생하고 말았다. 비행하기 전 꽃처럼 예쁘게 웃던 7살의제시카를 우리는 보았다.그러나 얼마 후 우리는 Tv 화면을 통해 비행기날개가 떨어져 나가며 땅으로 곤두박질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우리를섬뜩하게 만든 것은 제시카의 어머니 하피웨어 여사가 사건발생 직후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내 아이가 편안하게 죽었기를 바람니다'라고 한 말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도대체 7살된 어린아이가 어떻게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가 매스컴에 의해 극도로 부풀려진 허상의 '국가정신'이라는 이름 아래서 살해당한 것이다.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인권에 대한 잔악한 약탈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제시카가 성공하여 순조롭게 워싱턴까지 날아가고 클린턴 대통령의 만찬에 초대되었다면 역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되어 직접적으로 Tv 시청률을 상승시키고 신문판매량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사 우두머리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만약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청률과 판매량은 역시 상승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사 우두머리들은 역시 짭짤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2) '미국이 곧 세계'라는 허튼소리 이 두 번째 제목의 서두도 역시 1994년 월드컵 축구대회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전세계 수억의 축구팬들이 녹색 필드의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한 권위 있는 여론조사기관이 주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조사한 결과 60퍼센트의 미국 성인들은 인류의 대전 월드컵이 자기 나라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미국인이 얼마나 이 세계적인 스포츠를 배척하거나 멸시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과이다. 그들은 국제축구연맹에 영향력을 행사해 축구경기를 여섯 라운드로 나누어 매 휴식시간마다 광고를 내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개혁'안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세계적인 빈축을 산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인이 이렇게 열심히 벌이고 있는 그 '총명'하고도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판촉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미국인의 심리상태를 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있다. 그들이야말로 국제적 감각의 결여로 생겨난 만용으로 인해 '내가곧 세계이다'라는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땅창은 미국 대학생의 미국 역사에 대한 이해정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중국의 고등학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국민의 높은 역사의식 수준은 인류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그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고립주의'라는 것이 처음에 국가정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힘을 집중하고 있는 '신고립주의' 는 먼저 미국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사회에서 아무리 먼저 강성해진 민족이라 할지라도 세계적인 관심거리조차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지식 빈곤의 위기를 무시하기만 한다면 그 민족은 세계적 경쟁에서 낙오되는 쓴맛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 위에 군림하는 대국의 충동질을 받고 있는 나라들이 내심 기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토끼는 여전히 '특대호 슈퍼강대국'이라는 그늘 아래서 졸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이미 탐구하는 월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온 정력을 아이들처럼 노는 데만 쏟고 있다. 미국의 어른이나 아이들이 모두 유희를 즐기는 것을 보면 인류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아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얻게 되는 쾌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결국 축구의 득점차가 많지 않은 것이나, 잦은 무승부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추구하는 양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잔인한 징벌의 방법은, 고임금의 맛을 보게 하여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해 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을 대폭 인하해 버리고는 이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미국인들의 마음속은 부유한 사회와 초강대국의 동위원소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임금이 갑자기 곤두박질 치려는 순간에 와있다는 전조이다. 신고립주의와 구고립주의의 공통적 특징은 미국의 사상과 타국의 모든 것들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골목대장으로 여기면서 가장 가까운 맹방들을 대하고, 이들과 협조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우월감을 드러내며, 아주 하찮은 것까지도 꼼꼼히 따져 다른 사람의 공로를 빼앗기도 하는 구고립주의의 작태를 보여 주고 있다. 스웨즈운하의 위기 때도 미국인들은 맹방 영국의 등을 쳐서 전통적인 이익을 차지하고 말았다. 미국은 위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성품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인의 지혜와 원대한 영웅심이 전면적으로 후퇴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의 위대한 역사까지도 배척하는 추세에 놓여 있다. 그들은 내부개혁의 울부짖음을 '우리는 일하지 않고 얻길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호기심과 동성애 및 각종 기호에 관심을 가져 주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라는 하나의 소리로 모으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속박을 벗고 미래로 달려가는 우선 목표라고 한다. 그들은 자만하여 외부의 모든 문제는 미국과 모조리 무관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미국의 모든 것은 세계 각국의 미래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국사회의 모든 사건은 세계의 톱기사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위쉐어라는 미국의 종교지도자는 '미국 국민은 세계문화와 대화할 가능성까지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미국의 낭패는 시간문제일 뿐이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이것으로 나의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산울림 사소한 일로 형이 동생과 싸웠다. 그걸 보고 어머니가 형을 야단쳤다. 어린 동생을 귀여워해 주지는 못할망정 때리기는 왜 때리느냐고 나무랐다. 분을 참지 못한 형이 집 뒷산에 올라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쳤다. 앞산에서도 "나는 너를 미워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말했다. "엄마, 산너머에서 누군가가 내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 지르는 아이가 있어요."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말이야. 다시 산에 올라가서 이번에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한번 소릴 질러 봐." 아이는 다시 뒷산으로 올라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앞산 너머에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기뻤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자꾸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글터 → 이글저글 태양에너지는 오늘날에야 비로소 개발되어 생활에 응용되고 있다. 고대에 처음 그것을 이용한 사람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아르키메데스로서, BC214년 로마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수많은 거울로 햇빛을 한 곳에 반사시켜 로마군들의 배를 불태웠다.가솔린은 일정한 냉동온도가 없다. 보통 영하 82-116℃에서 냉동되는데 실험실 밖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없는 온도이다.1초에 600,000,0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영국인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 카메라의 이름은 아마콘 675이다.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 부부는 특허를 내지 않은채 평생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라듐은 세계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이익을 얻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95년에 X선을 발견한 독일 물리학자 륀트겐도 특허를 내지않고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토머스 에디슨은 사후에도 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기계를 발명하여 1920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잡지에 발표했다. 그는 또 전기, 영사기, 축음기 레코드, 전기 펜, 철도 신호등, 왁스 종이, 축음기, 합성수지, 밧데리, 자동 전송기, 딕 레이팅 머쉰, 등사판 기계, 라디오 진공관, 전기 소켓트, 포트랜드 시멘트, 광석분쇄기 등 1,000가지가 넘는 발명을 했다.소련 태생 물리학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화학 교수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이며 성경 주석학자이다. 그는 1992년까지 280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는 단 한권도 없었다.세숫대야 하나에 차는 물로 170평방킬로미터의 넓은 지역을 뒤덮는 15미터 두께의 안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4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30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59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387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399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68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52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46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954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12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15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10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570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16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16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17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462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63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25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60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5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19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375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7 호4339.12.06 (10.16)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책은 덥다고, 춥다고, 날씨 좋으니 어디 나들이나 가볼까 하며 늘 접어 놓아선 않된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러 가더라도, 출퇴근시간에도, 잠들기 전에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중독일까요? 책이 중독이라면 걸리고 싶은 病中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라면 어떨까요? 음... 죽기 전까지 읽고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쓰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風磬 -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누구나 다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개중에는 만일 그들이 나를 좋아하면 지금보다 나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질 사람들도 있기 때문. / 헨리 제임스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어린 기녀의 피맺힌 순절 -전계심 강원도 춘천의 봉의산 기슭에는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라 쓰인 낡은 돌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비석의 비명에 씌어 있는 "격기전성 계심명 소내모천 적교방......"이라는 내용과 그 고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애원 서린 사연을 더듬어 알 수가 있다. 계심은 조선 정조 때 여인으로 본성은 전씨요 춘천이 고향이다. 천성이 청결하고 유정한 그녀는 원래 미천한 가정에 태어난 탓으로 일찍이 기적에다 그 이름을 두게 되었다. 나이 어린 기녀 계심을 그러나 다른 '요사스럽고 앙큼한' 기녀나 '닳고 닳은' 기녀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마다, "계심아, 네 나이 그렁저렁 열여섯이라, 혼자 베게나 끌어안고 잠자리를 어지럽히기에는 좀 딱한 나이구나. 어떠냐, 오늘 밤 내가 네 베게 노릇 좀 해 주랴?"하고 추근거리는 사내를 대하게 마련이었으나, 웬걸 계심은 그럴 때마다 곱게 고개를 젓고는 했다. "소녀는 낙적이 될 때까지 손님들 베개 시중은 들지 않을거에요." "베개 시중 아니면 곧바로 잠자리 시중은 어떠냐?" "어머니, 손님께서 약주 한잔 잡숫더니 그 의젓하신 두상이 이리의 털로 곤두서시네요!" "하하핫, 이 사람 계심이한테 또 한 번 당했수면, 하하핫." 좌중은 그렇게 매양 웃음으로 끝이 나게 마련이었지만, 그 숱한 유혹을 물쳐 가며 고된 기방살이를 하는 동안 계심의 마음과 육신은 상할 대로 상한 채였다. 이러구러 나이 열일곱이 되자 계심은 낙적이 되었다. 다른 기녀들처럼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던 계심이 항상 정절과 부덕을 고루 갖춘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칭송을 받아 오자, 실상 눈독을 들여 오는 관속들도 적지 않았다. 수년간의 기방살이를 마치고 다시금 허술한 자기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에 계심은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얘야! 손님 왔다, 나와 보렴." 계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머니는 벌써부터 돈이 손안에 쥐어지기라도 한 듯 입이 벙그러졌다. "손님이라뇨. 어머니, 여긴 기방이 아니에요." "기방이 아니란 건 어미도 알고 있다. 허지만 이 고을 부사께서 찾아오셨는데 들이지 않을 수 있느냐?" "이 고을 사또마님께서 행차하셨다구요?" 계심은 그제서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김 부사를 방안으로 들였다. 눈치 빠른 어머니의 솜씨로 술상이 마련되어 오자, 계심은 부사 옆에 단정히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사또마님께서 누추한 집에까지 납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김 부사는 아직도 보송보송한, 이마의 솜털이 앳되어 보이기만 하는 계심의 얼굴을 그린 듯이 바라보다 따라 놓은 술잔부터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마셔 버린다. 김 부사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일부러 변복까지 하고 찌그러진 계심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으나 기방에서 진작부터 김 부사에게 가무를 들려준 적이 있는 계심은 갑작스런 사또의 내방이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계심아." "네, 사또마님." 술 몇 잔이 들어가자 김 부사는 계심의 그 야드르르한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계심아! 너 나하고 살지 않으련?" 별로 말주변이 없던 김 부사는 까짓것 말주변이야 유창하건 어눌하건 간에 본심부터 털어놓았다. "네? 살다뇨? 사또마님." "살림을 차려 줄 터이니 나하고 부부지정을 누리고 살아보자, 그런 말이다." "사또마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갑작스런 구애를 받고 계심은 가슴이 뛰었다. 자기에게 혹하여 농이든 진심이든 구애를 해 오는 남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렇듯 한 고을의 가장 높은 어른이 직접 자기를 요구해 온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어찌 하겠느냐? 나하고 평생의 인연을 맺어 보겠느냐?" "평생의 인연이라구요......?" "내 비록 한성의 본가가 있는 몸이기는 하나 한 입으로 두 소리는 하기 싫은 사람이다. 진작부터 너에게 먼 발치로 정을 기울여 온 나이니 이 진심을 뿌리치지 말아라." "......" 계심은 손에 잡았던 술병을 놓고 김 부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송구스럽고 황감한 마음이 그만 그녀를 울렸다. 자신의 무릎에 그 고운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는 계심의 몸에 손을 얹고는, 오랜만에 소유하고 싶어하던 보석을 손에 쥐고 매만지듯 김 부사는 정겨웁게 쓸어 주었다. 마침내 계심의 방에 불이 꺼지고 밤은 깊어갔다. 김 부사에게 몸을 바친 계심은 며칠 뒤 부사가 마련해 준 조그마한 집에다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김 부사를 모셨다. 계심은 이를테면 김 부사의 외처였다. 그 당시에는 관리들이 본가를 지키는 경처와 부임지에서 시중을 들게 마련인 외처를 두어 객수를 달래어 오던 일이 잦아서 낙적이 된 계심을 김 부사가 데려다 살림을 차려 준 일이 무엇 하나 괴이쩍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 부사란 사람은 원래 위인이 시쳇말로 청렴 결백했던 모양이어서 기대를 잔뜩 걸었던 계심의 부모를 적이 실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또의 사랑을 받게 된 딸 덕으로 늘그막에 호강 한 번 해보나 보다 하고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부모들은 얼마 못가 기대가 허물어지자 딴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영감, 계심이를 언제까지 부사 수청이나 들게 내버려둘 작정이슈?" 계심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번번이 선수를 썼다. 어미는 외처로 내준 딸이 그저 수청이나 들고 있는 꼴이거니 하고 못마땅해하였다. "내버려두지 않음 어떡하나. 한 번 정을 준 사람인데." "어휴, 딱도 해라. 계심이 나이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애를 주변머리도 쥐뿔도 없는 부사한테 맡겨 두었다가 비렁 거지를 만들 작정이슈? 난 그 꼴 두눈 멀겋게 뜨고 못 봐요!" "못 보면 그만이지 뭐." "뭐에요! 아이구 속 타는 소리 작작 씨부렁대세요......" 이래저래 비위가 뒤틀려 버린 계심 어미, 이튿날부터 부리나케 사립문 밖을 드나들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러 놓고야 말았다. "영감, 안되겠소. 사또인지 비렁 거지인지 그 사람한테 우리 계심일 맡겨 놓았다간 우리 신세까지 거지가 되고 말겠소." "허지만 이제 와서 별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나?" "어휴, 속 터지는 소리 작작 하슈. 이제라도 한성 교방에다 계심일 넘겨 주기만 하면 논마지기 값이나 톡톡히 준다는구랴." "어느 쓸개 빠진 자가 몸 안에 아이까지 밴 애를 기적에 올리려구 그럴까?" "아따 우리 애 몸 안에 사또 씨가 들었는지 아닌 말로 여우 새끼가 들었는지 배를 가르고 들여다보기 전에는 아는 재주 있답디까? 아뭇소리 말고 내 말대로 계심일 한성 교방으로 내놓읍시다." 계심의 부모는 한성의 교방에 입적시키는 대가로 땅 몇 마지기 값을 준다는 바람에 딸을 덜컥 그리고 팔아 먹고 만 것이다. 부모가 한 짓이라 원망도, 하소연도 할 수 없이 된 계심은 어미 말마따나 주변머리없이 청렴 결백하기만 한 김 부사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계심은 정이 들 대로 들어 버린 김 부사와 이별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죽기보다 더 싫었다. '교방에 몸을 던져 다시 뭇사내의 손길에 놀아나야 하다니, 화류계 여자로 어쩌면 평생을 수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당장 김 부사 앞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고도 싶었으나 부모가 한성 교방에서 미리 받아 쓴 돈을 갚기 전에는 이 마당에 와서 무턱대고 거역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계심의 몸 안에는 사랑하는 낭군 김 부사의 씨가 꿈틀거리고 있는 처지였다. 그날 밤 마지막으로 김 부사 품에 안겨 온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운 계심은 이튿날 퉁퉁 부은 얼굴로 한성길에 올랐다. 안타깝고 쓰라린 이별이었으나 차마 그 같은 심정을 겉으로 내보일 수고 없었던 김 부사는 그저 고을 백성들이 눈에 띄지 않는 자기 처소 담장 안에서 멀리 사라져 가는 계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김 부사가 계심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인정이었다. 계심은 몇 달 만에 다시 기적에 올라 가무와 웃음소리에 몸을 섞어 술을 따르고 억지 교태를 부려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야했다. 그러나 몸은 항상 청상청루 천한 자리에 섞여 있어도 그녀의 청결하고 유정한 마음은 향리에서 손님을 대하듯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처럼 단정하게 갖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그머니나...... 이게 뭐야?" 어느 날 기방에서 옷을 갈아입다 같은 방을 쓰던 기녀가 방바닥에 떨어진 계심의 장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머, 이건 장도칼 아니냐?" "응, 장도칼하고 약. 이리 줘, 언니." "에게게, 이런 걸 가슴에 품고 다니는 걸 보니까 너 아주 예사 계집애가 아니로구나. 여차하면 이 칼로 사내놈을 찌르고 약을 마시고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말을 건넨 기녀는 그만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고 놀랐다. 실상 계심은 제 몸에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그 약과 장도칼을 써먹을 작정이었다. 이 같은 계심의 단심은 곧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 기방 기녀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심은 자기의 몸을 늘상 경계하고 도사려 오는 만큼 짓궂은 사내들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고, 그 때마다 지극한 사랑과 고매한 인품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던 김 부사와의 기나긴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앳된 계심을, 게다가 마음씨마저 남달리 곱기로 소문난 계심을 한성의 한량이나 불량배들이 가만히 놓아 둘 턱이 없었다. 그들은 계심의 주위를 에워쌌다. "옛다 돈. 나하고 하룻밤 정염이나 불태워 볼거나?" 숫제 동전 꾸러미를 쩔래쩔래 흔들어 보이기부터 하는 부류에서 시작하여 쇠도둑놈 같은 구릿빛 몸으로 접근해 오는 축, 아니면 골샌님처럼 의젓한 풍모를 앞세우고 슬며시 전담 문서를 치마폭에 싸주는 애송이에 이르기까지 계심을 소유해 보려는 사내들은 꼬리를 이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까 마침내 불량한 사내 몇 놈은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양으로 야심한 밤에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었다. "버릇없고 콧대 높은 년! 얘들아, 저 년의 사지를 강아지 새끼 네 다리 비끄러매듯 꼼짝 못하게 비끄러쥐고 옷을 벗겨라!" "예이!" 불량배들은 계심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맡아 쥐고 옷을 벗겼다. " 이놈들! 이 손, 이 다리 놓아라!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난 홀몸이 아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두목인 듯한 자는 한 손으로 계심의 머리채를 잡고 한 손으로는 허옇게 드러난 유방을 주물러 대며 야욕을 채웠다. 두목이 물러나자 불량배들이 차례로 덤벼들었다. 계심은 이제 항거할 힘도 없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조를 강탈당하고야 말았다. 야욕을 채우고 불량배들이 물러가자 계심은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리며 물에 빠진 귀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일로 계심은 몸 안에 든 아기가 떨어지고, 김 부사에게 커다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윤간당했다는 이 부끄러운 마음과 씻을 길 없는 수치심, 게다가 김 부사와의 사이에 가진 뱃속의 아기까지 낙태되자 그녀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죽어 버리자. 죽어서 이 씻을 길 없는 부끄러움을 씻어내자.' 계심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첫 정을 주었던 춘천의 김 부사에게 유서를 써 놓고 그녀는 가지고 있던 손 장도를 꺼내었다. '불량배들한테 잡혔던 머리칼, 그리고 이 젖가슴.' 그녀는 먼저 머리를 잘라 내고 뒤이어 젖가슴을 차례로 도려 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뒤 김 부사가 계심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밤의 꿈속이었다. 가뜩이나 계심이 떠난 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던 김 부사는 흐트러진 산발의 미인이 꿈속에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놀랐다. '아! 너, 너는......' '계심이옵니다, 사또마님.' 자세히 보니 계심은 벌거벗은 몸이었고 젖가슴이 칼로 도려져서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계심아, 네 모습이 그게 무엇이냐? 어쩌다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으흐으으, 사또마님. 폐일언하고 소첩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시어요. 네? 사또마님.'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애소하는 계심의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무슨 악귀와 같았다. 꿈에서 깨어난 김 부사는 그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날이 밝기가 바쁘게 서둘러 한성으로 달려갔다. 계심의 머리가 잘리고 젖가슴이 도려져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김 부사는 유서에 씌어 있는 내용대로 불량배들을 즉시 관가에 고발하고 계심의 시신을 거두어 춘천으로 운구, 봉의산 언덕에 묻어 주었다. 계심의 순절담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춘천 순찰사 이 사또의 심금을 울렸다. "허, 계심의 절개가 가상쿠나, 내 이를 혼자 듣고만 있을 수 없으니 중앙에 알려 정문을 세우도록 하리라." 순찰사는 속으로 계심과 같은 어리고 절개 굳은 기녀를 외처로 차지하고 살아 보지 못한 것이 섭섭한 노릇이었으나 그 같은 얄팍한 생각을 접어두고 마음먹은 대로 중앙에 알려 계심의 집에 정문을 해 세웠다. 순찰사가 그런 식으로 계심의 영혼을 위로해 주자 이번에는 그 고을 군수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군수는 고을 선비 몇몇과 회동하여 봉의산 언덕에 있는 계심의 무덤에다 비석을 해 세우라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21년 5월에 "춘기 계심 순절지분"이란 돌비석이 계심의 무덤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박종정이 비명을 짓고 유상륜이 글씨를 쓴 자그마한 이 기념비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어지러운 성 모럴에 커다란 교훈을 던져 주게 된 것이다. 아니, 실상 계심의 높은 정절담은 현대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춘천의 제1회 개나리 문화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서 춘천 시내 접객 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켜들고 시가 행진을 벌였던 일이 있었으니까 분명코 계심은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된 여인임에 틀림이 없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전환기의 갈림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 도현철(연세대강사) 고려 후기 사대부 앞에놓인 두길 조선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 후기 사대부는 정치적 행보가 달랐다. 우리 나라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 전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 이승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성씨 문중에서 흔히 자랑스런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도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절의를 다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도덕에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고려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정도전과 조준, 그리고 윤소종 등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권세가를 비판하고 정적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자학이라는 신사상을 이념으로 받아들이 사대부들이 고려말이라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 쪽은 고려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한 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 개혁을 하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뉘어지고, 궁극에 가서는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대부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리 사대부에게는 정치. 경제 운영에 대한 견래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누가 정치 운영의 주체가 되느냐, 인재를 어떻게 선발하느냐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색. 정몽주 등은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와 좌주문성제에 찬성하였다. 음서제란 조상이 끼친 음덕으로 그 후손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특별한 공이 없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이고, 좌주문생제란 과거에서 시험관인 좌주와 문생이 뒤에도 부모. 자식 관계처럼 돌봐주고 받드는 관습이다. 이색은 15살 때 아버지의 음덕으로 별장이 되었고 이색 계열의 한수. 우홍수 등도 음직을 받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음서제를 실시하면 고급 관리의 자손은 어려서부터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다른 관리들보다 고위직에 빨리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좌주문생제에도 찬성하였다.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색은 좌주와 문생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보고 그들 사이의 사적인 은혜와 의리가 국가의 원기를 배양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음서제와 좌주문생제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권세가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다른 사적인 인연도 없었다.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좌주문생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윤소종은 이승인. 권근 등과 더물어 이색의 문생이었으나, 이승인. 권근이 우왕. 창왕대에 요직에 있었던 것과 달리 윤소종은 향리에 내려가 있거나 한직에 머물렀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는 공민왕 20년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종 9품 벼슬에 9년간이나 머물러 있어서 장인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좌주문생 관계를 “공적인 선발로서 사사로운 은혜를 삼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경제제도 측히 토지제도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에서 방법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요즘처럼 화폐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는 방법도 요즘과 달랐다. 국가는 토지 주인에게서 생산물의 일정량을 토지세로 거두었는데, 관리들에게 그들의 지위, 직책에 따라 규정된 토지의 세금을 거둘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준 토지를 사전이라 한다. 관리 개개인이 토지 주인에게서 직접 토지세를 거두어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인정변 이후 토지제도 운영이 법대로 되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은 사전을 자손에게 불법적으로 세습시키고 힘없은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서 규정 이상의 토지세를 3- 4번, 심지어 8- 9번까지 내기도 했다. 그 결과 농민 생활이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대하여 이색과 권근 등은 농민이 곤궁하게 되는 이유가 하나의 토지에서 1년에여러 번 세금을 거두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농민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전 주인을 규정대로 잘 가려서 1년에 한 번씩만 세금을 거두면 된다고 하였다. 반면 조준 등은 관리들에게 사전을 나누어 주는 제도 자체를 혁파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사전을 전부 없애고 경기에만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다시 분배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관리 개개인이 농민에게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전을 축소하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수취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수조권에 의한 중간 수탈을 없애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의 경제적 이해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사대부들은 지배층이고 대개 지주였지만 그들간에는 차이도 컸다. 이색과 같은 수성파 사대부는 상대적으로 경제 생활이 윤택했다. 이색은 한산. 면주. 여흥. 광주. 덕수. 장단. 개경과 유포. 적제촌 등 10곳에 토지를 소유하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토지와 자신이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이 있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까지 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 100결, 노비 10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중소 지주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대토지소유자이자 중앙 정계의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으로서 과거나 군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서 봉급마저 지급되지 않았고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조차 권력자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정도전은 우왕 초에 나주 지방의 거평부곡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선향인 영주와 생가인 삼봉을 왕래하면서 4년을 보냈으며, 그 뒤에 유배가 완화되어 서울 근교에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띠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였다. 그의 부인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하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고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 때 그 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 입신양명하여 처자가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나라 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욕스럽게 되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며,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은 흩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도전은 사대부였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두 파 사대부의 사상적 차이 이 시기 사대부가 정치 현장에서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사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유학자로서 주자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하였다. 원래 유교의 예를 구성하는 원리로는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친친과 인위적인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존존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앞의 것은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간계를 설명하고 혈연에 의한 인정이나 사사로운 정감을 중시한다. 뒤의 것은 혈연보다 인위적이고 2차적인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계를 설명하고 공공성을 강조한다. 이 두 측면은 결합되어 있지만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수성파 사대부능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 요서 지방을 방비하던 조포라는 관리가 있었다. 이민족이 침입하여 어머니와 처자식이 인질로 잡히자 이민족을 공격하여 격퇴시켰으나,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하여 이색의 아버지인 이고은 조포가 ‘어머니를 죽이면서도 공적을 세우는 것이 충이라는 것만 알았지 자신을 보전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효라는 것을 몰랐다’라고 비판하였다. 자신을 보존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조포는 관직을 버리고 인질로 잡힌 어머니를 구해 은둔하여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공적인 관계, 혹은 군신 관계보다는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대의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색의 제자인 이승인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시험관이 되었다. 그 이유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생전에 아들의 영화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상중에는 벼슬에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이 명령하는 경우에만 벼슬할 수 있었지만, 이승인은 이를 어기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이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효자의 마음, 곧 혈연에 입각한 인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는 주자학을 통하여 국가의 공적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춘추) 의 ‘대의는 부모, 자식 관계에 앞선다’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하여 공적 의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혈연 가문을 중시하는 음서나 인적으로 결합하는 좌주문생제를 비판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차이점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군신관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냐 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색 계열의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견지했다. 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비유된 인간 관계, 불변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연 관계로 비유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 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군신 관계를 어떠한 여건에서도 받아들이고 지키려 하였다. 선왕인 공민왕의 말에 복종해야 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주자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하였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에 나오는 천명사상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역설하고,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동양 고대의 대표적 성군이라는 탕 임금이나 주나라의 무왕을 이상군주로 제시하였다. 혈연으로만 보증되는 군주상에 만족하지 않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는 군주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분에 맞는 정통의 군주를 원하게 되고 이에 어긋난다면 이를 정정하고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에 비춰볼 때 우왕이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명분에 맞지 않은 우왕과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물러나게했다. 나아가 명분에 맞는 군주의 즉위와 새로운 군신 관계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명분론은 혈연을 기조로하는 고려의 예론과 배치되므로 고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를 부정하는 논리가 나왔던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도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새 왕조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유도 사상적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충신과 공신의 차이 조선왕조는 개국 11일 만에 고려말에 당을 만들어 반란을 꾀했다고 하여 이색, 우현보 등 56명에게 죄를 주었다. 그리고 두 달후 정도전, 조준 등 44명을 개국공신으로 임명하였다. 충신과 공신이란 하나의 500년 왕조가 망하고 다른 하나의 500년 왕조가 들어서던 정치적 격변기에 사대부들이 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길이었다.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했든,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은 자기네의 이념에 충실하게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때론 목숨까지 버리면서. 강남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같은 사상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빛깔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런 빛깔의 차이는 때로 커다란 변혁의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빗속에서의 기다림 중학교 삼년 동안 그 친구와 나는 칠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그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도 변함없이 늘 함께 다녔다. 자전거를 나란히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삼학년 겨울 무렵 나는 그만 내 재산 목록1호인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학교와 온 동네를 뒤지며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당시 가정 형편상 새 자전거를 구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낙심해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 친구는 자신의 자전거로 같이 통학하자고 했다. 그 뒤 나는 친구의 자전거를 함게 타고 다녔다. 친구는 매일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우리 학교 정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고, 또 수업을 마치면 나를 태우러 다시 들렀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아침 저녁 늘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수업도 조금 일찍 끝났다. 학교 정문에 나가 보았지만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한 십여 분 기다리다가 그냥 뒤를 돌아보면서, 자전거가 보이기만 하면 친구가 아닐까 싶어 내 앞을 지날 때까지 서 있곤 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옷은 빗물에 젖어 차갑고 축축했고, 가방이며 신발도 온통 빗물로 범벅이었다. 집에서 한참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한 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내가 비맞고 그냥 걸어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버스라도 타고 가지 그랬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김춘수 님/전북 남원시 주생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7 - 독일관념론의 종언: 헤겔의 사망(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0년: 스탕달, "적과 흑"발표: 영국 차티스트 운동 1832년: 영국의회, 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베를린 자유대학 먼저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헤겔은 새로 창간되면서 학문과 사상계의 중심지로 떠오른 베를린대학의 철학교수로 초청을 받게 된다. 독일의 모든 대학은 국립대학인 셈이다. 지방자치제가 일찍 형성되었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말하면 주립대학인 동시에 국립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베를린대학은 국립이나 왕립대학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신흥학문의 본고장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헤겔은 관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베를린 대학의 초청을 받은 헤겔은 철학과의 중심교수가 되었고, 철학과의 중심교수는 교수중의 교수로 군림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철학은 학문중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교수로서의 존경과 명예를 함께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강의실에는 대학생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참여하는 상황이 되었다. 독일대학의 제도에 따라 수업도 좋아졌고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물론 일부 교수들로부터 어용교수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지나칠 정도의 높은 정신적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난해하고 중복되는 지루한 강의에 열성적으로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시의 한 풍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려운 체계를 만드는 것이 훌륭하다는 독일적 사고풍토였을지 모른다. 헤겔이 프랑스나 영국에서 그런 강의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음에 틀림이 없다. 헤겔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무렵, 정확히 말하면 1831년 여름에 독일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그 당시의 콜레라는 전체 인구의 몇분의 1씩을 희생시킬 정도의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헤겔의 가족들은 콜레라를 피하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있다가 병세도 자취를 감추게 되고 새로운 가을 학기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강의준비를 갖추고 개강이 되었을 무렵 헤겔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의사들의 정성어린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겨자를 전신에 바르는 치료법도 있었던 모양이다. 병세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결국은 헤겔이 불행하게도 그 해 콜레라의 마지막 희생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헤겔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베를린 대학과 철학계에 커다란 파문은 몰고 왔다. 철학계의 최대의 거목이 사라진 것 같은 여파가 일어났던 것이다.헤겔이 죽은 뒤 베를린 대학은 그 큰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다가 헤겔의 선배인 셸링을 초청하였다. 셸링은 아직 50대 후반기의 한창 원숙된 학문적 활약기였기 때문에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셸링은 큰 기대에 부풀어 베를린대학으로 부임했다. 그러지 않아도 후배인 헤겔에 대해 뒤떨어졌다는 생각때문에 불안을 안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헤겔로 끝나 있었다. 셸링의 강의는 헤겔보다도 더 일찍 끝장난 과거의 철학같은 인상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기대감은 좌절되었고, 모두가 셸링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때는 이미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셸링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올센과의 사랑의 괴로움을 안은 채 베를린에 들러 셸링의 강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철학에 관심을 보였으나, 곧 실망해 코펜하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헤겔의 죽음은 독일 관념론의 종언인 동시에 세계철학사의 커다란 종착역을 만들어놓았다. 플라톤부터 시작되었던 철학의 큰 흐름이 이미 끝을 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헤겔과 더불어 근대철학은 끝났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세계철학사의 가장 높은 산맥이었던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시작되어 1831년의 헤겔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꼭 반세기에 걸친 철학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칸트는 나귀와 같이 조용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많은 철학의 짐을 지고 출발했었다. 피히테는 호랑이와 같이 날쌔게 달리는 성격이었다. 셸링은 달리는 말과 같이 빨리 질주해 주어진 시대를 장식했다. 그러나 헤겔은 소와 같이 느리게 시작했으나 누구보다도 많은 짐을 지고 목적지에 도달한 격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철학자들은 중간의 피히테나 셸링보다도 헤겔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칸트가 아니면 헤겔을 택하는 것이 철학도들의 공통된 선택과 같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물론, 일본의 철학원로들이 양자택일을 하는 추세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철학도들도 둘 중의 어느 한사람에게 추종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헤겔 100주기와 최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헤겔연구에 뜻을 모으게 된 것이 사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딴따라패'는 영어 'tantara'의 음을 빌려 온 것 요즈음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연예인들을 '딴따라패'라고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전에는 곧잘 '딴따라패'라고 얕잡아 부르곤 했습니다. 언뜻 들어도 '딴따라'가 나팔 부는 소리와 같아서 연예인들의 행동을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었습니다. 옛날의 풍각쟁이들처럼 그 행렬의 앞에서 북치고 장구치는 사람들을 연상했을 테니까요. 이 '딴따라'가 우리 국어의 의성어에서 온 것 같지만, 실상은 영어의 의성어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의 'tantara'의 음을 빌려 온 것이지요. 나팔이나 뿔나팔 등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소리를 빌어 와서 '딴따라'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국어의 의성어 '딴따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국어에서는 '딴따라'라는 의성어는 없습니다. 이처럼 의성어는 언어마다 유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어에서 'flag'는 '깃발'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국어의 '펄럭펄럭'을 연상시키지요? 물론 영어의 'flag'는 의성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파스칼과 병의 선용 파스칼 [Pascal, Blaise] - 1623.6.19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 1662.8.19 파리. 블레즈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그리고 발명가이기도 하다. 39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면서 그것도 만년의 4년간은 병상에 누워지냈는데 그토록 여러 가지 일을 그는 해냈다. 10대에 벌써 그는 <음양론>과 <원뿔곡선론>을 써서 당시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컴퓨터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계산기를 발명한 것은 18세때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이며,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로 유명한 <팡세>의 저자로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파스칼은 크리스트교가 얼마나 훌륭하고 참된 종교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팡세>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회심을 결행한 것은 31세 때였다. 파스칼은 신의 계시와도 비슷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몹시 고양되어 그 날짜를 1654년 11월 23일 밤이라고 밝히고 감격한 내용을 적어 평생토록 옷속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회심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 철저한 금욕생활과 수도생활을 하였다. 모든 시간을 성경을 읽는 데에 바치고 일체의 쾌락을 포기하며 음식까지도 생존의 기본으로 제한하였다. 누군가 맛있다 는 이야기를 꺼내면 화를 내면서 관능에 빠지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오직 금욕과 신앙을 높이는 것만이 그의 목표처럼 보였다. 파스칼은 그의 유언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시기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 을 자주 서술하며,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불사(영생)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스칼은 계산기 발명에 너무 골몰해서 18세부터는 몸에 고통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심한 두통, 소화불량, 위의 통증, 다리 저림, 변비 등 그래서 의사는 아무 일에도 열중하지 말고 특히 머리 쓰는 일을 삼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죽음의 병석에 누워서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상과 생각을 손수 종이에 쓰기도 하고 또 조카나 하인에게 그것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는 병의 선용 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바쳤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섬기게 하려고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세속적으로 썼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 저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병을 보내 주셨습니다. 부디 제가 성급하게 이 병을 사용해서 당신을 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소서. 파스칼에 있어서 죽음이란 영원한 삶의 입구 이므로 그에게는 무서워 할 것이 못되었고 오히려 병은 환영해야 할 것 이라고 그는 말했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 그는 이 통증조차도 선용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죽기 4년 전, 심한 치통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파스칼은 전부터 마음에 걸려 있던 수학문제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룰렛 이론 혹은 상크로이드 이론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원이 직선 위를 구를 때 그 원주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궤적을 구하는 문제였다. 밤을 지새워가며 그가 이것을 풀었을 때 치통은 완전히 기시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인은 장결핵이라고도 하고 혹은 전신에 퍼진 암이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것을 참는 파스칼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마음 아파했다. 그때 파스칼은 제발 나를 동정하지 마시오. 병은 그리스도안에게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병은 도리어 사람에게 고통을 견디고 모든 안락과 오관의 즐거움을 끊게 하며 죽음을 기다리면서 야심도 욕심도 없이 인간에게 일생동안 따르던 모든 정욕을 끊을 수 있게 한답니다. 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여러분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심한 두통과 복통 끝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1662년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1.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 일반적으로 중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말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이 성장해 있었고 이에 따라 노동자 파업, 인력 시장의 형성 등의 현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6,7세기 특히 명말청초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산업 발전이 꽤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양자강 하류 지역에는 직물 수공업이 성행해서 소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위에 무수한 중소도시들이 연계돼 있어 직물타운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면화 재배, 씨빼기, 방적, 방직 등의 공정이 분화되어 있었고 상인 자본이 전체 과정을 통괄했다. 소주의 경우 직기를 수대에서 수십 대까지 가진 직물업소가 1만여 곳이나 되었고 이들은 직공, 무늬공, 염색공 등 분야별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렇게 고정된 일터를 마련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에 수십 명씩 모여 각 기능별로 정해진 다리 밑에서 직물업자가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일종의 일용노동 시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세계 학계에서는 이를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성립`,`자본주의의 맹아`로 보는 설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명재상 장거정이 죽은 뒤 환관들이 득세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들은 전국의 요로마다 징세관을 파견하여 오가는 상인들에게 상세를 강제로 징수했고 도시의 직물업자에게도 직기의 수에 따라 과중한 세를 물게 하여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1601년 마침내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는 직물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발생했다. 환관이 파견한 징세관 손융은 소주의 6개 성문에 각각 세관을 설치하고 기타 교통의 요충지에서도 상세를 강제 징수했다. 이 때문에 미곡상등 상인들은 소주에 발을 끊었고 모든 물가는 폭등했다. 소주 시내 상업은 마비되고 직물업소의 폐업은 속출하고 직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6월 6일 마침내 소주 시내의 직물 노동자들은 직장을 빠져 나와 거리 시위를 벌이다 손융 일파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손융과 결탁해 사리를 꾀한 그 지역 거부인 정원복의 집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정부는 상세의 폐해를 시정할 것을 약속해 폭동은 가라앉게 된다. 사건 수습과정에서 직공으로 자처하는 갈성이라는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스스로 사태의 주모자로 자처하며 중형을 청했다. 이에 책임 추궁은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의 의리에 감동한 소주 시민들은 그를 갈장군이라고 칭송했다.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띤 이 중국 최초의 노동자 파업과 시위에서 직물 노동자들은 시종 정연한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투쟁은 당시 소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지역 관리와 지식인들의 지원도 직,간접으로 받았다. 그러나 강남 지역(양자강 하류)을 중심으로 싹을 키우던 자본주의적인 경제 활동은 1644년 이민족인 청의 북경 점령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청은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지역을 불온시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이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가문이 주된 표적이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만약 청의 침입이 없었다면 17세기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상당히 진전되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13.신 고 립주의는 미국을 붕괴시킬 것이다 1) 저속한 보도관과 도덕적 기준 없는 보도의 자유 1994년 제16회 월드컵 축구경기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이다. 억 단위에 이르는 축구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푸른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숨막히는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거의 모든 방송국의 카메라가 사라져 버렸다. 미국 경찰이 '심슨 체포작전' 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헬리콥터, 경찰차, 고속도로등등으로 화면이 메워져. 텔레비전에 비춰진 장면은 마치 흔히 보는 할리우드영화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뉴스였다. 미국 시민들 마음속의 영?이고 특히 흑인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한 심슨이 살인혐의로 수배되어 체포 직전에 도주한 것이다. 그래서 축구는 갑자기 하찮은 일로 전락해 버렸고 전미국인에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이를 통해 나는 미국에서 말하는 보도의 자유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를 나타내는 비유가 하나 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바로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 없었던 사건이 발생하면 이는 곧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미국의 보도실태와 그와 관계된 문화적 배경 및 그들의 국가의식을 곰곰이 살펴보면, 보도의 자유라는 신성한 낱말은 미국의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보도관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속한 보도관의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도덕적 판단능력을 상실한채 사회적 책임감도 없이 추문을 캐낸 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과장보도를 일삼고,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사물을 판단하여 바깥 세상과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 외에 더욱 심각한 것은. 공리주의로 부추겨 가볍게 허위사실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이미 체포된 그 유명한 우편물폭탄 살인범이 {뉴욕타임즈} 등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논리를 기사화하라고 협박하였고, 이에 신문사측은 어쩔수 없이 보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그의 주장을 기사화하였다. 이런 식의사실을 왜곡하는 자유는 정말 가공할 것이다. 이 보도는 사실 따지고 보면 자유로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공갈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뉴욕타임즈}가 이런 결정을 한 순간 이미 신문사가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공의와 신념은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테러리즘을 질책하거나 그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강력한 의지는 이제 냉정한 조소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변명하더라도 {뉴욕타임즈}는 그 순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테러리스트들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된것이다. 스캔들을 찾아 그 스캔들을 더욱 크게 부풀리는 일은 미국에서비일비재하다. 언론의 감독기능이란 말은 신성한 단어에 불과한 것이고 대부분 미국 기자들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성추문으로부터 폭력,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캔들에 대한 대대적 보도는 판매량. 시청율, 지위, 명성등과 직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도와 살인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꾸며 쓸 뿐이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 따위는 필요할 때나 들먹이는 낱말에 불과하게 되었다. 다른 문제점은 미국인은 그들 자신 혹은 미국의 가치관을 지상 최대의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망언하며 유언비어를 날조하기도 하고 제멋대로 명령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대다수는 중국에 와 본 적도 없으면서 중국의 인권탄압에 대해 비판하며,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받은 공물이 대부분사람가죽과 뼈로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그를 비폭력주의자로 떠벌이고 있는 것 따위이다. 또한 {뉴욕타임즈}는 테러리스트에게는 머리 숙여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돌아서서는 중국에 대해 이를 악물며 거만하게 '우리는 왜 중국을 제재해야 하는가?'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중국은 테러리스트들처럼 '헛수작 마라,가만두지 않겠어'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 본단 말인가? 미국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공리주의는 이 나라를 망가트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 언론계의 선동은 이 나라를 더욱 빨리 무너지게 하고있다. 7살의 미국 소녀 제시카는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기보다는그 부모가 실현하고자 했던 소위 '미국정신'이라는 것과 미국 언론계가공모하여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시카가 비행기로 창공을 날아 세계최연소 비행기록 수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의 매스컴들은 떠들썩하였다. 특히 3대 Tv 방송국은 앞장서서 미국인의 생활을 억지로 이벤트행사 속에 몰입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그러나 그들은 만 16세 이상이 되어야 항공기면허를 받을 수 있다는 법적기준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말하면 전미국을 놀라게 할 비행은 불법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사건발생 후 미국연방 항공국의 관련 인사는, 기술적인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제시카는 그저 한 명의 승객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소위 '세계 기록에의 도전'은 날조된 개념이고 항공기 조종의 관점에서 보아도 제시카가 한 행위는 어떤 효력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극은 결국 발생하고 말았다. 비행하기 전 꽃처럼 예쁘게 웃던 7살의제시카를 우리는 보았다.그러나 얼마 후 우리는 Tv 화면을 통해 비행기날개가 떨어져 나가며 땅으로 곤두박질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우리를섬뜩하게 만든 것은 제시카의 어머니 하피웨어 여사가 사건발생 직후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내 아이가 편안하게 죽었기를 바람니다'라고 한 말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도대체 7살된 어린아이가 어떻게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가 매스컴에 의해 극도로 부풀려진 허상의 '국가정신'이라는 이름 아래서 살해당한 것이다.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인권에 대한 잔악한 약탈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제시카가 성공하여 순조롭게 워싱턴까지 날아가고 클린턴 대통령의 만찬에 초대되었다면 역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되어 직접적으로 Tv 시청률을 상승시키고 신문판매량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사 우두머리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만약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청률과 판매량은 역시 상승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사 우두머리들은 역시 짭짤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2) '미국이 곧 세계'라는 허튼소리 이 두 번째 제목의 서두도 역시 1994년 월드컵 축구대회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전세계 수억의 축구팬들이 녹색 필드의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한 권위 있는 여론조사기관이 주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조사한 결과 60퍼센트의 미국 성인들은 인류의 대전 월드컵이 자기 나라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미국인이 얼마나 이 세계적인 스포츠를 배척하거나 멸시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과이다. 그들은 국제축구연맹에 영향력을 행사해 축구경기를 여섯 라운드로 나누어 매 휴식시간마다 광고를 내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개혁'안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세계적인 빈축을 산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인이 이렇게 열심히 벌이고 있는 그 '총명'하고도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판촉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미국인의 심리상태를 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있다. 그들이야말로 국제적 감각의 결여로 생겨난 만용으로 인해 '내가곧 세계이다'라는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땅창은 미국 대학생의 미국 역사에 대한 이해정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중국의 고등학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국민의 높은 역사의식 수준은 인류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그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고립주의'라는 것이 처음에 국가정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힘을 집중하고 있는 '신고립주의' 는 먼저 미국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사회에서 아무리 먼저 강성해진 민족이라 할지라도 세계적인 관심거리조차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지식 빈곤의 위기를 무시하기만 한다면 그 민족은 세계적 경쟁에서 낙오되는 쓴맛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 위에 군림하는 대국의 충동질을 받고 있는 나라들이 내심 기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토끼는 여전히 '특대호 슈퍼강대국'이라는 그늘 아래서 졸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이미 탐구하는 월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온 정력을 아이들처럼 노는 데만 쏟고 있다. 미국의 어른이나 아이들이 모두 유희를 즐기는 것을 보면 인류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아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얻게 되는 쾌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결국 축구의 득점차가 많지 않은 것이나, 잦은 무승부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추구하는 양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잔인한 징벌의 방법은, 고임금의 맛을 보게 하여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해 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을 대폭 인하해 버리고는 이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미국인들의 마음속은 부유한 사회와 초강대국의 동위원소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임금이 갑자기 곤두박질 치려는 순간에 와있다는 전조이다. 신고립주의와 구고립주의의 공통적 특징은 미국의 사상과 타국의 모든 것들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골목대장으로 여기면서 가장 가까운 맹방들을 대하고, 이들과 협조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우월감을 드러내며, 아주 하찮은 것까지도 꼼꼼히 따져 다른 사람의 공로를 빼앗기도 하는 구고립주의의 작태를 보여 주고 있다. 스웨즈운하의 위기 때도 미국인들은 맹방 영국의 등을 쳐서 전통적인 이익을 차지하고 말았다. 미국은 위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성품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인의 지혜와 원대한 영웅심이 전면적으로 후퇴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의 위대한 역사까지도 배척하는 추세에 놓여 있다. 그들은 내부개혁의 울부짖음을 '우리는 일하지 않고 얻길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호기심과 동성애 및 각종 기호에 관심을 가져 주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라는 하나의 소리로 모으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속박을 벗고 미래로 달려가는 우선 목표라고 한다. 그들은 자만하여 외부의 모든 문제는 미국과 모조리 무관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미국의 모든 것은 세계 각국의 미래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국사회의 모든 사건은 세계의 톱기사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위쉐어라는 미국의 종교지도자는 '미국 국민은 세계문화와 대화할 가능성까지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미국의 낭패는 시간문제일 뿐이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이것으로 나의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산울림 사소한 일로 형이 동생과 싸웠다. 그걸 보고 어머니가 형을 야단쳤다. 어린 동생을 귀여워해 주지는 못할망정 때리기는 왜 때리느냐고 나무랐다. 분을 참지 못한 형이 집 뒷산에 올라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쳤다. 앞산에서도 "나는 너를 미워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말했다. "엄마, 산너머에서 누군가가 내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 지르는 아이가 있어요."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말이야. 다시 산에 올라가서 이번에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한번 소릴 질러 봐." 아이는 다시 뒷산으로 올라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앞산 너머에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기뻤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자꾸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글터 → 이글저글 태양에너지는 오늘날에야 비로소 개발되어 생활에 응용되고 있다. 고대에 처음 그것을 이용한 사람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아르키메데스로서, BC214년 로마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수많은 거울로 햇빛을 한 곳에 반사시켜 로마군들의 배를 불태웠다.가솔린은 일정한 냉동온도가 없다. 보통 영하 82-116℃에서 냉동되는데 실험실 밖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없는 온도이다.1초에 600,000,0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영국인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 카메라의 이름은 아마콘 675이다.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 부부는 특허를 내지 않은채 평생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라듐은 세계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이익을 얻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95년에 X선을 발견한 독일 물리학자 륀트겐도 특허를 내지않고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토머스 에디슨은 사후에도 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기계를 발명하여 1920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잡지에 발표했다. 그는 또 전기, 영사기, 축음기 레코드, 전기 펜, 철도 신호등, 왁스 종이, 축음기, 합성수지, 밧데리, 자동 전송기, 딕 레이팅 머쉰, 등사판 기계, 라디오 진공관, 전기 소켓트, 포트랜드 시멘트, 광석분쇄기 등 1,000가지가 넘는 발명을 했다.소련 태생 물리학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화학 교수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이며 성경 주석학자이다. 그는 1992년까지 280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는 단 한권도 없었다.세숫대야 하나에 차는 물로 170평방킬로미터의 넓은 지역을 뒤덮는 15미터 두께의 안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