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30 06:08 【독서편지】: 제 73 호 風磬 조회 수 8,762 추천 수 17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3 호4339.11.30 (10.10)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것.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인가, 시인인가, 송도 삼절인가 - 황진이 개성 병부교 다리밑. 때는 마침 초여름이어서 다리 밑에서는 빨래하는 처녀 두셋이 부지런히 방망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빨래터에는 진현금만이 남아 몇가지 남지 않은 빨래를 헹구고 있었다. 그 때 병부령 다리 위를 지나가던 청년 묘랑이 다리 밑의 현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가뜩이나 녹작지근한 날씨에 훌훌 옷을 벗고 목물이라도 끼얹고 싶던 현금은 청년의 눈웃음에 짜릿한 흥분이 일었다. 일단 나귀를 타고 사라졌던 청년은 이튿날 그 시가에 다시 나타나 또다시 눈웃음을 던졌다. 현금은 청년의 유혹을 받고 가슴이 뛰었다. 청년은 나귀를 다리 난간에 메어 두고 아래로 내려와서 현금의 앞에 마주섰다.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나 물 한 바가지 마시세." 하고 말문을 열었다. 현금은 우물로 가서 물을 떠서 청년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바가지를 돌려주며 청년은, "어, 시원하구나!" 하고 뇌까렸다. 양반집 자제 같은 풍모와 그 서글서글한 외모에 반해 현금은 청년을 사모하게 되었다. '다리 밑의 인연'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였다. 청년은 개성에서도 유명한 황진사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어갔다. 이와 같이 다리 밑의 밀애를 거쳐 태어난 아기가 바로 황진이였다. 황진이나 그의 어머니 현금은 그러나 이미 그들 생애에 슬픈 숙명을 안고 태어난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진이의 아버지 황진사처럼 그들 신분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금은 곧 황진사의 첩이었고, 황진이는 이를테면 첩의 딸이었다. 현금. 진이의 어미 현금은 다리 밑의 인연으로 얻은 딸을 그나마 양반의 씨라고 애지중지하여 키웠다. 어미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다. 진이는 여덟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열 살에는 열녀전을 읽었다. 사서 삼경을 익혔고 시서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지식과 정서 양면을 두루 갖추었다. 게다가 거문고 가락에 흥을 돋우어 감성의 폭을 넓혀 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황진이의 재주는 인근 마을에 널리 알려져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찬탄하다 못해 흠모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은 먼 발치로 진이의 아름다운 용모를 한 번 보고는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어 버렸다. 죽은 청년을 실은 상여는 마을 젊은이들에 의하여 운구되었다. 그러나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 소리에 의해 운구되던 상여는 진이의 집 앞에서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이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어 청년의 관곽 위에 얹어 주었다. 그제서야 상여는 땅에서 떨어져 그 슬픈 만가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그 때부터 황진이는 인생을 깨달았고, 사랑의 번뇌를 알았다. 그녀는 마치 죽은 마을 청년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진이는 자기로 말미암아 청년이 죽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그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내 아름다움 때문에 청년이 죽었으니 나의 미모가 그를 죽인 셈이다. 내가 이 미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가는 또 다른 젊은이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이는 그 같은 생각 끝에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되었다. 그 뒤부터 세상 사람들은, 황진이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를 사랑하게 이르렀다. 그 당시 엄수란 사람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악단에서 늙었는데 그만치 당대의 "미모도 많이 보았고 음률도 잘 알지만 황진이를 보고서 인간 세계에 선녀가 내려왔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세상에 이런 절조가 또 어디 있겠느냐" 고 경탄했다는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개성적인 미모, 온몸에 젊음과 정열이 한창 무르익은 방년의 여인이 기계에 나타나자 진이는 송도 화류계의 꽃이 되었다. 뭇사내들은 진이 앞에 나타나 술과 시와 거문고 놀이 하기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알았으나 진이 마음에 꼭 들어 그녀의 사랑과 예술을 깡그리 바칠 만한 멋쟁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진이는 오만하고 도도해져 갔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남성들이 그녀 앞에서는 쪽을 못 쓰고 빌빌거렸다. 그녀는 남성들을 마음껏 시험하고 싶어졌다. 때로는 농락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모와 무르익은 육신, 빼어난 문장력에도 굽히지 않는 남성이 나타나면 마음껏 그와 함께 타오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싶기도 하였다. 남성 시험 첫 상대로 그녀는 지족 선사를 택하였다. 지족 선사,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는 스님이었다. 진이는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 생불을 어떻게든지 유혹해 불 계획이었다. "스님 계시옵니까?" "......" 조용한 산골의 암자에서 만 가지 상념을 떨쳐 버리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지족 선사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나타나자 몹시 당황해하면서 안으로 안내하였다. "스님, 스님께선 득도하신 분이니까 중생의 번민을 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진이는 요염한 얼굴에 우정 수심이 가득하여 지족 선사의 두 눈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 지족 선사는 선뜻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진이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스님, 인간사는 허무한 것 같습니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로 느끼셨소. 인간사는 허무하오." 진이는 다시 남자 이야기를 꺼내었다. "스님, 이 몹쓸 계집 때문에 상사병이 나서 죽은 총각이 있었나이다. 나마들은 예쁜 여자를 못잊어 하다 죽는 수도 있나이까?" "예, 어흠. 나무 관세음보살!" 지족 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과연 저런 미모면 상사병이 나서 죽는 총각도 있으리라 싶었다. 지족 선사는 설법을 들으러 온 진이를 향햐 가까스로 합장을 하고 설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앉아 있자니까 혀를 깨물고 참으려 하여도 자꾸만 고개를 드는 정염을 어쩌지 못했다. 지족 선사는 참다 못해, "진이!" 하고 그녀의 팔목을 잡고 떨리는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 그날 밤 30년 수도승 지족 선사를 함락시킨 진이는 암자를 내려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30년의 수도가 황진이의 아름다움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져 스님은 하룻밤 사이에 파계승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 남자란 별게 아니었다. 황진이는 지족 선사 이외에 그녀가 시인이었으므로 같은 시인인 판서 소양곡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가 가인이었으므로 같은 가인인 송순과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풍취객이었으므로 당대의 풍류인 이사종과 6년 동안 달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지족 선사를 파계승으로 만들어 버린 뒤 황진이의 눈길은 화담 서경덕에게 쏠려 갔다. 말하자면 대학자 화담 선생이야말로 진이가 한 번 시험해 볼 마한 대상이어서 바짝 욕망의 불길이 일었다. 진이는 어느 날 서사정으로 화담을 찾아갔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초연히 초당에 앉아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화담 선생을 진이는 뭇사내가 자기의 미모에 무릎을 꿇듯 그렇게 정복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메한 정신을 배우려고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진이는 화담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 편히 앉으시게." 화담은 대수롭지 앉게 그녀를 건너다보고 어버이 같은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이의 미모 따위는 화담에게는 아무런 이성적 자극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 학문을 이야기하였고, 시와 문학을 겨루었다. 진이는 술과 노래와 춤으로 화담을 유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진이를 한낱 어린애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며칠 밤 며칠 낮을 시험해 보았으나 화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해질녘이었다. 진이는 초당을 나와 일부러 비에 함빡 젖어들었다. 진이의 엷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답고 요염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그녀의 탐스런 젖무덤과 허리며 둔부가 엷은 옷을 비집고 나오기라도 할 듯이 그대로 그러났다. 진이는 그렇게 살이 드러나 보이는 몸매로 화담 서경덕 앞에 나타났다. "선생님......" 추의에 와들와들 떨면서 진이는 화담 선생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허, 이런! 몸이 온통 비에 젖었구먼." "네, 선생님. 왜 그런지 자주 외롭고 쓸쓸해서......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어요, 선생님." "옷을 벗으시게.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감기든다니까." 진이는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화담 선생이 옷을 벗으라고 했겠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내 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그냥 앉아 있을 돌부처가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진이가 비에 젖은 옷을 훌훌 벗고 알몸이 되어도 화담은 그녀를 끌어당겨 남녀의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진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너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있거라, 알았느냐?" 화담은 알몸이 된 진이에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그날 밤에도 화담은 진이의 유혹을 육탄 공세로 마치 어린애 달래듯 잠재우고 저만치 돌아누워 코를 고는 것이었다. 진이는 화담 서경덕에게서 난생 처음 남자를 느꼈다. 천하의 뭇남성을 젖혀놓고 화담은 남성 중의 남성이라 여겨졌다. 이튿날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은 황진이는, "선생님, 송도의 삼절을 아시나이까?" 하고 존경의 눈으로 화담을 우러러보았다. 화담은 고개를 저었다. "송도 삼절. 글쎄다......." "제가 말씀그려 볼게요, 선생님. 하나는 박연이요, 또 하나는 화담이며, 다른 또 하나는 황진이 이 몸인가 하나이다." 그 말에 화담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자연에서는 박연 폭포요, 남자의 세계에서는 화담, 여자의 세계에서는 황진이 자기가 송도에서 으뜸이라는 이 자신감. 어쩌면 그 같은 자신과 오만한 성격이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돋보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사랑하면서 그녀의 시심은 싹텄고, 그 자연 속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껴 한 줄의 시를 써 보기도 하는 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진이는 스스로를 송도 삼절에 비유하고 다녔으나 이성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뭇사내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해 온 진이였으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자기 쪽에서 정을 느끼고 접근했다가 또 자기 쪽에서 보내버리고 나서 그녀는 그리움에 못잊어 시를 썼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진이 앞에 또 왕가의 귀인 벽계수가 등장한다. 그는 황진이에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과연 벽계수는 황진이의 요염한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도도히 스쳐가기만 했다. 진이는 그 벽계수를 생각하며 또다시 시심을 불태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도도하고 오만한 진이는 밤마다 '임'을 그린다. 그녀는 여자다. 낭군을 모시고 싶은 여자다. 그녀의 '임'인 '어른'은 지금 어디쯤에 계실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른님'을 만나 사랑의 밀어를 굽이굽이 펴지도 못한 황진이는 그녀의 인생을 화려하게 펴지도 못하고 40 전후하여 눈을 감았다. 죽을 때 진이는 한 여자로서 짖궃은 과거를 살아온 죄책감에 빠져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가 생전에 내 몸을 자애하지 못하였으니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박 모래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라." 진이를 아껴 오던 이웃들은 차마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모래틈에 버려 까마귀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 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 뒤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는 공무로 송도에 왔다가 먼저 황진이의 소식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벌써 죽어서 흙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백호는 낙담이 되어 장단의 진이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 주었다. 백호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시구가 흘러 나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데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가 사림의 몸으로 일개 기생의 무덤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파면이 되고 말았다. 국록을 먹는 벼슬아치가 체신머리없이 기생의 넋을 위로했다는 죄목이었다. 백호 임제는 그까짓 벼슬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지만, 어쩌면 죽어서 황진이를 만나 한잔 술에 흥을 돋우며 문장을 교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무신 정중부의 일기 - 오영선(서울학연구소선임연구원) 1144년(인종 22) 12월 00일(39세)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 해주를 떠나 군대에 들어온 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저 새파랗게 젊은 놈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자랑스러웠던 내 수염은 검게 그슬려 있다. 김부식과 그 아들 김돈중, 정말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밤도 여느 섣달 그믐날 밤처럼 귀신을 쫓는 나례가 행해졌다. 온갖 잡기가 벌어졌고, 임금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구경을 하셨다. 내시. 견룡 등 시종하는 신하들도 모두 나와 뛰놀며 즐겼고, 나 역시 견룡군의 장교로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내시 김돈중이라는 놈이 갑자기 촛불을 내 얼굴에 들이대는 바람에 수염이 타 버렸다. 놈은 올해 5월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자기 아버지 김부식의 위세를 믿고 기세가 등등하다. 원래 2등으로 합격한 것을 임금께서 김부식의 체면을 봐서 1등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놈이다. 딴에는 무신인 내가 임금의 관심을 받는 게 샘이 나서 그랬겠지. 놈을 늘씬하게 패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놈의 잘난 아버지 김부식은 전후 사정은 아랑곳없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었다. 다행히 임금께서 나보고 어서 도망하라고 하시고 김부식을 달래셔서 화는 면했지만. 임금께서도 내 수염을 보시고는 어이없어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실 요즈음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로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느니, 제도를 정비했다느니 하면서 이전에 있었던 개혁의 바람을 잠재우기에 열심이다. 현 임금께서 초기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신 후로는 묘청. 정지상 등의 말에 따라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하셨는데. 약간 과격하긴 했지만, 개경의 문벌가문을 중심으로 굳어져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피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문벌가문들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말았지. 묘청이 성급하게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부식이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난을 진압한 후 완전히 제멋대로다. 임금도 두 번이나 과오를 반성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위축되셨고, 김부식에 적대적이었던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숙청당해, 이제 그들의 주장은 모두 배척되었다. 하지만 군인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주장은 좀 무리였는지 모른다. 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은 서경 출신 관리들의 지역적인 의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임금께서 황제를 칭하고 우리 나라의 연호를 따로 정하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실 금나라가 현재 비록 강국이라 하나 원래는 오랑캐가 아닌가. 오랑캐인 주제에 우리에게 도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쳐들어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설사 쳐들어온다고 해도 한번 붙어보면 그만이지. 예전 그 막강한 요나라도 무찔렀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것은 너무 한심스럽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총사령관이 되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문신과 무신을 나눴으면 그 직책도 정확히 구분해야지. 총사령관은 항상 문신이 담당하고, 무신들은 그 밑에서 단위 부대나 지휘하게 하고 있으니, 도무지 말이 안된다. 물론 예전에 강감찬이나 윤관도 문신으로서 군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문무반의 구별이 지금같지는 않았다. 문신들도 무예나 군사지휘에 익숙하였고,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이는 특히 군사방면에 뛰어나 장군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무신들도 문신의 직책을 맡을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문신의 직책을 무신이 전혀 못 맡게 하면서 출정군의 총사령관을 문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된다. 1147년(의종1) 12월 00일(42세) 요즘은 정말 신나는 날의 연속이다. 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회 전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나도 대정에서 한 등급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임금께서는 수시로 나를 비롯한 몇몇 무신들을 불러 관심을 보여 주신다. 오늘도 어사대에서 나와 산원 사직재가 봉쇄되어 있는 수창궁 북문을 마음대로 열고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서 탄핵했으나, 임금께서 물리치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임금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사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과정에는 곡절도 많았다. 태자로 책봉되실 때에도 선왕께서는 못 미더워하셨고, 태후께서는 아예 둘째 아들 대령후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셨다. 정습명이 힘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최근 임금께서 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동생을 세우려 했던 일에 대해 섭섭한 말을 하자, 태후께서 맨발로 뜰에 내려가 하늘을 보면서 원망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쳐서 임금께서 겁을 먹고 태후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벼락이 바로 궁전 기둥울 쳤다는 것이다. 임금께서 심약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일국의 제왕으로서 그랬을 리는 없다. 저 김부식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류들이 임금이 즉위하는데 자신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중 정습명은 임금께 큰 은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그랬듯이 신하로서 임금이 하시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아니될 일이다. 임금께서 우리 무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164년(의종18) 2월 00일(59세) 요즘 임금께서 예전같지 않으시다. 즉위 초기 의욕과 활기에 넘치시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임금께서는 오늘도 인지재로 놀러가셨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놀러만 다닌다. 아무데나 가다가 문득 경치가 아름답다 싶으면 행차를 정지시키고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간사한 문신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글을 읊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궁궐에는 아예 돌아갈 생각도 안한다. 나같은 무신들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실컷 문신놈들 노는 것을 호위하고 있어야 하는 내 신세가 정말 한심하다. 그래도 한때는 무관들도 신임하시고, 큰 일을 하시려는 포부도 있었는데, 요즘은 젊은 문신들하고만 어울려 쳐다 보지도 않는다. 성질이 괄괄한 젊은 무관들은 불평이 대단하다. 무관들의 대표로서 그들을 달래야 할 입장이지만, 도리가 없다. 1170년 4월 00일(65세) 오늘 견룡군의 행수로 있는 산원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일으킬 것을 제의해 왔다. 사실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듣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우학유 장군을 찾아가 정변을 주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때 우장군은 “문관이 해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니, 너는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같은 무관이라고 해도 우학유 장군은 집안이 좋아 문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있으니,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겠지. 하지만 나같은 무신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짐작했었다. 이의방. 이고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기는 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하튼 이런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지금도 스스로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태평호문지주)’을 자처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1170년 8월 30일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한뢰, 이 놈의 새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왕의 총애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있으니. 임금도 같은 족속이다. 옛날의 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의욕을 잃고 술과 계집에만 빠져 있고, 모든 정사는 승선 임종식이나 한뢰 손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무신들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놈들이 무신 알기를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임금이 어제 흥왕사로 갔을 때 이제는 한번 거사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의방. 이고에게,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왕이 만약 바로 궁궐로 돌아간다면 좀더 참고 기다리자. 만약 또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약속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금은 오늘도 궁궐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이 보현원으로 가자고 했다. 가다가 오문 앞에 행차를 멈추고 여느 때처럼 술판을 벌이고는, 술에 취하자 우리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했다. 딴에는 무신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 오병수박희가 끝나면 술 한 잔 주고 달랠 생각이었을테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그런데 한뢰 이 놈은 그것도 배아파서 못 참고 있으니. 나이 많은 이소응장군이 재수없게 팔팔한 젊은 무관과 상대를 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장군이 이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기권하고 물러난 건데, 한뢰 이 놈이 갑자기 이장군 앞으로 가서 뺨을 치다니. 쳐죽일 놈. 아무리 무신 알기를 우습게 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장군은 명색이 삼품인 대장군인데, 젊은 내시놈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임금이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완전히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고, 임종식, 이복기 이런 놈들도 이장군을 욕하고 비웃었다. 주위에 있는 무신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고, 모두 나를 주목했다.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뢰 이 놈에게, “이소응이 비록 무부이지만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리 심한 모욕을 주는가?” 큰 소리를 쳤다. 성질 급한 이고가 칼을 빼어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임금도 그때서야 내 손을 잡고 위로했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었겠는가. 하지만 오늘밤의 거사를 생각해서 일단 참기로 했다. 이제 거사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의방과 이고가 모든 준비를 잘 해놓았을까.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딜까. 1170년 9월 1일 내가 다시 일기를 쓰고 있다니. 지금도 거사가 성공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까 김돈중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한순간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어제 일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보현원으로 향했다. 한뢰 이 놈들도 임금에게 궁궐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을 못했다. 물론 궁궐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계획을 바꿔서 바로 거사할 생각이었지만. 거사가 계획대로 보현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임금이 보현원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신하들이 밖으로 나올 때 이의방과 이고를 시켜 임금을 시종하던 무신과 대소 신료 및 환관들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한뢰, 임종식, 이복기 이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보현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이고가 공격했다. 임종식과 이복기는 그 자리에서 쳐죽였는데, 한뢰 이 놈은 혼자 살아보겠다고 보현원으로 다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 숨었다. 가능하면 임금 몰래 처단하고 나중에 알릴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임금에게 한뢰를 내보내라고 강요한 후 한뢰가 나오자 바로 처단하였다. 문제는 김돈중이었다. 이 놈은 예전의 원한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죽이려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이 벌써 사태를 눈치채고 술에 취한 척해서 중간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만약 이 놈이 도성 안에 들어가서 태자를 중심으로 성문을 닫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거사는 끝장이었을 것이다. 이의방은 벌써부터 “만약 그렇게 되면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쪽 오랑캐에게 투신하자”고 난리였다. 먼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있는 김돈중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돌아온 흔적이 없다는 보고였다. 다행이다 싶어 바로 순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게 하니,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우리에게 호응하였다. 그 동안 무신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현 정부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을 적절히 이용한 거지. 아직 얼마나 죽였는지 정확한 숫자는 보고받지 못했으나, 수백 명은 죽었을 것이다. 임금이 나에게 난을 진정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혁명(?), 혁명은 희생과 피를 요구하게 마련이지. 아직까지 우리에게 동조하지 않는 무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문신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북돋을 필요도 있고. 그나저나 김돈중 이 놈은 어디로 숨었을까. 기껏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쳐버리다니, 정말 비겁한 놈이다. 1170년 9월 2일 요즘은 피비린내 나는 날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하게 많은 무신들을 잡아 죽였다. 무엇보다 통쾌한 일은 김돈중을 잡아 죽인 일이다. 놈이 도성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으로 도망했는데,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니, 놈을 따라가던 하인이 현상금을 노리고 고발해 왔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처치하게 했다. 정말 큰 문제는 임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사실 거사할 때는 폐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임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할 것도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제 우리가 밤늦게 임금을 강안전으로 데려갈 때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다행히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 그 일당을 잡을 수 있었는데, 모두 임금 주변에 있던 내시와 환관놈들이었다. 약 스무명 쯤 되었는데 모두 죽였지만, 임금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죽이자는 사람도 있고, 살려두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 생각에도 지금 당장 임금을 죽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 자리에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을 폐위시키지 않았더라면 혁명의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거제도로 추방시키고 태자는 진도로 쫓아버렸다. 태자의 아들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죽여 버렸다. 새 임금으로는 전 임금의 아우 익양공을 맞았다. 대부분의 무신들의 생각을 따른 것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이전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텐데, 모든 것이 막막하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이의방, 이고를 비롯한 많은 무관들은 벌써부터 제 세상을 만났다고 저 난리들인데. 나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 등 무관들이 고위관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장교들도 모두 벼슬을 몇 등급씩 올려주었다. 이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문신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도 중방에서는 이고가 남아 있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였으나, 내가 말렸다. 이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무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문극겸, 이공승 등 비교적 우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신들은 앞으로 여러모로 이용할 가치가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적대적인 문신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만. 에필로그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 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위치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전 임금 의종은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 출신의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명종 9년 청년 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258년(고종 45) 까지 60여 년간 최씨집권기가 지속된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구이병과 김상병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한달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새벽 한 시까지 각개 전투 및 야간 행군 훈련을 받은 우리 소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나는 훈련도중에 다친 발목 때문에 더했다. 하지만 취침 전 선임하사의 장비 점검 구령이 떨어져 우리는 쉬지는 못하고 장비 손실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검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전에 수통을 잃어버린 박일병이 연병장을 이십바퀴나 돌았던 걸 생각하며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중대장님이 직접 장비 점검을 하는게 아닌가.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발목의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삼십분이 흘렀을까.ㅇ장비 점검을 마친 중대장님이 나타났다. "요즘 정신 나간 사병이 있다. 목숨보다 귀한 장비를 분실해? 그것도 대검을!" 침묵이 흘렀다. "이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어떻게 적과 사워 이길수 있겠나? 대검 잃어버린 김태성 상병은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 삼십바퀴 돌아! 실시!"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검을 잃어버린 건 난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나는 발목 통증도 잊은 채 내무반으로 뛰어들어가 나의 장비부터 살펴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없었던 대검이 있는게 아닌가. 연병장에는 김 상병이 완전 군장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김상병이 내무반에 들어왔다. 모두들 말없이 쳐다봤다. "야! 구 이병 니가 뛰었다카모 아마 황천길 갔을끼라. 내 대검 이리주라." 지난 밤에 불침번이었던 김태성 상병은 잠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나의 고민을 눈치챈 것이다. 김상병은 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즘은 쫄병들 때문에 일요일도 없다카이." 이틀 뒤 김상병은 나에게 대검 한자루를 구해줬고, 그 뒤 우리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김상병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자현 님/경남 남해군 청선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3 - 수재는 일찍 끝난다 : 셸링(1775-1854년) 그 때 세계에서는 1796년: 청,백련교의 반란 발생 1801년: 독일 리터, 자외선 발견 튀빙겐의 삼총사 헤겔, 휠덜린, 셸링은 프랑스혁명의 소식을 듣고, 혁명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림은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피히테의 철학이 각광을 받고 있을 때 독일 튀빙겐 대학에는 흔히 삼총사라고 말하는 세 젊은이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이순으로 말하면 헤겔, 휠덜린 그리고 셸링이었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있으면서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혁명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전 유럽세계를 희망의 고지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은 그 정신적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동료들이 모여 자유를 선포하기도 했고, 독일 사상계에도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넘친 포부를 안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휠덜린은 철학적 시인의 길을 택했다. 그의 시는 상당히 비중이 큰 철학적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M. 하이데거가 그의 시를 철학적 존재 해명에 등단시키기도 했다. 그 당시의 관례대로 휠덜린은 대학을 끝내면서 프랑크푸르트의 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은행가 아들의 교육 책임을 맡게 되었다. 명문가의 가정교사 기간에 학문적 업적을 쌓아 인정을 받게 되면 대학으로 진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 관습은 유럽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영국 같은 데서는 학자들이 명문가의 보호 밑에서 일생동안 학문적 활동을 계속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불안하게도 휠덜린은 가르치고 있던 어린이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드디어는 그 가정을 떠나 실연의 쓰라림을 안고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남유럽 등지를 헤매던 훨덜린이 독일로 되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육체적, 정신적으로 초췌하고 황폐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침내는 정신 이상자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말년의 시들은 그런 정신착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철학적인 것들이다. 세 사람이 다 대학에 있을 때 그리스 문화와 정신에 도취되어 있었으나, 그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휠덜린이었다. 하이데거가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스적인 존재성과 시적인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철학의 길을 택했다. 헤겔은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취급하다가 약간 늦게 철학으로 전환했고, 셸링은 처음부터 철학의 문을 두들겼다. 셸링은 헤겔보다 5년이나 낮은 나이였다. 그러나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16살에 대학에 들어왔고, 누구보다도 먼저 철학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던 것이다. 셸링은 칸트와 피히테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피리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피히테는 아직 20살이 못되는 셸링이 자기의 철학을 해득하고 전개시켜주는 것을 보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피히테의 추천을 받은 셸링은 20살이 갓 넘은 약관으로 예나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평있는 교수의 추천이 무엇보다도 빠른 학계진출의 지름길이었다. 거의 해마다 한 권씩의 저서를 발표한 셸링의 인기와 장래성은 학계의 큰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의 주관적인 인식론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해석해 독일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곧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를 연구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자연적 존재를 철학에 받아들이는 범신론 철학의 창조자였다. 그래서 철학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칸트, 피히테를 따르는 주관적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실재론적 철학이라고 분류했다.그 대립적인 분류가 끝나자마자 셸링은 이 둘을 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깨달았다. 둘을 합쳐 동일성의 철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피히테의 철학은 발전적 해소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피히테는 곧 셸링은 자신의 철학을 잘못 전개시킨 과오를 범한, 자기와 무관한 철학이라고 선언해버린다. 물론 셸링은 이미 피히테의 철학을 강 건너 간 것으로 무시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셸링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뒤따랐다. 너무 일찍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기 때문에 더 발전해나갈 여지와 길이 막히고 말았다는 점이 그 하나였다. 그는 오히려 3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자신의 학문적 업적은 이미 채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부인과의 사랑때문에 결국은 예나를 떠나야 하는 개인적 불운도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먼 후일에 철학적 후배였던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게 되었을 때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의 후광을 기대하면서 셸링을 초빙했으나, 역사는 이미 셸링의 철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때늦은 학설로 취급해버렸다. 그래서 헤겔보다 일찍 철학계에 등단해서 헤겔보다 늦게까지 철학계에 남았으나, 그의 철학은 항성이 아닌 혜성의 운명과 비슷하게 일찍 나타났다가 일찍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것이 천재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마누라'는 원래 '임금이나 왕후를 일컫는 극존칭' 우리나라 말에는 남성이나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 여럿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말도 그 사람이 혼인을 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한 벼슬을 했는지에 따라, 그리고 누가 부르는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지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를 지칭할 때, '남정네, 남진, 남편, 사나이, 총각' 등이 있고, 여자를 지칭할 때에는 '아내, 여편네, 마누라, 집사람, 계집, 부인, 처녀' 등 꽤나 많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쓰인 것인지는 대개 알려져 있지만, 그 어원들을 아시는 분이 많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아내'는 지금은 그 표기법도 달라져서 그 뜻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안해'였지요. '안'은 '밖'의 반의어이고, '-해'는 '사람이나 물건을 말할 때 쓰이던 접미사'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안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사람'이란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거기에 비해서 남자는 '바깥 사람, 바깥분, 바깥양반' 등으로 쓰이고요. '부부''를 '내외'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지요. '여편네'는 한자어이지요. '여편'에다가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네'를 붙인 것이지요. 어느 목사님께서 혹시 남편의 '옆'에 있어서 '여편네'가 아니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즉 '옆편네'가 '여편네'가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에서 그렇게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자를 뜻하는 '남편'은 도저히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지요. '여편네'와 '남편'은 서로 대립되는 말입니다. '마누라'는 무슨 뜻일까요? 지금은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그것도 같은 지위나 연령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아내를 지칭할 때나 또는 아내를 '여보! 마누라' 하고 부를 때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예를 들면 '주인 마누라' 등)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 '마누라'는 '마노라'로 쓰이었는데, '노비가 상전을 부르는 칭호'로, 또는 '임금이나 왕후에게 대한 가장 높이는 칭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존칭으로서, 높일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그리고 부르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지위가 낮은 사람이 그 웃사람을 '마누라'라고 부르거나 대통령이나 그 부인을 '마누라'라고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큰 싸움이 나거나 국가원수 모독죄로 붙잡혀 갈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아내의 호칭으로 변화하였는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남편을 '영감'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영감'은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판사나 검사를 특히 '영감님'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옛날 그 관원의 등급과 유사하여서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남편보다도 아내를 더 높여서 불렀던 모양이지요? 남자는 기껏해야 '정삼품'으로 생각했는데, 아내는 '왕이나 왕비'로 생각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마누라'와 '영감'은 대립어가 된 것입니다. 왜 늙지도 않은 남편을 '영감'이라고 불렀을까를 의심하셨던 분은 이제 그 의문이 풀리셨 을 것입니다. 지난 날의 유행가 중에 '여보! 마누라, 왜 불러?' '영감, 왜 불러?' 하는 가사가 기억이 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심학의 철학가 - 육상산 / 왕수인 죽음 또한 자연이 아닌가 - 육상산 왕수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철학가 육상신은 54세에 죽었다. 주자의 성즉리 에 그는 심즉리 라는 학설을 듣고 나와 주자와 쌍벽을 이루었다. 주자는 아홉 살 아래이던 그의 논적 육상산의 부음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육상산의 부임지이던 형문(호북성)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죽기 수일 전, 가족에게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이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했더니 육상산은 조그만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숙환인 폐결핵이 재발하여 그는 자신이 오래 못살 것을 알았다. 정무를 정리하고 가사를 정돈했다. 그는 약물까지도 거절해왔다. 목욕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의관을 정제한 뒤 반듯하게 앉아서 죽었다. 12월 14일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마음이 곧 천리 라고 한 왕수인 왕수인의 호는 양명이다. 그는 명나라 사람으로 절강성 여요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철학자로 정치에 참여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신호의 난 을 평정하여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도 폐질환으로 57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왕수인은 육상산의 심즉리 를 중심으로 하여 마음이 곧 천리라는 학설을 내세웠다. 모든 일과 모든 존재의 리는 내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마음 밖에 따로 이치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였다.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 곧 우주라는 육상산의 학설을 계승한 왕수인은 만물이 모두 사람의 마움에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친구에게 꽃을 예로 들어 만물이 사람의 마음에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친구가 낭떠러지에 있는 꽃을 보고 먼저 물었다. 이 세상에는 마음 밖에 어떤 사물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 꽃나무는 저절로 피었다가 저절로 떨어지곤 하지 않는가? 그것이 나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네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다 고요했었다. 그런데 자네가 여기에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는 이 꽃의 빛깔이 일시에 또렸해졌다. 이것으로 이 꽃이 자네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왕수인의 대답이었다. 네가 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꽃의 존재가 너에게 감지된다는 뜻이며, 꽃의 존재는 곧 너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몸도 사람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주재되며 모든 행동은 마음속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다. 몸을 주재하는 것은 곧 마음이다. 그러니 모든게 어떻게 마음밖의 일이겠는가? 그의 제자들이 임종을 앞두고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떠하십니까? 이 마음이 광명한데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도학자들은 모두 죽음앞에서 지극히 담담하였다. 서화담과 소강절, 주자와 퇴계, 육상산과 왕수인, 그리고 토정선생. 마음이 이미 평안하다. 의 서화담. 삶과 죽음은 보통있는 일이다. 의 소강절.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의 육상산.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의 퇴계선생.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서러워 말아라. 의 토정선생. 퇴계와 토정, 육상산은 정좌한채 영면에 들었다. 이들은 모두 목욕을 마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의관을 정제한 뒤 자리를 정돈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화담은 성인들은 모두 이렇게 하셨다. 라고 답할 뿐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7.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찾기 경쟁 남미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나라들은 전부 스페인 어를 쓴다. 이것은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나머지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남미 대륙의 이러한 분할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에 두 나라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였다. 14세기경부터 중세 봉건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붕괴와 중세 문화의 황혼 속에서 새로운 근대 사회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르네상스, 종교 개혁, 지리상의 발견으로 표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인도 항해,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경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유럽 인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은 그들의 약탈로 인해 기존의 문명이 파괴 되고 혹심한 약탈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이런 지리상의 발견의 주동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새로운 인도 항로의 발견자인 바스코 다가마의 말처럼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는 `기독교인과 향료`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고 당시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가 되는 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슬람의 침입에 시달린 두 나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스터 존(Preste John)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시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은 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약 이 국가를 발견하고 동맹을 맺는다면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의 발견에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앞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했지만 적도 근방까지만 탐험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480년대에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년에 드디어 `희망봉`에 도달했다. 한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했고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도와 줄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1484년 포르투갈의 국왕 조안 2세를 만난 콜럼버스는 자신의 인도 탐험 계획을 열심히 후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왕은 측근들의 의견을 토대로 하여 그를 허풍쟁이 공상가로 단정하여 상대해 주질 않았다. 게다가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 발견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희망봉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은 내정의 불안으로 인해 당분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에 실망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가 자신의 계획을 후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마음이 움직였고 같은 해 8월 3일 새벽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했다. 이 선단은 출발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어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의 어느 곳이라 믿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493년 3월 15일 콜럼버스 일행은 자신들이 출발했던 스페인의 팔로스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90여 명이었던 일행이 약 40명으로 줄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도 향료와 금이 아니라 약간의 노예와 금속 제품, 거기에 앵무새와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경쟁 국가인 포르투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교황은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600여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의 발견지는 스페인이, 동쪽의 발견지는 포르투갈이 차지한다고 선언했다(493). 포르투갈 왕은 이에 즉시 항의했고 양국은 약 1년쯤 협의한 후 경계선을 좀더 서쪽인 서경46도 37분으로 옮겼다. 이것이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이다.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했지만 당시로서는 교황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브라질로부터 대서양, 아프리카, 인도양,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이 아메리카, 태평양, 필리핀을 자기네 영토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 개혁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영토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3) 할리우드를 통해 본 미국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에게는 총명하고 귀여운 일곱 살 난 아들이 있다. 그 아이는 조립식 장난감으로 트럭 하나를 만들어 보이더니, 스스로 바닥에 널려 있는 각종 권총 등의 완구로 구성된 전투부대의 요원이 되었다. 흥이 나기 시작하자 엄마의 아이새도를 몰래 가져와 얼굴에 몇 개의 선을 긋고는 자동소총을 들고 진지의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며 '뚜뚜' 하며 자동소총을 마구 쏘아대는 시능을 하더니 난 터미 네이터다'라고 소리켰다. 그 아이는 할리우드 액션스타 슈왈츠제네거를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폭력으로 영웅을 만들어 내는 할리우드영화는 더 강력한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 폭력영화의 가장 보편적 표현방식이다. 60년대를 전후해 나온 미국 서부영화에서는 흘로 말을 타고 적을 무찌르는 협객이 청소년들의 숭배와 모방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와 해방을 위해 폭력에 대항하여 싸웠고, 이는 미국정신과도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이 후 ' 도시의 영웅'으로 형상화한 할리우드영화는 '자유와 평등' 을 추구한다는 미국정신과는 도저히 연관지을 수 없다. 홀로 좌충우돌 싸우며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어김없이 법을 위반해 가며 폭력으로 폭력을 누르는 영웅이 나타난다. 이 영웅은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로 포장되어 한 걸음에 한 사람씩 죽이는 지독하게 잔인한 수법으로 관중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영화는 관중에게 감성적 충격을 주는 외에, 미국사회는 개인을 강조하는 국가라는 것과 현실적으로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은 없다는 점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미국이란 나라는 경찰관이 범죄자에 대해 총을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또 어쩌다 발사한 총이 잘못 되는 경우에는 평생 연루되어 그 책임을 벗을 수 없는 사회이다. 개인 영웅주의의 출현은 할리우드가 추구하는 상업적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미국문화가 추구하는 개성해방과 자아숭배와도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로 얽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해방이 지나치다보니 인간관계는 극도로 냉담해지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따르는 책임은 없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서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은 사라지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仁)'이란 개념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영웅'이 나타나 사회를 구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 자신이 직접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인이 '스크린 영웅' 에 대해 어느 정도로 숭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 얼마 전 {월드 리트레이처}에 실린 적이 있다.미국 액션스타로 스크린의 영웅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전기가 출판되었을 때 한 미국 소녀가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기자에게 나는 그가 사람 죽이는 장면보기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요, 난 그가 사람 죽이는 장면 보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 죽이는 걸 보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을 죽여요! 나는 이 아이가 실지로 흉칙한 살인현장을 목격해도 아주 냉정하고 흥미롭게 구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인이 두려워졌다. 개인 영웅주의에 따라 미국문화 속에는 썩어빠진 향락원칙이 돋아나게 되었다. 심각한 수준의 외채와 가정파괴, 종족차별, 폭력범죄, 성해방, 마약 등 일련의 사회문제들이 미국대륙을 강타하여 미국인들은 극도의 비관으로 방황하며 타락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할리우드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었고 스크린을 통해 마구 퍼 져 나갔다.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사회문제를 다룬 예술영화를 제작해 사회를 계도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겠으나 고액의 출연료와 거대한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는 할리우드로서는 당연히 흥행수입을 올릴 수 있는 저질오락물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의 미국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돈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최종의 목표가 돈이기 때문에 금전지상주의와 향락주의는 미국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그들이 만든 영화에서도 종횡무진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만들어진 미국영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다. 미국은 각종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여기에서는 열심히 일할 필요또 없고 힘들여 찾아다니며 애쓸 필요또 없다. 어느날 갑자기 행운의 여신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나 내 소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비록 이전에는 내가 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고집한 결과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한 분야나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하거나 힘들여 자기 직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미국에 보편적으로 만연된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제 막 경제개발이 시작된 중국으로서는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단결하고 노력하며 직업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중국인의 삶에 대한 이런 태도는 사실 중국문화만이 가지는 훌륭한 점이다.우리는 이런 문화를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문화침략'으로 인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4) 할리우드영화를 반대하는 나의 이율배반 어떤 사람은 나더러 지나치게 열심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개방정책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무엇에나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열심히 찾았던 것과 흡사하게 열심이라고. 그렇다. 나는 몰두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스스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 빠져 지냈다. 이때 나는 대략 200편 정도의 할리우드영화를 보았다. 나는 영화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영화평론과 영화와 관계되는 잡지들을 수없이 보며 나름대로의 분석을 하였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내가 본 거의 모든 영화가 이른바 대표적인 명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때 나는 미국영화의 해적판들이 대만과 홍콩을 거쳐 중국대륙으로 들어오는 루트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점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미국인이 이런 것을 도둑질해서 홍콩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홍콩사람들은 먹고 살 길이 없을 것이며 문제는 미국에서 홍콩으로 가져 오는 것이 아니고 홍콩에서 중국대륙으로 들여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_이렇게 할리우드영화를 수없이 반복해 보면서 나는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하였다. 할리우드영화는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영화 속의 폭력장면도 점점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대표적 명작이라고 하는 이런 영화 중에 폭력과 색정에 관계되지 않은 것은 불과 10퍼센트 안팎이었다. 나는 이지적인 태도로 영화를 보면서 그것들을 '예술적'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모든 중국인들의 생각이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영화들이 예술이라는 두 글자와 연관짓기는 어려울 만큼 피비린내 나는 폭력장면이나 선정적인 장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런 영화들이 소위 예술적 승화를 했다고 과장되는 것이다. 월남전에 관한 어느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미국병 시피 목에 칼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도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칼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목은 천천히 잘려나갔다. 머리는 목에서 떨어져 나가 딩굴고 선혈이 뿜어져 나와 스크린을 가득 채우면서 영화제목이 나타났다. 20세 이하의 중국 청소년들이 이런 영화를 보았을 때 과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적으로 아주 열심히 '예술'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겠는가? 사실 미국문화와 미국적 생활방식이나 사고가 30세 이상 중국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루 아침에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중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는 분명히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고의로 이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로부터 야기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기 나라의 미래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식으로 전세계의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더욱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작년 성탄절 때 미국에서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폭력영화가 나와 관객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뉴욕지하철에서 영화장면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국내의 여론이 들끌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어떤 책임감 있는 의원은 의회에서, 할리우드가 이런 영화를 만들 때는 머리를 좀 굴리라고 격렬한 어조로 건의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예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지금 미국 청소년들이 인기있는 책이나 TV 혹은 영화를 보고 어떻게 은밀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배운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매체들이 청소년의 정서에 어떤 형태로든 작용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임감 없는 태도는 미국사회의 공리주의에서 기인된 것이다. 멀리 바라볼 줄 모르고 눈 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할리우드영화산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중 .미 지적재산권 협상과정중 미국은 자기의 독점자본으로 중국에서 오디오나 비디오 제품을 생산 및 발행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당연히 중국 정부로부터 거절당하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책임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할리우드영화를 '예술적'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는 나는 어떻게 보면 영락없는 '위선자'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에게 '위선자'라고 한다면 나는 이를 아주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위선을 부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하의 자녀를 한 달 동안만 나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는 200여 편의 미국영화를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 어떻게 될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눈사람이 된 연탄재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새해를 축복하는 서설이 내렸다고 다들 기뻐하면서 거리를 쏘다녔다. 아파트 단지 한 모퉁이에 가득 쌓여 있던 연탄재들도 기쁜 마음은 사람들과 똑같았다. 연탄 아궁이로 들어갔다가 희멀겋게 볼품없이 된 그들에게 함박눈이 하얀 옷을 입혀 준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눈발이 가늘어지자 너나없이 밖으로 나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눈 뭉치를 만들어 눈싸움을 하다가 나중에는 누가 가장 빨리,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시합을 벌였다. 눈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습기가 없는 탓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아이 하나가 아파트 뒤뜰에 쌓인 연탄재 하나를 집어들었다. 난생 처음 눈을 보고 마냥 신기해하기만 하던 연탄재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그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는 연탄재를 눈 위에 놓고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 뭉치가 금방 다른 아이들의 눈 뭉치보다 더 크게 되었다. 아이는 신이 났다. 아무도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기뻤다. 연탄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으로 태어나 결국 여기에서 죽나 보다 하는 절망감에 눈물이 났다. 그러나 차차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록 눈 뭉치 속에 갇혀 갑갑하기는 했으나 그리 싫지는 않았다. 연탄재의 신분에서 눈사람의 신분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스스로 운명을 바꾸어 볼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탄재는 이리저리 굴려질 때마다 온몸에 멍이 들었으나 조금도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덩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중압감에 못 견뎌 연방 입 밖으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신분이 상승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통쯤은 참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눈사람을 가장 빨리, 가장 크게 만든 아이는 연탄재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 아이였다. 아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새 아이의 아버지가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나 기념사진까지 찍어 주었다. 연탄재는 이제 자신은 연탄재가 아니라 눈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영원히 순결한 눈사람으로 살게 해준 아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예전의 자기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더덕더덕 추한 모습으로 쌓여 있는 연탄재들에게는 연민의 정을 품었다. 다음날, 눈이 그치고 햇살은 빛났다. 또 그 다음날에도 햇살은 내리쬐었다. 자연히 햇살에 눈사람이 녹아 내렸다. 연탄재는 예전보다 더 흉한 몰골을 하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햇살에 눈사람이 녹는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연탄재는 그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글터 → 이글저글 대구는 2,000,000개 이상의 알을 낳지만 실제로 새끼가 되는 것은 다섯 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물고기 하렘, 수컷은 수백만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지만 수컷이 죽으면 암컷 중 가장 강한 놈이 수컷으로 전환하여 암컷들을 이끈다.정어리라는 물고기는 이 세상에 없다. 사실 정어리라는 이름은 작은 물고기들을 뜻하는 말로 특별한 어떤 종류를 뜻하는게 아니다.금붕어의 그 아름다운 황금빛 색깔은 어두운 어항이나 흐르는 시냇물 같은 곳에서는 변한다. 그 빛나는 금빛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못이나 혹은 조명을 받는 어항 속에서 살도록 하여야 한다.물고기는 오염된 물 속일수록 기침을 더 한다.개미의 IQ는 150이나 된다. 개미는 기억도 생각도 못한다. 그러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예를 들면 미로를 사용한 실험에서 개미는 빠르고 정확한 기억을 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벌은 자외선까지 볼 수 있다.어떤 곤충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100그램의 꿀을 모으기 위해서는 7,000마리의 일벌들이 330,000 송이의 꽃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벌에게는 눈이 5개있다. 머리위에 3개, 앞에 2개있다.많은 곤충들은 털로 소리를 듣는다. 수펄의 경우 더듬이를 따라 작은 털이 많이 나 있다. 소리가 나면 털이 떨리고, 이 진동이 중앙 신경계에 전달되면 신경계에서 소리를 판단한다. 바퀴벌레는 배에 털이 나 있어서 소리를 배로 듣고, 송충이는 온몸이 털로 덮여 있으므로 온몸으로 소리를 듣는 셈이다.모기의 이빨은 47개이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7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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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73 호4339.11.30 (10.10)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것.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인가, 시인인가, 송도 삼절인가 - 황진이 개성 병부교 다리밑. 때는 마침 초여름이어서 다리 밑에서는 빨래하는 처녀 두셋이 부지런히 방망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빨래터에는 진현금만이 남아 몇가지 남지 않은 빨래를 헹구고 있었다. 그 때 병부령 다리 위를 지나가던 청년 묘랑이 다리 밑의 현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가뜩이나 녹작지근한 날씨에 훌훌 옷을 벗고 목물이라도 끼얹고 싶던 현금은 청년의 눈웃음에 짜릿한 흥분이 일었다. 일단 나귀를 타고 사라졌던 청년은 이튿날 그 시가에 다시 나타나 또다시 눈웃음을 던졌다. 현금은 청년의 유혹을 받고 가슴이 뛰었다. 청년은 나귀를 다리 난간에 메어 두고 아래로 내려와서 현금의 앞에 마주섰다.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나 물 한 바가지 마시세." 하고 말문을 열었다. 현금은 우물로 가서 물을 떠서 청년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바가지를 돌려주며 청년은, "어, 시원하구나!" 하고 뇌까렸다. 양반집 자제 같은 풍모와 그 서글서글한 외모에 반해 현금은 청년을 사모하게 되었다. '다리 밑의 인연'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였다. 청년은 개성에서도 유명한 황진사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어갔다. 이와 같이 다리 밑의 밀애를 거쳐 태어난 아기가 바로 황진이였다. 황진이나 그의 어머니 현금은 그러나 이미 그들 생애에 슬픈 숙명을 안고 태어난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진이의 아버지 황진사처럼 그들 신분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금은 곧 황진사의 첩이었고, 황진이는 이를테면 첩의 딸이었다. 현금. 진이의 어미 현금은 다리 밑의 인연으로 얻은 딸을 그나마 양반의 씨라고 애지중지하여 키웠다. 어미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다. 진이는 여덟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열 살에는 열녀전을 읽었다. 사서 삼경을 익혔고 시서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지식과 정서 양면을 두루 갖추었다. 게다가 거문고 가락에 흥을 돋우어 감성의 폭을 넓혀 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황진이의 재주는 인근 마을에 널리 알려져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찬탄하다 못해 흠모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은 먼 발치로 진이의 아름다운 용모를 한 번 보고는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어 버렸다. 죽은 청년을 실은 상여는 마을 젊은이들에 의하여 운구되었다. 그러나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 소리에 의해 운구되던 상여는 진이의 집 앞에서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이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어 청년의 관곽 위에 얹어 주었다. 그제서야 상여는 땅에서 떨어져 그 슬픈 만가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그 때부터 황진이는 인생을 깨달았고, 사랑의 번뇌를 알았다. 그녀는 마치 죽은 마을 청년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진이는 자기로 말미암아 청년이 죽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그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내 아름다움 때문에 청년이 죽었으니 나의 미모가 그를 죽인 셈이다. 내가 이 미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가는 또 다른 젊은이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이는 그 같은 생각 끝에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되었다. 그 뒤부터 세상 사람들은, 황진이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를 사랑하게 이르렀다. 그 당시 엄수란 사람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악단에서 늙었는데 그만치 당대의 "미모도 많이 보았고 음률도 잘 알지만 황진이를 보고서 인간 세계에 선녀가 내려왔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세상에 이런 절조가 또 어디 있겠느냐" 고 경탄했다는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개성적인 미모, 온몸에 젊음과 정열이 한창 무르익은 방년의 여인이 기계에 나타나자 진이는 송도 화류계의 꽃이 되었다. 뭇사내들은 진이 앞에 나타나 술과 시와 거문고 놀이 하기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알았으나 진이 마음에 꼭 들어 그녀의 사랑과 예술을 깡그리 바칠 만한 멋쟁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진이는 오만하고 도도해져 갔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남성들이 그녀 앞에서는 쪽을 못 쓰고 빌빌거렸다. 그녀는 남성들을 마음껏 시험하고 싶어졌다. 때로는 농락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모와 무르익은 육신, 빼어난 문장력에도 굽히지 않는 남성이 나타나면 마음껏 그와 함께 타오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싶기도 하였다. 남성 시험 첫 상대로 그녀는 지족 선사를 택하였다. 지족 선사,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는 스님이었다. 진이는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 생불을 어떻게든지 유혹해 불 계획이었다. "스님 계시옵니까?" "......" 조용한 산골의 암자에서 만 가지 상념을 떨쳐 버리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지족 선사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나타나자 몹시 당황해하면서 안으로 안내하였다. "스님, 스님께선 득도하신 분이니까 중생의 번민을 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진이는 요염한 얼굴에 우정 수심이 가득하여 지족 선사의 두 눈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 지족 선사는 선뜻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진이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스님, 인간사는 허무한 것 같습니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로 느끼셨소. 인간사는 허무하오." 진이는 다시 남자 이야기를 꺼내었다. "스님, 이 몹쓸 계집 때문에 상사병이 나서 죽은 총각이 있었나이다. 나마들은 예쁜 여자를 못잊어 하다 죽는 수도 있나이까?" "예, 어흠. 나무 관세음보살!" 지족 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과연 저런 미모면 상사병이 나서 죽는 총각도 있으리라 싶었다. 지족 선사는 설법을 들으러 온 진이를 향햐 가까스로 합장을 하고 설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앉아 있자니까 혀를 깨물고 참으려 하여도 자꾸만 고개를 드는 정염을 어쩌지 못했다. 지족 선사는 참다 못해, "진이!" 하고 그녀의 팔목을 잡고 떨리는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 그날 밤 30년 수도승 지족 선사를 함락시킨 진이는 암자를 내려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30년의 수도가 황진이의 아름다움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져 스님은 하룻밤 사이에 파계승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 남자란 별게 아니었다. 황진이는 지족 선사 이외에 그녀가 시인이었으므로 같은 시인인 판서 소양곡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가 가인이었으므로 같은 가인인 송순과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풍취객이었으므로 당대의 풍류인 이사종과 6년 동안 달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지족 선사를 파계승으로 만들어 버린 뒤 황진이의 눈길은 화담 서경덕에게 쏠려 갔다. 말하자면 대학자 화담 선생이야말로 진이가 한 번 시험해 볼 마한 대상이어서 바짝 욕망의 불길이 일었다. 진이는 어느 날 서사정으로 화담을 찾아갔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초연히 초당에 앉아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화담 선생을 진이는 뭇사내가 자기의 미모에 무릎을 꿇듯 그렇게 정복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메한 정신을 배우려고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진이는 화담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 편히 앉으시게." 화담은 대수롭지 앉게 그녀를 건너다보고 어버이 같은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이의 미모 따위는 화담에게는 아무런 이성적 자극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 학문을 이야기하였고, 시와 문학을 겨루었다. 진이는 술과 노래와 춤으로 화담을 유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진이를 한낱 어린애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며칠 밤 며칠 낮을 시험해 보았으나 화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해질녘이었다. 진이는 초당을 나와 일부러 비에 함빡 젖어들었다. 진이의 엷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답고 요염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그녀의 탐스런 젖무덤과 허리며 둔부가 엷은 옷을 비집고 나오기라도 할 듯이 그대로 그러났다. 진이는 그렇게 살이 드러나 보이는 몸매로 화담 서경덕 앞에 나타났다. "선생님......" 추의에 와들와들 떨면서 진이는 화담 선생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허, 이런! 몸이 온통 비에 젖었구먼." "네, 선생님. 왜 그런지 자주 외롭고 쓸쓸해서......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어요, 선생님." "옷을 벗으시게.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감기든다니까." 진이는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화담 선생이 옷을 벗으라고 했겠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내 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그냥 앉아 있을 돌부처가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진이가 비에 젖은 옷을 훌훌 벗고 알몸이 되어도 화담은 그녀를 끌어당겨 남녀의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진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너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있거라, 알았느냐?" 화담은 알몸이 된 진이에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그날 밤에도 화담은 진이의 유혹을 육탄 공세로 마치 어린애 달래듯 잠재우고 저만치 돌아누워 코를 고는 것이었다. 진이는 화담 서경덕에게서 난생 처음 남자를 느꼈다. 천하의 뭇남성을 젖혀놓고 화담은 남성 중의 남성이라 여겨졌다. 이튿날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은 황진이는, "선생님, 송도의 삼절을 아시나이까?" 하고 존경의 눈으로 화담을 우러러보았다. 화담은 고개를 저었다. "송도 삼절. 글쎄다......." "제가 말씀그려 볼게요, 선생님. 하나는 박연이요, 또 하나는 화담이며, 다른 또 하나는 황진이 이 몸인가 하나이다." 그 말에 화담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자연에서는 박연 폭포요, 남자의 세계에서는 화담, 여자의 세계에서는 황진이 자기가 송도에서 으뜸이라는 이 자신감. 어쩌면 그 같은 자신과 오만한 성격이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돋보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사랑하면서 그녀의 시심은 싹텄고, 그 자연 속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껴 한 줄의 시를 써 보기도 하는 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진이는 스스로를 송도 삼절에 비유하고 다녔으나 이성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뭇사내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해 온 진이였으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자기 쪽에서 정을 느끼고 접근했다가 또 자기 쪽에서 보내버리고 나서 그녀는 그리움에 못잊어 시를 썼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진이 앞에 또 왕가의 귀인 벽계수가 등장한다. 그는 황진이에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과연 벽계수는 황진이의 요염한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도도히 스쳐가기만 했다. 진이는 그 벽계수를 생각하며 또다시 시심을 불태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도도하고 오만한 진이는 밤마다 '임'을 그린다. 그녀는 여자다. 낭군을 모시고 싶은 여자다. 그녀의 '임'인 '어른'은 지금 어디쯤에 계실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른님'을 만나 사랑의 밀어를 굽이굽이 펴지도 못한 황진이는 그녀의 인생을 화려하게 펴지도 못하고 40 전후하여 눈을 감았다. 죽을 때 진이는 한 여자로서 짖궃은 과거를 살아온 죄책감에 빠져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가 생전에 내 몸을 자애하지 못하였으니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박 모래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라." 진이를 아껴 오던 이웃들은 차마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모래틈에 버려 까마귀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 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 뒤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는 공무로 송도에 왔다가 먼저 황진이의 소식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벌써 죽어서 흙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백호는 낙담이 되어 장단의 진이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 주었다. 백호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시구가 흘러 나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데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가 사림의 몸으로 일개 기생의 무덤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파면이 되고 말았다. 국록을 먹는 벼슬아치가 체신머리없이 기생의 넋을 위로했다는 죄목이었다. 백호 임제는 그까짓 벼슬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지만, 어쩌면 죽어서 황진이를 만나 한잔 술에 흥을 돋우며 문장을 교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무신 정중부의 일기 - 오영선(서울학연구소선임연구원) 1144년(인종 22) 12월 00일(39세)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 해주를 떠나 군대에 들어온 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저 새파랗게 젊은 놈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자랑스러웠던 내 수염은 검게 그슬려 있다. 김부식과 그 아들 김돈중, 정말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밤도 여느 섣달 그믐날 밤처럼 귀신을 쫓는 나례가 행해졌다. 온갖 잡기가 벌어졌고, 임금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구경을 하셨다. 내시. 견룡 등 시종하는 신하들도 모두 나와 뛰놀며 즐겼고, 나 역시 견룡군의 장교로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내시 김돈중이라는 놈이 갑자기 촛불을 내 얼굴에 들이대는 바람에 수염이 타 버렸다. 놈은 올해 5월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자기 아버지 김부식의 위세를 믿고 기세가 등등하다. 원래 2등으로 합격한 것을 임금께서 김부식의 체면을 봐서 1등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놈이다. 딴에는 무신인 내가 임금의 관심을 받는 게 샘이 나서 그랬겠지. 놈을 늘씬하게 패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놈의 잘난 아버지 김부식은 전후 사정은 아랑곳없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었다. 다행히 임금께서 나보고 어서 도망하라고 하시고 김부식을 달래셔서 화는 면했지만. 임금께서도 내 수염을 보시고는 어이없어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실 요즈음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로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느니, 제도를 정비했다느니 하면서 이전에 있었던 개혁의 바람을 잠재우기에 열심이다. 현 임금께서 초기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신 후로는 묘청. 정지상 등의 말에 따라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하셨는데. 약간 과격하긴 했지만, 개경의 문벌가문을 중심으로 굳어져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피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문벌가문들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말았지. 묘청이 성급하게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부식이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난을 진압한 후 완전히 제멋대로다. 임금도 두 번이나 과오를 반성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위축되셨고, 김부식에 적대적이었던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숙청당해, 이제 그들의 주장은 모두 배척되었다. 하지만 군인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주장은 좀 무리였는지 모른다. 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은 서경 출신 관리들의 지역적인 의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임금께서 황제를 칭하고 우리 나라의 연호를 따로 정하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실 금나라가 현재 비록 강국이라 하나 원래는 오랑캐가 아닌가. 오랑캐인 주제에 우리에게 도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쳐들어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설사 쳐들어온다고 해도 한번 붙어보면 그만이지. 예전 그 막강한 요나라도 무찔렀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것은 너무 한심스럽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총사령관이 되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문신과 무신을 나눴으면 그 직책도 정확히 구분해야지. 총사령관은 항상 문신이 담당하고, 무신들은 그 밑에서 단위 부대나 지휘하게 하고 있으니, 도무지 말이 안된다. 물론 예전에 강감찬이나 윤관도 문신으로서 군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문무반의 구별이 지금같지는 않았다. 문신들도 무예나 군사지휘에 익숙하였고,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이는 특히 군사방면에 뛰어나 장군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무신들도 문신의 직책을 맡을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문신의 직책을 무신이 전혀 못 맡게 하면서 출정군의 총사령관을 문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된다. 1147년(의종1) 12월 00일(42세) 요즘은 정말 신나는 날의 연속이다. 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회 전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나도 대정에서 한 등급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임금께서는 수시로 나를 비롯한 몇몇 무신들을 불러 관심을 보여 주신다. 오늘도 어사대에서 나와 산원 사직재가 봉쇄되어 있는 수창궁 북문을 마음대로 열고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서 탄핵했으나, 임금께서 물리치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임금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사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과정에는 곡절도 많았다. 태자로 책봉되실 때에도 선왕께서는 못 미더워하셨고, 태후께서는 아예 둘째 아들 대령후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셨다. 정습명이 힘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최근 임금께서 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동생을 세우려 했던 일에 대해 섭섭한 말을 하자, 태후께서 맨발로 뜰에 내려가 하늘을 보면서 원망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쳐서 임금께서 겁을 먹고 태후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벼락이 바로 궁전 기둥울 쳤다는 것이다. 임금께서 심약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일국의 제왕으로서 그랬을 리는 없다. 저 김부식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류들이 임금이 즉위하는데 자신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중 정습명은 임금께 큰 은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그랬듯이 신하로서 임금이 하시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아니될 일이다. 임금께서 우리 무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164년(의종18) 2월 00일(59세) 요즘 임금께서 예전같지 않으시다. 즉위 초기 의욕과 활기에 넘치시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임금께서는 오늘도 인지재로 놀러가셨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놀러만 다닌다. 아무데나 가다가 문득 경치가 아름답다 싶으면 행차를 정지시키고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간사한 문신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글을 읊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궁궐에는 아예 돌아갈 생각도 안한다. 나같은 무신들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실컷 문신놈들 노는 것을 호위하고 있어야 하는 내 신세가 정말 한심하다. 그래도 한때는 무관들도 신임하시고, 큰 일을 하시려는 포부도 있었는데, 요즘은 젊은 문신들하고만 어울려 쳐다 보지도 않는다. 성질이 괄괄한 젊은 무관들은 불평이 대단하다. 무관들의 대표로서 그들을 달래야 할 입장이지만, 도리가 없다. 1170년 4월 00일(65세) 오늘 견룡군의 행수로 있는 산원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일으킬 것을 제의해 왔다. 사실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듣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우학유 장군을 찾아가 정변을 주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때 우장군은 “문관이 해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니, 너는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같은 무관이라고 해도 우학유 장군은 집안이 좋아 문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있으니,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겠지. 하지만 나같은 무신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짐작했었다. 이의방. 이고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기는 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하튼 이런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지금도 스스로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태평호문지주)’을 자처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1170년 8월 30일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한뢰, 이 놈의 새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왕의 총애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있으니. 임금도 같은 족속이다. 옛날의 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의욕을 잃고 술과 계집에만 빠져 있고, 모든 정사는 승선 임종식이나 한뢰 손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무신들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놈들이 무신 알기를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임금이 어제 흥왕사로 갔을 때 이제는 한번 거사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의방. 이고에게,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왕이 만약 바로 궁궐로 돌아간다면 좀더 참고 기다리자. 만약 또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약속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금은 오늘도 궁궐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이 보현원으로 가자고 했다. 가다가 오문 앞에 행차를 멈추고 여느 때처럼 술판을 벌이고는, 술에 취하자 우리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했다. 딴에는 무신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 오병수박희가 끝나면 술 한 잔 주고 달랠 생각이었을테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그런데 한뢰 이 놈은 그것도 배아파서 못 참고 있으니. 나이 많은 이소응장군이 재수없게 팔팔한 젊은 무관과 상대를 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장군이 이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기권하고 물러난 건데, 한뢰 이 놈이 갑자기 이장군 앞으로 가서 뺨을 치다니. 쳐죽일 놈. 아무리 무신 알기를 우습게 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장군은 명색이 삼품인 대장군인데, 젊은 내시놈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임금이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완전히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고, 임종식, 이복기 이런 놈들도 이장군을 욕하고 비웃었다. 주위에 있는 무신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고, 모두 나를 주목했다.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뢰 이 놈에게, “이소응이 비록 무부이지만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리 심한 모욕을 주는가?” 큰 소리를 쳤다. 성질 급한 이고가 칼을 빼어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임금도 그때서야 내 손을 잡고 위로했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었겠는가. 하지만 오늘밤의 거사를 생각해서 일단 참기로 했다. 이제 거사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의방과 이고가 모든 준비를 잘 해놓았을까.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딜까. 1170년 9월 1일 내가 다시 일기를 쓰고 있다니. 지금도 거사가 성공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까 김돈중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한순간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어제 일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보현원으로 향했다. 한뢰 이 놈들도 임금에게 궁궐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을 못했다. 물론 궁궐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계획을 바꿔서 바로 거사할 생각이었지만. 거사가 계획대로 보현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임금이 보현원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신하들이 밖으로 나올 때 이의방과 이고를 시켜 임금을 시종하던 무신과 대소 신료 및 환관들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한뢰, 임종식, 이복기 이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보현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이고가 공격했다. 임종식과 이복기는 그 자리에서 쳐죽였는데, 한뢰 이 놈은 혼자 살아보겠다고 보현원으로 다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 숨었다. 가능하면 임금 몰래 처단하고 나중에 알릴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임금에게 한뢰를 내보내라고 강요한 후 한뢰가 나오자 바로 처단하였다. 문제는 김돈중이었다. 이 놈은 예전의 원한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죽이려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이 벌써 사태를 눈치채고 술에 취한 척해서 중간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만약 이 놈이 도성 안에 들어가서 태자를 중심으로 성문을 닫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거사는 끝장이었을 것이다. 이의방은 벌써부터 “만약 그렇게 되면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쪽 오랑캐에게 투신하자”고 난리였다. 먼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있는 김돈중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돌아온 흔적이 없다는 보고였다. 다행이다 싶어 바로 순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게 하니,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우리에게 호응하였다. 그 동안 무신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현 정부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을 적절히 이용한 거지. 아직 얼마나 죽였는지 정확한 숫자는 보고받지 못했으나, 수백 명은 죽었을 것이다. 임금이 나에게 난을 진정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혁명(?), 혁명은 희생과 피를 요구하게 마련이지. 아직까지 우리에게 동조하지 않는 무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문신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북돋을 필요도 있고. 그나저나 김돈중 이 놈은 어디로 숨었을까. 기껏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쳐버리다니, 정말 비겁한 놈이다. 1170년 9월 2일 요즘은 피비린내 나는 날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하게 많은 무신들을 잡아 죽였다. 무엇보다 통쾌한 일은 김돈중을 잡아 죽인 일이다. 놈이 도성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으로 도망했는데,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니, 놈을 따라가던 하인이 현상금을 노리고 고발해 왔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처치하게 했다. 정말 큰 문제는 임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사실 거사할 때는 폐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임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할 것도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제 우리가 밤늦게 임금을 강안전으로 데려갈 때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다행히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 그 일당을 잡을 수 있었는데, 모두 임금 주변에 있던 내시와 환관놈들이었다. 약 스무명 쯤 되었는데 모두 죽였지만, 임금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죽이자는 사람도 있고, 살려두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 생각에도 지금 당장 임금을 죽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 자리에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을 폐위시키지 않았더라면 혁명의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거제도로 추방시키고 태자는 진도로 쫓아버렸다. 태자의 아들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죽여 버렸다. 새 임금으로는 전 임금의 아우 익양공을 맞았다. 대부분의 무신들의 생각을 따른 것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이전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텐데, 모든 것이 막막하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이의방, 이고를 비롯한 많은 무관들은 벌써부터 제 세상을 만났다고 저 난리들인데. 나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 등 무관들이 고위관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장교들도 모두 벼슬을 몇 등급씩 올려주었다. 이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문신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도 중방에서는 이고가 남아 있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였으나, 내가 말렸다. 이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무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문극겸, 이공승 등 비교적 우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신들은 앞으로 여러모로 이용할 가치가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적대적인 문신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만. 에필로그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 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위치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전 임금 의종은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 출신의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명종 9년 청년 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258년(고종 45) 까지 60여 년간 최씨집권기가 지속된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구이병과 김상병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한달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새벽 한 시까지 각개 전투 및 야간 행군 훈련을 받은 우리 소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나는 훈련도중에 다친 발목 때문에 더했다. 하지만 취침 전 선임하사의 장비 점검 구령이 떨어져 우리는 쉬지는 못하고 장비 손실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검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전에 수통을 잃어버린 박일병이 연병장을 이십바퀴나 돌았던 걸 생각하며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중대장님이 직접 장비 점검을 하는게 아닌가.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발목의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삼십분이 흘렀을까.ㅇ장비 점검을 마친 중대장님이 나타났다. "요즘 정신 나간 사병이 있다. 목숨보다 귀한 장비를 분실해? 그것도 대검을!" 침묵이 흘렀다. "이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어떻게 적과 사워 이길수 있겠나? 대검 잃어버린 김태성 상병은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 삼십바퀴 돌아! 실시!"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검을 잃어버린 건 난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나는 발목 통증도 잊은 채 내무반으로 뛰어들어가 나의 장비부터 살펴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없었던 대검이 있는게 아닌가. 연병장에는 김 상병이 완전 군장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김상병이 내무반에 들어왔다. 모두들 말없이 쳐다봤다. "야! 구 이병 니가 뛰었다카모 아마 황천길 갔을끼라. 내 대검 이리주라." 지난 밤에 불침번이었던 김태성 상병은 잠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나의 고민을 눈치챈 것이다. 김상병은 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즘은 쫄병들 때문에 일요일도 없다카이." 이틀 뒤 김상병은 나에게 대검 한자루를 구해줬고, 그 뒤 우리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김상병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자현 님/경남 남해군 청선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3 - 수재는 일찍 끝난다 : 셸링(1775-1854년) 그 때 세계에서는 1796년: 청,백련교의 반란 발생 1801년: 독일 리터, 자외선 발견 튀빙겐의 삼총사 헤겔, 휠덜린, 셸링은 프랑스혁명의 소식을 듣고, 혁명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림은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피히테의 철학이 각광을 받고 있을 때 독일 튀빙겐 대학에는 흔히 삼총사라고 말하는 세 젊은이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이순으로 말하면 헤겔, 휠덜린 그리고 셸링이었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있으면서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혁명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전 유럽세계를 희망의 고지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은 그 정신적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동료들이 모여 자유를 선포하기도 했고, 독일 사상계에도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넘친 포부를 안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휠덜린은 철학적 시인의 길을 택했다. 그의 시는 상당히 비중이 큰 철학적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M. 하이데거가 그의 시를 철학적 존재 해명에 등단시키기도 했다. 그 당시의 관례대로 휠덜린은 대학을 끝내면서 프랑크푸르트의 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은행가 아들의 교육 책임을 맡게 되었다. 명문가의 가정교사 기간에 학문적 업적을 쌓아 인정을 받게 되면 대학으로 진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 관습은 유럽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영국 같은 데서는 학자들이 명문가의 보호 밑에서 일생동안 학문적 활동을 계속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불안하게도 휠덜린은 가르치고 있던 어린이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드디어는 그 가정을 떠나 실연의 쓰라림을 안고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남유럽 등지를 헤매던 훨덜린이 독일로 되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육체적, 정신적으로 초췌하고 황폐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침내는 정신 이상자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말년의 시들은 그런 정신착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철학적인 것들이다. 세 사람이 다 대학에 있을 때 그리스 문화와 정신에 도취되어 있었으나, 그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휠덜린이었다. 하이데거가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스적인 존재성과 시적인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철학의 길을 택했다. 헤겔은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취급하다가 약간 늦게 철학으로 전환했고, 셸링은 처음부터 철학의 문을 두들겼다. 셸링은 헤겔보다 5년이나 낮은 나이였다. 그러나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16살에 대학에 들어왔고, 누구보다도 먼저 철학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던 것이다. 셸링은 칸트와 피히테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피리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피히테는 아직 20살이 못되는 셸링이 자기의 철학을 해득하고 전개시켜주는 것을 보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피히테의 추천을 받은 셸링은 20살이 갓 넘은 약관으로 예나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평있는 교수의 추천이 무엇보다도 빠른 학계진출의 지름길이었다. 거의 해마다 한 권씩의 저서를 발표한 셸링의 인기와 장래성은 학계의 큰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의 주관적인 인식론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해석해 독일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곧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를 연구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자연적 존재를 철학에 받아들이는 범신론 철학의 창조자였다. 그래서 철학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칸트, 피히테를 따르는 주관적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실재론적 철학이라고 분류했다.그 대립적인 분류가 끝나자마자 셸링은 이 둘을 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깨달았다. 둘을 합쳐 동일성의 철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피히테의 철학은 발전적 해소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피히테는 곧 셸링은 자신의 철학을 잘못 전개시킨 과오를 범한, 자기와 무관한 철학이라고 선언해버린다. 물론 셸링은 이미 피히테의 철학을 강 건너 간 것으로 무시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셸링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뒤따랐다. 너무 일찍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기 때문에 더 발전해나갈 여지와 길이 막히고 말았다는 점이 그 하나였다. 그는 오히려 3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자신의 학문적 업적은 이미 채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부인과의 사랑때문에 결국은 예나를 떠나야 하는 개인적 불운도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먼 후일에 철학적 후배였던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게 되었을 때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의 후광을 기대하면서 셸링을 초빙했으나, 역사는 이미 셸링의 철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때늦은 학설로 취급해버렸다. 그래서 헤겔보다 일찍 철학계에 등단해서 헤겔보다 늦게까지 철학계에 남았으나, 그의 철학은 항성이 아닌 혜성의 운명과 비슷하게 일찍 나타났다가 일찍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것이 천재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마누라'는 원래 '임금이나 왕후를 일컫는 극존칭' 우리나라 말에는 남성이나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 여럿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말도 그 사람이 혼인을 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한 벼슬을 했는지에 따라, 그리고 누가 부르는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지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를 지칭할 때, '남정네, 남진, 남편, 사나이, 총각' 등이 있고, 여자를 지칭할 때에는 '아내, 여편네, 마누라, 집사람, 계집, 부인, 처녀' 등 꽤나 많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쓰인 것인지는 대개 알려져 있지만, 그 어원들을 아시는 분이 많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아내'는 지금은 그 표기법도 달라져서 그 뜻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안해'였지요. '안'은 '밖'의 반의어이고, '-해'는 '사람이나 물건을 말할 때 쓰이던 접미사'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안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사람'이란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거기에 비해서 남자는 '바깥 사람, 바깥분, 바깥양반' 등으로 쓰이고요. '부부''를 '내외'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지요. '여편네'는 한자어이지요. '여편'에다가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네'를 붙인 것이지요. 어느 목사님께서 혹시 남편의 '옆'에 있어서 '여편네'가 아니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즉 '옆편네'가 '여편네'가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에서 그렇게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자를 뜻하는 '남편'은 도저히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지요. '여편네'와 '남편'은 서로 대립되는 말입니다. '마누라'는 무슨 뜻일까요? 지금은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그것도 같은 지위나 연령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아내를 지칭할 때나 또는 아내를 '여보! 마누라' 하고 부를 때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예를 들면 '주인 마누라' 등)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 '마누라'는 '마노라'로 쓰이었는데, '노비가 상전을 부르는 칭호'로, 또는 '임금이나 왕후에게 대한 가장 높이는 칭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존칭으로서, 높일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그리고 부르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지위가 낮은 사람이 그 웃사람을 '마누라'라고 부르거나 대통령이나 그 부인을 '마누라'라고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큰 싸움이 나거나 국가원수 모독죄로 붙잡혀 갈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아내의 호칭으로 변화하였는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남편을 '영감'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영감'은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판사나 검사를 특히 '영감님'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옛날 그 관원의 등급과 유사하여서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남편보다도 아내를 더 높여서 불렀던 모양이지요? 남자는 기껏해야 '정삼품'으로 생각했는데, 아내는 '왕이나 왕비'로 생각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마누라'와 '영감'은 대립어가 된 것입니다. 왜 늙지도 않은 남편을 '영감'이라고 불렀을까를 의심하셨던 분은 이제 그 의문이 풀리셨 을 것입니다. 지난 날의 유행가 중에 '여보! 마누라, 왜 불러?' '영감, 왜 불러?' 하는 가사가 기억이 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심학의 철학가 - 육상산 / 왕수인 죽음 또한 자연이 아닌가 - 육상산 왕수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철학가 육상신은 54세에 죽었다. 주자의 성즉리 에 그는 심즉리 라는 학설을 듣고 나와 주자와 쌍벽을 이루었다. 주자는 아홉 살 아래이던 그의 논적 육상산의 부음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육상산의 부임지이던 형문(호북성)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죽기 수일 전, 가족에게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이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했더니 육상산은 조그만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숙환인 폐결핵이 재발하여 그는 자신이 오래 못살 것을 알았다. 정무를 정리하고 가사를 정돈했다. 그는 약물까지도 거절해왔다. 목욕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의관을 정제한 뒤 반듯하게 앉아서 죽었다. 12월 14일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마음이 곧 천리 라고 한 왕수인 왕수인의 호는 양명이다. 그는 명나라 사람으로 절강성 여요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철학자로 정치에 참여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신호의 난 을 평정하여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도 폐질환으로 57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왕수인은 육상산의 심즉리 를 중심으로 하여 마음이 곧 천리라는 학설을 내세웠다. 모든 일과 모든 존재의 리는 내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마음 밖에 따로 이치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였다.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 곧 우주라는 육상산의 학설을 계승한 왕수인은 만물이 모두 사람의 마움에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친구에게 꽃을 예로 들어 만물이 사람의 마음에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친구가 낭떠러지에 있는 꽃을 보고 먼저 물었다. 이 세상에는 마음 밖에 어떤 사물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 꽃나무는 저절로 피었다가 저절로 떨어지곤 하지 않는가? 그것이 나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네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다 고요했었다. 그런데 자네가 여기에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는 이 꽃의 빛깔이 일시에 또렸해졌다. 이것으로 이 꽃이 자네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왕수인의 대답이었다. 네가 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꽃의 존재가 너에게 감지된다는 뜻이며, 꽃의 존재는 곧 너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몸도 사람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주재되며 모든 행동은 마음속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다. 몸을 주재하는 것은 곧 마음이다. 그러니 모든게 어떻게 마음밖의 일이겠는가? 그의 제자들이 임종을 앞두고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떠하십니까? 이 마음이 광명한데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도학자들은 모두 죽음앞에서 지극히 담담하였다. 서화담과 소강절, 주자와 퇴계, 육상산과 왕수인, 그리고 토정선생. 마음이 이미 평안하다. 의 서화담. 삶과 죽음은 보통있는 일이다. 의 소강절.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의 육상산.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의 퇴계선생.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서러워 말아라. 의 토정선생. 퇴계와 토정, 육상산은 정좌한채 영면에 들었다. 이들은 모두 목욕을 마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의관을 정제한 뒤 자리를 정돈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화담은 성인들은 모두 이렇게 하셨다. 라고 답할 뿐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7.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찾기 경쟁 남미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나라들은 전부 스페인 어를 쓴다. 이것은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나머지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남미 대륙의 이러한 분할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에 두 나라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였다. 14세기경부터 중세 봉건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붕괴와 중세 문화의 황혼 속에서 새로운 근대 사회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르네상스, 종교 개혁, 지리상의 발견으로 표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인도 항해,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경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유럽 인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은 그들의 약탈로 인해 기존의 문명이 파괴 되고 혹심한 약탈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이런 지리상의 발견의 주동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새로운 인도 항로의 발견자인 바스코 다가마의 말처럼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는 `기독교인과 향료`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고 당시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가 되는 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슬람의 침입에 시달린 두 나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스터 존(Preste John)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시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은 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약 이 국가를 발견하고 동맹을 맺는다면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의 발견에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앞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했지만 적도 근방까지만 탐험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480년대에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년에 드디어 `희망봉`에 도달했다. 한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했고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도와 줄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1484년 포르투갈의 국왕 조안 2세를 만난 콜럼버스는 자신의 인도 탐험 계획을 열심히 후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왕은 측근들의 의견을 토대로 하여 그를 허풍쟁이 공상가로 단정하여 상대해 주질 않았다. 게다가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 발견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희망봉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은 내정의 불안으로 인해 당분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에 실망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가 자신의 계획을 후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마음이 움직였고 같은 해 8월 3일 새벽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했다. 이 선단은 출발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어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의 어느 곳이라 믿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493년 3월 15일 콜럼버스 일행은 자신들이 출발했던 스페인의 팔로스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90여 명이었던 일행이 약 40명으로 줄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도 향료와 금이 아니라 약간의 노예와 금속 제품, 거기에 앵무새와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경쟁 국가인 포르투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교황은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600여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의 발견지는 스페인이, 동쪽의 발견지는 포르투갈이 차지한다고 선언했다(493). 포르투갈 왕은 이에 즉시 항의했고 양국은 약 1년쯤 협의한 후 경계선을 좀더 서쪽인 서경46도 37분으로 옮겼다. 이것이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이다.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했지만 당시로서는 교황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브라질로부터 대서양, 아프리카, 인도양,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이 아메리카, 태평양, 필리핀을 자기네 영토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 개혁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영토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3) 할리우드를 통해 본 미국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에게는 총명하고 귀여운 일곱 살 난 아들이 있다. 그 아이는 조립식 장난감으로 트럭 하나를 만들어 보이더니, 스스로 바닥에 널려 있는 각종 권총 등의 완구로 구성된 전투부대의 요원이 되었다. 흥이 나기 시작하자 엄마의 아이새도를 몰래 가져와 얼굴에 몇 개의 선을 긋고는 자동소총을 들고 진지의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며 '뚜뚜' 하며 자동소총을 마구 쏘아대는 시능을 하더니 난 터미 네이터다'라고 소리켰다. 그 아이는 할리우드 액션스타 슈왈츠제네거를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폭력으로 영웅을 만들어 내는 할리우드영화는 더 강력한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 폭력영화의 가장 보편적 표현방식이다. 60년대를 전후해 나온 미국 서부영화에서는 흘로 말을 타고 적을 무찌르는 협객이 청소년들의 숭배와 모방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와 해방을 위해 폭력에 대항하여 싸웠고, 이는 미국정신과도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이 후 ' 도시의 영웅'으로 형상화한 할리우드영화는 '자유와 평등' 을 추구한다는 미국정신과는 도저히 연관지을 수 없다. 홀로 좌충우돌 싸우며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어김없이 법을 위반해 가며 폭력으로 폭력을 누르는 영웅이 나타난다. 이 영웅은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로 포장되어 한 걸음에 한 사람씩 죽이는 지독하게 잔인한 수법으로 관중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영화는 관중에게 감성적 충격을 주는 외에, 미국사회는 개인을 강조하는 국가라는 것과 현실적으로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은 없다는 점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미국이란 나라는 경찰관이 범죄자에 대해 총을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또 어쩌다 발사한 총이 잘못 되는 경우에는 평생 연루되어 그 책임을 벗을 수 없는 사회이다. 개인 영웅주의의 출현은 할리우드가 추구하는 상업적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미국문화가 추구하는 개성해방과 자아숭배와도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로 얽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해방이 지나치다보니 인간관계는 극도로 냉담해지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따르는 책임은 없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서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은 사라지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仁)'이란 개념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영웅'이 나타나 사회를 구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 자신이 직접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인이 '스크린 영웅' 에 대해 어느 정도로 숭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 얼마 전 {월드 리트레이처}에 실린 적이 있다.미국 액션스타로 스크린의 영웅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전기가 출판되었을 때 한 미국 소녀가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기자에게 나는 그가 사람 죽이는 장면보기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요, 난 그가 사람 죽이는 장면 보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 죽이는 걸 보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해요! 그래요, 난 사람을 죽여요! 나는 이 아이가 실지로 흉칙한 살인현장을 목격해도 아주 냉정하고 흥미롭게 구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인이 두려워졌다. 개인 영웅주의에 따라 미국문화 속에는 썩어빠진 향락원칙이 돋아나게 되었다. 심각한 수준의 외채와 가정파괴, 종족차별, 폭력범죄, 성해방, 마약 등 일련의 사회문제들이 미국대륙을 강타하여 미국인들은 극도의 비관으로 방황하며 타락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할리우드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었고 스크린을 통해 마구 퍼 져 나갔다.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사회문제를 다룬 예술영화를 제작해 사회를 계도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겠으나 고액의 출연료와 거대한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는 할리우드로서는 당연히 흥행수입을 올릴 수 있는 저질오락물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의 미국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돈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최종의 목표가 돈이기 때문에 금전지상주의와 향락주의는 미국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그들이 만든 영화에서도 종횡무진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만들어진 미국영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다. 미국은 각종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여기에서는 열심히 일할 필요또 없고 힘들여 찾아다니며 애쓸 필요또 없다. 어느날 갑자기 행운의 여신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나 내 소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비록 이전에는 내가 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고집한 결과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한 분야나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하거나 힘들여 자기 직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미국에 보편적으로 만연된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제 막 경제개발이 시작된 중국으로서는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단결하고 노력하며 직업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중국인의 삶에 대한 이런 태도는 사실 중국문화만이 가지는 훌륭한 점이다.우리는 이런 문화를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문화침략'으로 인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4) 할리우드영화를 반대하는 나의 이율배반 어떤 사람은 나더러 지나치게 열심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개방정책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무엇에나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열심히 찾았던 것과 흡사하게 열심이라고. 그렇다. 나는 몰두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스스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 빠져 지냈다. 이때 나는 대략 200편 정도의 할리우드영화를 보았다. 나는 영화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영화평론과 영화와 관계되는 잡지들을 수없이 보며 나름대로의 분석을 하였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내가 본 거의 모든 영화가 이른바 대표적인 명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때 나는 미국영화의 해적판들이 대만과 홍콩을 거쳐 중국대륙으로 들어오는 루트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점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미국인이 이런 것을 도둑질해서 홍콩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홍콩사람들은 먹고 살 길이 없을 것이며 문제는 미국에서 홍콩으로 가져 오는 것이 아니고 홍콩에서 중국대륙으로 들여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_이렇게 할리우드영화를 수없이 반복해 보면서 나는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하였다. 할리우드영화는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영화 속의 폭력장면도 점점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대표적 명작이라고 하는 이런 영화 중에 폭력과 색정에 관계되지 않은 것은 불과 10퍼센트 안팎이었다. 나는 이지적인 태도로 영화를 보면서 그것들을 '예술적'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모든 중국인들의 생각이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영화들이 예술이라는 두 글자와 연관짓기는 어려울 만큼 피비린내 나는 폭력장면이나 선정적인 장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런 영화들이 소위 예술적 승화를 했다고 과장되는 것이다. 월남전에 관한 어느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미국병 시피 목에 칼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도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칼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목은 천천히 잘려나갔다. 머리는 목에서 떨어져 나가 딩굴고 선혈이 뿜어져 나와 스크린을 가득 채우면서 영화제목이 나타났다. 20세 이하의 중국 청소년들이 이런 영화를 보았을 때 과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적으로 아주 열심히 '예술'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겠는가? 사실 미국문화와 미국적 생활방식이나 사고가 30세 이상 중국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루 아침에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중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는 분명히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고의로 이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로부터 야기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기 나라의 미래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식으로 전세계의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더욱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작년 성탄절 때 미국에서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폭력영화가 나와 관객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뉴욕지하철에서 영화장면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국내의 여론이 들끌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어떤 책임감 있는 의원은 의회에서, 할리우드가 이런 영화를 만들 때는 머리를 좀 굴리라고 격렬한 어조로 건의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예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지금 미국 청소년들이 인기있는 책이나 TV 혹은 영화를 보고 어떻게 은밀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배운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매체들이 청소년의 정서에 어떤 형태로든 작용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임감 없는 태도는 미국사회의 공리주의에서 기인된 것이다. 멀리 바라볼 줄 모르고 눈 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할리우드영화산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중 .미 지적재산권 협상과정중 미국은 자기의 독점자본으로 중국에서 오디오나 비디오 제품을 생산 및 발행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당연히 중국 정부로부터 거절당하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책임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할리우드영화를 '예술적'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는 나는 어떻게 보면 영락없는 '위선자'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에게 '위선자'라고 한다면 나는 이를 아주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위선을 부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하의 자녀를 한 달 동안만 나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는 200여 편의 미국영화를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 어떻게 될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눈사람이 된 연탄재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새해를 축복하는 서설이 내렸다고 다들 기뻐하면서 거리를 쏘다녔다. 아파트 단지 한 모퉁이에 가득 쌓여 있던 연탄재들도 기쁜 마음은 사람들과 똑같았다. 연탄 아궁이로 들어갔다가 희멀겋게 볼품없이 된 그들에게 함박눈이 하얀 옷을 입혀 준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눈발이 가늘어지자 너나없이 밖으로 나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눈 뭉치를 만들어 눈싸움을 하다가 나중에는 누가 가장 빨리,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시합을 벌였다. 눈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습기가 없는 탓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아이 하나가 아파트 뒤뜰에 쌓인 연탄재 하나를 집어들었다. 난생 처음 눈을 보고 마냥 신기해하기만 하던 연탄재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그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는 연탄재를 눈 위에 놓고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 뭉치가 금방 다른 아이들의 눈 뭉치보다 더 크게 되었다. 아이는 신이 났다. 아무도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기뻤다. 연탄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으로 태어나 결국 여기에서 죽나 보다 하는 절망감에 눈물이 났다. 그러나 차차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록 눈 뭉치 속에 갇혀 갑갑하기는 했으나 그리 싫지는 않았다. 연탄재의 신분에서 눈사람의 신분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스스로 운명을 바꾸어 볼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탄재는 이리저리 굴려질 때마다 온몸에 멍이 들었으나 조금도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덩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중압감에 못 견뎌 연방 입 밖으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신분이 상승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통쯤은 참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눈사람을 가장 빨리, 가장 크게 만든 아이는 연탄재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 아이였다. 아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새 아이의 아버지가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나 기념사진까지 찍어 주었다. 연탄재는 이제 자신은 연탄재가 아니라 눈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영원히 순결한 눈사람으로 살게 해준 아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예전의 자기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더덕더덕 추한 모습으로 쌓여 있는 연탄재들에게는 연민의 정을 품었다. 다음날, 눈이 그치고 햇살은 빛났다. 또 그 다음날에도 햇살은 내리쬐었다. 자연히 햇살에 눈사람이 녹아 내렸다. 연탄재는 예전보다 더 흉한 몰골을 하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햇살에 눈사람이 녹는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연탄재는 그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글터 → 이글저글 대구는 2,000,000개 이상의 알을 낳지만 실제로 새끼가 되는 것은 다섯 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물고기 하렘, 수컷은 수백만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지만 수컷이 죽으면 암컷 중 가장 강한 놈이 수컷으로 전환하여 암컷들을 이끈다.정어리라는 물고기는 이 세상에 없다. 사실 정어리라는 이름은 작은 물고기들을 뜻하는 말로 특별한 어떤 종류를 뜻하는게 아니다.금붕어의 그 아름다운 황금빛 색깔은 어두운 어항이나 흐르는 시냇물 같은 곳에서는 변한다. 그 빛나는 금빛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못이나 혹은 조명을 받는 어항 속에서 살도록 하여야 한다.물고기는 오염된 물 속일수록 기침을 더 한다.개미의 IQ는 150이나 된다. 개미는 기억도 생각도 못한다. 그러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예를 들면 미로를 사용한 실험에서 개미는 빠르고 정확한 기억을 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벌은 자외선까지 볼 수 있다.어떤 곤충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100그램의 꿀을 모으기 위해서는 7,000마리의 일벌들이 330,000 송이의 꽃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벌에게는 눈이 5개있다. 머리위에 3개, 앞에 2개있다.많은 곤충들은 털로 소리를 듣는다. 수펄의 경우 더듬이를 따라 작은 털이 많이 나 있다. 소리가 나면 털이 떨리고, 이 진동이 중앙 신경계에 전달되면 신경계에서 소리를 판단한다. 바퀴벌레는 배에 털이 나 있어서 소리를 배로 듣고, 송충이는 온몸이 털로 덮여 있으므로 온몸으로 소리를 듣는 셈이다.모기의 이빨은 47개이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