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7 04:07 【독서편지】: 제 70 호 風磬 조회 수 10,932 추천 수 616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0 호4339.11.27 (10.0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환경부에서는 환경보전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환경영화 시나리오”를 아래와 같이 공모합니다. 2006년 11월 24일 환 경 부 장 관□ 주 최 : 환경부□ 시나리오 주제 ○ 환경보전 의식을 제고할 수 있는 창작 시나리오로서 환경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내용 <예시> ·환경오염의 실상을 보여주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은 내용 ·환경과 건강과의 관계를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 ·정부·기업·사회단체에서의 환경보전 활동 내용 ·친환경상품이 무역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 등□ 응모자격 : 제한 없음□ 공모 일정○ 공모기간 : ‘06. 11. 24(금)~’07. 1. 31(수) - 접수기간 : ‘07.1.22(월)~’07.1.31(수)(10일)○ 제출방법 : 방문 또는 우편접수 ※ 우편은 등기, 접수마감일 소인까지 유효○ 제 출 처 - (427-729)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1번지 환경부 민간환경협력과 환경영화시나리오 공모전 담당자 앞 ※ 문의 : 환경부 민간환경협력과 (02-2110-6688, 박혜정)○ 결과발표 : 2007. 2. 15(예정), 환경부홈페이지 게재 및 개별 통보 글터 → 명언 / 격언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 법. 고령으로 죽더라도 젊음을 간직한 채 죽는다. / A.W.P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씨받이 여인의 한과 영광 - 공예태후 공예 태후 임씨는 고려의 제 16대 인종에게 사랑과 예절과 부재를 함께 바쳐온 현비였는데, 애초에는 왕자를 보기 위한 인종의 '씨받이 여인'으로 뽑혀들어온 궁인이었다. 임씨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로 문하시중 이위의 외손녀가 되니까 말하자면 문벌 좋은 집안의 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씨받이 여인으로 대궐 안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많은 설화적인 이야기를 뿌려 왔었다. 그녀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외조부 이위는 꿈을 꾸었다. "내 꿈에 황색의 커다란 기가 원서방(사위) 집 중문에 세워졌는데, 그 깃발의 꼬리가 대궐안 선경전 추녀 밑에 닿아서 나부끼더란 말일세." "그래서요?" 이위의 사위 임원후는 목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두고 보게. 이제 태어날 애가 여식이라면 다음에 틀림없이 대궐안 선경전에서 살 것이네." 그러한 기대, 실상 꿈으로 인한 기대였지만, 어떻든 그와 같은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안고 태어난 임씨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다. 그 때까지 대궐하고 아무 인연이 없게 되자 임씨의 부모는 혼처를 물색했다. 그녀는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를 치른 그날 밤의 일이었다. 신랑이 신부의 방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신부의 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신부는 거의 사색이 되어 방바닥을 뒹굴었다. 신부의 입장도 입장이려니와 일이 이지경이 되자 난처한 쪽은 신랑이었다. 이직 신방에 들어 초야를 밝힌 사이도 아닌데 신부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뛰어들어가 그녀를 간호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신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종종걸음만 치고 있는데 잠시 후 신부의 어머니가 방 안에서 역시 죽을 상이 되어 나왔다. "이 사람아, 신부가 저 지경으로 다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 글쎄요....." "진정 미안하게 되었네. 신부가 저런 꼴이니 저꼴로 신방을 꾸밀 수도 없는 일, 신방은커녕 의원을 불러 무슨 병인지 진맥부터 보아야겠으니 오늘은 그냥 자네 집으로 돌아가고 뒷날을 보세." 신부 어미의 간곡한 말에 신랑을 할 수 없이 신부집을 물러 나왔다. 신부의 병은 그날 하루가 지나자 씻은 듯이 가셨다. 신부 집에서는 점치는 사람을 불러 하필이면 신방을 꾸미려던 그 시각에 신부가 병이 난 까닭을 점쳐 보았다. 점쟁이는 점을 보고 나서 누가 엿들을세라 조심스런 말로 점괘를 털어놓았다. "병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집 따님의 귀함은 감히 저 같은 점쟁이가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위에 있던 가족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점쟁이의 입을 주시했다. "이 집 따님은 반드시....." 점쟁이는 잠시 말을 끊고 신부 임씨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반드시 국모가 될 것입니다." 하고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그 말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랐다.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왕비)가 된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졌다. 자연히 김인규 아들과의 혼사는 깨어져버리고, 급기야 이 소문은 당대의 세도가 이자겸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뭐라고?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될 거라고?" 이자겸은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이자겸은 이미 자기의 두 딸을 인종의 비와 차비로 들여보내 놓고 젊은 임금을 움직여 정사를 멋대로 흔들고 있었다. 이자겸이란 위인은 출세욕이 대단한 인물이라 진작부터 자기의 누이동생을 숙종의 비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고, 첫째 딸은 예종의 비로, 셋째와 넷째 딸은 인종의 비와 차비로, 이렇듯 내리 3대에 걸쳐 왕비를 들여보내어 제 한몸의 영달을 꾀해 오고 있었다. 인종은 자기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책봉하여 조선 국공으로 삼고 관부를 세워 따로이 관속을 두도록 하였으며, 백관들에게 그 사제에 나아가 하례하도록 지시했다. 이쯤되고 보면 이자겸의 권한은 임금인 임종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백관들이 행렬을 지어 이자겸의 집 뜰에서 하례를 할 만큼 세도 당당한 이자겸의 귀에 비록 점쟁이의 점괘이기는 하나 국모가 될 낭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배알이 뒤틀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흥,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된다고? 그러면 지금 국모인 내 두 딸을 쫓아내고 왕비로 들어온다는 말이지?" 안될 소리였다. 이자겸은 벌떡 일어나 가마를 타고 대궐로 들어 갔다. "당장 임원후를 중서령의 자리가 좋으리까, 국공." "원후를 내어쫓아 게성 부사 쯤으로 삼으심이 좋을 듯 하나이다." "알았소. 당장 개성 부사로 나가 있도록 하리다." 이자겸의 미움을 사서 임원후는 중서령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개성 부사로 밀려나고 말았다. 임원후가 개성 부사로 나가 있은 지 1년이 지나서였다. 하루는 아침 일찍 조복을 갖춰 입은 부수가 임원후에게 달려와 느닷없이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바로 어젯밤 일이옵니다, 사또마님." "이 사람, 아침부터 꿈 이야기는......" "아니옵니다. 하도 기이해서 꿈 이야기를 전해 드릴려구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습죠." "어디 들어보기나 하세." 부수가 꿈에서 보니, 사또가 있는 청사의 대들보가 뚝 부러져서 큰 구멍이 생기더니, 거기서 커다란 황룡이 기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이는 반드시 사또마님 집에서 별다른 경사가 있을 징조입니다." 개성 부사 임원후는 황룡 어쩌고 하는 꿈 이야기가 내심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집안에 별다른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부수의 해몽은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이 무렵 이자겸의 무리는 대궐 안팎에서 그 세도와 횡포가 더욱 심해 가고 있었다. 이자겸은 최근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승진한 척준경과 밀착되어 미구에 왕권을 손아귀에 넣을 심산이었다. 척준경은 본디 곡주 사람으로 글을 배우지 못한 무뢰한이었는데 예종 때 윤관 장군을 따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뒤로 출세길이 트인 자였다. 이자겸은 이 척준경을 정 2품의 벼슬 자리까지 올려 주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겸은 그의 아들 지원을 척준경의 사위가 되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은 준경·준신 형제의 권세는 지못 이자겸의 그것에다 비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자겸과 그 당여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 드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자겸이 그놈의 아들놈들 저택이 거리거리에 연하여 뻗쳐 있고, 날로 기세가 성하여 관작을 팔아 뇌물이 폭주하니 썩은 고기가 늘 수만 근이라." "그뿐인감? 즈이 집구석 노복을 풀어서는 남의 재물 약탈하기가 일쑤요." 또한 군국의 일을 주관하려고 왕을 자기 집에 행행하게 하여 책명을 줄 것을 청하며 시일을 강제로 결정, 왕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때마침 척준경의 아우 준신이 병부상서로 있었는데, 상장군 최탁 등이 준신을 미워하여 조만간 일은 터지고 말았다. 최탁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을 먼저 죽여서 그 시체를 궁성 밖에다 던져 버렸다. 낭중 왕의 는 성을 넘어 달려가서 이 사실을 이자겸에게 알렸다. 자겸은 그 아들 지미와 척준경 등 그의 당여들을 돌아보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일이 위급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각 성을 넘어 최탁의 무리를 섬멸합시다, 국공." 척준경이 서둘러 군사를 데리고 대궐 쪽으로 달렸다. 대궐 안에는 이미 상장군 최탁, 오탁,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대장군 권수, 고석 등이 군사를 독려하며 이자겸의 무리와 맞붙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척준경은 군사들을 데리고 주작문에 이르러 성을 넘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자물쇠를 부수고 신봉문에 이르자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최탁의 군사들은 척준경의 군사가 수적으로 많음을 직감하고 낙담이 되어 감히 나와서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척준경은 야음을 틈탄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동화문 행랑에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하여 삽시간에 궁인들이 거처하는 전각으로 번졌다. 놀란 궁인들은 잠자리에 든 모습 그대로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숨어 버렸다. 왕은 불길을 피해 가까스로 말을 타고 연덕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척준경의 무리들은 마침 왕을 호위하고 있던 오탁을 잡아 목 베어 버리고 반대파에 대한 소탕 작전에 나섰다. 대세는 그 사이에 이자겸·척준경의 무리 쪽으로 기울어갔다. 척준경은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원탁, 권수, 안보린 및 대장군 한경, 윤성 등 10여 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그날 밤의 화재로 궁궐은 불에 타 없어지고, 이자겸은 왕을 자기의 사제인 중흥택으로 옮겼다. 이 사건이 수습된 직후 척준경은 문하시랑 판병부사란 직함을 받았고, 자겸은 왕을 모시고 있던 내시 25명을 모두 내보내었다. 결국 왕의 목숨은 이자겸의 손안에 들어가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젊은 왕 인종은 쉬이 절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이자겸에게 붙어 있는 내의 최사전을 포섭하여 그와 비밀리에 이자겸 제거 계획을 세웠다. "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준경을 믿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최사전은 척준경의 위치를 설명하고 나서, "만약 전하께서 준경을 얻을 수만 있다면 병권이 준경에게 속해 있으니 자겸은 자연히 저 혼자 남게 될 것이옵니다."하고 척준경 포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경이 국공(이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까지 맺었고, 그 아우와 아들이 모두 관병에게 살해당했으니 이 일로써 국공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왕은 최사전을 척준경의 집으로 보내어 충의로써 왕실에 힘쓰기를 타일렀다. 겸하여 왕은 준경에게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마음을 다해 짐의 곁에서 돕기를 힘쓰라 당부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가느라고 때마침 이자겸의 아들 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과 서로 싸우게 되었다. 지언의 종은 척준경의 죄를 일일이 들어 죽을 죄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었다. 척준경이 그말을 듣고 마침내 이자겸과 틈이 생겨 버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최사전이 척준경을 달래어 결국 왕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다짐을 받았다. 척준경이 자기 쪽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를 채었는지 이자겸은 왕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급히 서둘렀다. 왕을 죽이는 하수인은 차비로 들여앉힌 자겸의 넷째 딸 이씨였다. 자겸은 차비 이씨에게 독약이 든 떡을 왕한테 올리라고 권했다. 그러나 차비 이씨는 이 사실을 왕한테 알리고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자 까마귀가 그걸 먹고 죽어 버렸다. 자겸이 두 번째로 독약이 든 국을 보내어 왕에게 올리라 했지만 차비 이씨는 이번에도 식기를 들고 거짓 미끄러져서 그 국을 모두 쏟아 버렸다. 이 소식을 왕으로부터 전해 들은 척준경은 일을 서둘러 이자겸의 무리를 급습, 일망 타진하고 말았다. 왕을 위기에서 구해준 차비 이씨나 정비 이씨는 역적의 딸이자 두 사람 다 임금에게 이모가 되니, 임금의 배필이 될 수 없다는 간관의 말에 따라 모두 폐하여 대궐에서 내어쫓았다. 하루아침에 두 비를 잃은 인종은 밤마다 널찍한 침소에서 혼자 잠을 설쳤다. 어느 날 밤 왕은 대궐에서 나간 두 비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서둘러 척준경을 입궐하라 일렀다. 왕을 도와 이자겸을 처치한 척준경은 공신의 칭호를 하사받고 겸하여 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의 별슬에 올라 있었다. "신 준경 등대이옵니다." "오, 어서 오오. 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임자 닷 되와 황규(해바라기) 석 되를 얻었으니 길몽인지 흉몽인지 풀이 좀 해보구려." 척준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임자 닷 되, 황규 석 되를 음미해 보았다. 이윽고 눈을 뜬 준경은 꿈이 길조라 먼저 제 입부터 벌어지는 것이었다. "전하, 임자는 임이니 임씨 성을 비로 맞아 들일 징조요." "옳거니....." "그 수가 또 다섯임은 다섯 아들을 낳을 상서요." "저런. 그리고는?" "그리고 황규의 황은 곧 황이니, 황왕의 황과 같고, 규는 규니 도규의 규와 같음이오니, 이른바 황규라 함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이고......." "옳거니. 그럼 황규 석 되의 그 되란 무엇을 이름이오?" "그야 물론 다섯 아들 중의 세 아들이 나라를 맡아 다스릴 징조이옵니다." 이에서 더 좋은 꿈풀이가 어디 있으랴! 왕은 당장 다섯 왕자를 슬하에 두고 싶었다. 인종은 꿈에 나타난 대로 곧 임씨 성은 가진 낭자를 물색하라 일렀다. 그러자 얼마 후 개성 부사 임원후의 딸이 덕문에서 나서 예절 바르고 부재를 겸비한 낭자라 하여 왕은 그녀를 왕자 다섯을 얻기 위한 씨받이 여인으로 입궁하게 된 처지가 부끄럽고 한스러웠으나 참기로 했다. 인종 4년에 입궁하여 호를 연덕궁주라 칭하게 된 임씨는 인종의 사랑을 받은 지 꼭 1년 만에 왕자 탄생이 길몽에 화합하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오랜만에 왕자를 얻게 되자 그 기쁨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임씨의 처소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기쁨을 전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은기, 채단, 포곡, 안마....... 애정 어린 왕의 예물이 임씨의 처소를 가득히 메웠다. 임씨는 그 뒤로 계속 왕의 사랑을 받이 인종 7년에는 정식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둘째 아들 경을 낳았다. 이어서 셋째아들 호, 넷째아들 충희, 다섯째 아들 탁을 낳았으며, 게다가 승경, 덕녕, 창악, 영화, 네 궁주(공조)를 낳으니 인종의 꿈대로 씨받이 여인의 사명을 다한 셈이었다. 왕비 임씨의 생애는 그러나 씨받이 여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뒷날 의종, 명종, 신종이 뒨 세 왕의 모후로서 왕비 임씨는 그 자식을 보전하는 데 힘썼고, 부도로서 그 부군(인종)을 섬겼으며, 반드시 예절을 따르고 검약으로 가히 그 몸을 지켰으니 75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버린 그녀의 생애는 인종의 찬사처럼 실로 고려의 경사를 더한 왕비였다. 왕비 임씨는 국모가 되어 선경전에서 놀 것이란 꿈 해몽 그대로 평생을 대궐 안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니 씨받이로 입궁했을 때의 조그마한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그 부끄러움은 뒷날 그녀에게 차지된 공예 태후의 예우로 말끔히 가셔진 셈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 이정란 (2/2)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고려시대에는 여성에게 균등한 재산상속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호구단자 등에 기록된 노비의 기록을 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여성이 가지고 온 노비의 소유권이 결혼하여 남자집에 산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즉 여자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노비는 결혼했다고 하여 남편에 귀속되지 않고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부인이 재혼할 경우나, 또는 후손이 없을 경우에 부인쪽의 노비는 다시 친정으로 귀속됨으로써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했던 것이다. 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나라가 법적으로 부부 별산제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부인 명의의 재산에 대해 세금을 더욱 높게 매김으로써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주는 것에 비하면, 고려시대 여성의 재산권 행사는 보다 안정적으로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고, 수절을 강요당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이혼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사신의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측보다는 남성측이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남편에 의해 이혼이 쉽게 요구되는 사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권수평의 경우이다. 당시 견룡이란 관직은 비록 지위는 낮지만 권귀에게 총애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원하였다. 권수평은 이 관직에 보임되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사양했다. 그 때에 친구가 이르기를 “이것은 영광스런 것이다. 대개 부인을 바꿔 부를 구하는데, 그대가 만약 새장가를 간다면 부잣집 중에서 누가 딸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당시 부를 핑계로 이혼하고 새장가를 가는 경우가 흔히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이혼이 남성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충숙왕의 다섯 번째 부인인 수빈권씨는 원래 전형이란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전씨 집안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이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왕명에 의탁하여 이혼을 하고 그후에 왕비가 되었다. 이 경우는 매우 특수한 예이지만, 어쨌든 여성에 의해 이혼이 요구되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혼은 남편과 부인 어느 한 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한 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미 설명한 수비권씨의 경우도 남편의 집안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혼을 할 수 없어, 왕명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서야 이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법적으로도 부모의 양해가 없거나 또 이유 없이 처를 버리는 자는 관직에서 파직되고 유배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칠거지악”이란 아주 애매한 조건으로 부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과 달리 애(아들)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부인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고려시대에는 아들선호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전이나 묘지명의 기록 중 “무자”라고 하여 자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것이 비로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혼 이후에 또는 과부로서 재혼은 법적으로 가능했는가? 고려시대에 법적으로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에 의해 청원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산기 이상의 처로 외명부의 사람이 된 자는 재가를 허용하지 말고, 판사 이하에서 6품 이상 관리의 처는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재가를 허용하지 말며, 어긴 자는 실절한 죄로 처하십시오. 또한 산기 이상 관리의 첩 및 6품 이상의 처와 첩이 스스로 수절하기를 원하는 자는 문려에 정표하여 상을 주십시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마직막 왕의 재위 기간까지도 여성의 재혼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일반 여성에 대한 재혼 금지규정이 아니고, 산기 이상 관리의 처로 외명부에 속한 여성의 경우 재혼을 허용하지 말고, 6품 이상 관리의 처인 경우도 3년간만 재혼을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청원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제한한 적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여성의 재혼은 흔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왕의 부인중에도 재혼녀가 있었다. 이미 앞에서 본 충숙왕비인 수비권씨의 경우도 그 예이다. 충렬왕의 세 번째 왕비인 숙창원비도 역시 과부였는데, 왕에게 재혼하였다. 또한 충선왕비인 순비허씨는 원래 평양후 현에게 시집가서 3남4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죽자 그 후 충선왕의 비가 되었으며,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여성의 재혼이 흔하였음을 보여주는 용어로 의자라는 것이 있다. 의자란 전 남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이런 의자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었다. 의자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들이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에까지 끼었다는 사실은 의자가 일반적인 존재였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여성의 재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고려시대는 “양측적 친속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도 역시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친족범위에 대한 민법 규정은 1990년에 와서야 비로소 개정되어 부계와 모계 혈족 모두 8촌 이내로 되었다. 이 민법의 개정 이전에는 조선 후기 부계중심의 종법제도의 영향으로 부계 8촌, 모계 4촌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또 하나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양측적 친속사회였던 고려에서는 그만큼 친속 내에서 외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처속이나 외가의 친족 내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복제와 음서제이다. 오복제는 상례에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법이다. 아버지의 상에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고 어머니 상에는 자최 3년복을 입으며, 조부모 상에는 그보다 낮은 단계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웃나라였던 중국에 비해 고려시대에 시행되 있던 오복제는 상대적으로 처족이나 외가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외할아버지 상에 5개월 상복을 입은 것에 비해 고려의 경우는 1년 상복을 입고 있으며, 중국에서 상복을 입지 않았던 처의 형제에 대해서 고려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처족이나 외족이 친족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친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관리등용방식은 과거제도 이외에 음서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음서제도에도 여성의 지위가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음직이 수여되는 범위는 해당 관리의 아들.손자.사위 등에서, 협5녀나 심지어 협22녀에까지 이르고 있다. 협5녀나 협22녀라는 것은 가족의 계보에 끼어 있는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옆과 같다. 옆의 그림에서와 같이 음직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음직을 주고받는 처음과 끝은 남성일지라도 그 사이에 1명에서 5명의 여성이 끼어 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을 주는 것이 바로 협5녀의 규정이다. 이렇듯 어머니에서 딸로, 비록 중간에 몇 명의 아들이 끼어 있을지라도 정해진 숫자만큼 여성이 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의 족보는 조선시대에 남계만을 기록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 쪽도 끝까지 밝혀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여성의 계보를 기록하여 놓지 않는다면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 족보가 음서의 혜택을 누리려는 목적만으로 여성의 계보를 기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상으로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적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비록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호적에 기록된 형제 자매의 서열 순서는 무조건 아들을 우선 순위로 기록하였던 조선시기와 달리 출생 순서였다. 즉 누이와 남동생이 있는 경우 호적의 기록은 누이와 남동생 순서로 이루어졌다. 또한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몇녀 몇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인 듯 싶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사과 한알에 담긴 설레임 아빠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쁙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내게는 며칠만에 나타난 아빠의 초췌한 모습과 불편한 산골 생활이 너무 낯설고 끔찍하기만 했다.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응해야만 했다. 우선 전학을 했다. 작은 산골 마을이라 그런지 급우들은 내가 왜 전학을 와야만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있잖아, 쟤가 집이 망해서 전학왔다는 그 애야." 내가 지나가면 모두들 수군거렸다. 비웃음 섞임 말에 몇 번이고 울컥했지만 그럴 때마다 입술을 꼬올 깨물었다. 그리고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엇다. 상처 받은 나는 그 아이들을 경계하고 미워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너무 외롭고 슬펐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다.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우정과 사랑은 설레임에서 시작한다고, 네가 아직 우리에게 설레임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우리는 너의 설에임을 기다리고 있어.'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삭막한 현실에 부딪쳐 까맣게 타 버린 가슴속에 훈훈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쩌면 내가 먼저 벽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내게 다가오는 게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바보처럼 그들만 원망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짝궁인 초희에게 사과하나를 내밀었다. "우리 할머니가 너랑 같이 먹으래." 그렇게 말해 놓고서 나는 부끄러워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그런 내게 초희는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그 뒤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참 행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쪽지는 초희와 몇몇 친구들의 공동작품이었다. 이제 가정 형편도 어느정도 나아졌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쪽지의 마지만 글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설레임이 있는 만남은 그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나에게 그런 행복을 일깨워 준 그 친구들이 너무도 고맙다. 이유록 님/경북 구미시 공단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0 - 새로운 철학의 문을 열다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년) 그때 세계에서는 1767년: 영국, 타운젠트 조례 제정 1778년: 프랑스, 미국과 공수동맹 및 통상조약 Immanuel Kant /1724-1804 '1781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하고 물으면 누구나 망설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1789년을 잘못 얘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해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1년 일어난 아주 조용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이 출간된 것이다. 물론 그 책의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서양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키 작은 세 거인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 베토벤 그리고 칸트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칸트는 가장 왜소한 체구에다 볼품없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대학의 사강사로부터 시작해 교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84세까지 살았으니까 다른 두 사람보다는 월등히 오래 산 셈이다. 그는 한평생 쾨니스베르크 시밖에 나가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일생동안 철학에 몰두했었다. 그 칸트가 18년 동안 어떤 학문적 작업에 열중해 있다는 사실은 동료교수나 친지들에 의해 알려져왔으나, 그 연구활동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바가 없었다. 다 아는 바대로 칸트는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본 일도 없었고, 혼자 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하곤 했는데, 단 한번 루소의 "민약론"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늦추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칸트가 계몽주의 사상에 뜻을 둔 것은 프랑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볼만도 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학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칸트가 자기 일생의 대표작이며 세계 철학사의 이정표가 될 정도의 저서를 내놓게 된 것이다. 그 책은 결코 쉬운 내용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철학계의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 책의 영향력은 확대되어나갔다. 초판을 수정한 재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수정한 제 3판이 나왔을 정도였고, 그 수정을 하게 된 원인도 사회적 물의에 의한 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책의 비중도 큰 것이나, 독일 사회의 문화 및 철학적 수준도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보아 좋겠다. 이 책이 갖는 몇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대륙의 철학자들, 곧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에 비롯한 이들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의 기초와 방법을 수학, 기하학과 같은 확실하고 명백한 기반 위에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대표적인 저서"윤리학"에는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논증된 문제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영국의 철학자들은 경험론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근거와 방법은 심리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인식은 심리적 과제이며, 그 사유의 정확성과 타당성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처음에 대륙적인 이성론을 따랐다. 모든 진리는 이성적 사고와 일치되어야 하며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D.훔을 읽고 난 뒤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철학의 제 3의 완전한 기초와 방법은 무엇인가? 칸트는 그것을 논리학이라고 생각했다.모든 지식과 진리는 논리적 사유에 따라야 하며, 논리의 원칙이 인식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륙적인 수학, 기하학적 연역방법이 논리적인 추리로 지양되고 영국적인 경험 심리주의가 보편타당성 있는 진리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논리적 철학의 체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 이후부터는 수학, 기하학은 물론 심리학이 유일한 철학의 과학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약화되고 논리학이 철학의 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논리실증주의나 언어분석의 철학이 그 원조를 칸트에게 두고 있는 경향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 혁명이 정치사에 큰 거봉을 만들었듯이 독일철학은 독일 관념론이라는 철학계의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은 그러했다. 우리나라 철학계의 선구자들도 대개는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철학과 강의실에서 열심히 강독되었다.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 서울대의 최재희 교수와 박종홍 교수, 고려대의 이종두교수 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들은 최근까지 필자와 같은 시기에 강의를 하고 있었던 분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꿩 먹고 알 먹고'가 '일석이조'란 의미로 쓰이는 까닭은? 꿩 먹고 알 먹고'란 말은 '일석이조'란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지요. 왜 그러한 말이 나왔을까요? 꿩처럼 주위의 소리에 민감한 동물도 드물 것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는 소리만 들으면 금방 튀어 날라가 버리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을 품고 있을 경우입니다. 알에 대한 모성애가 강합니다. 꿩을 기르고 있는 곳이 있으면 한 번쯤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알을 품고 있는 꿩을 발견하면, 꿩도 잡고 알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꿩 먹고 알 먹고'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특이한 유언 - 황진이 / 조조 부자 길가에 시체를 버려주오 - 황진이 재색을 겸비한 명기 황진이는 한창 무르익은 나이 사십을 전후해서 죽었다. 송악산 옛 터전의 번화했던 그 시절 어쩌다 이 봄이 가을인양 쓸쓸한가.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의 도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 때는 서화담의 문화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그 시체를 동문 밖 길가에 버려서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해달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하지 않고 그녀를 황해도 장단 근교에 고이 묻었다. 조조, 그에게도 죽음이 난세의 영웅 조조 앞에도 죽음은 찾아왔다. 건안 25년(220년), 일세를 풍미하던 지략가 조조도 6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천하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만큼 굳이 옛날 법도에 따라 거창한 장례를 지낼 필요는 없다. 장례가 끝나거든 곧 상복을 벗고록 하며, 주둔지에 있는 장병들은 부서를 떠나지 말라. 또한 관리들도 평소대로 근무에 힘써라. 나의 시체에는 평복을 입혀야 하며 절대로 왕후 귀족의 옷을 입혀서는 안된다. 또한 관 속에 금은보화나 진귀한 물건을 넣어서도 안된다. (위지 무제기) 실제 조조는 왕후 귀족의 분묘를 파헤쳐 그 속에 있던 보화를 꺼낸 사람이다. 꺼낸 물건으로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왕릉을 치장한 진시황과는 정반대로 현실감각이 뛰어난 위정자였다. 이런 유언장 덕분에 갑작스런 죽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혼란없이 황태자인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여 정치의 공백을 메울 수가 있었다. 조조는 임종에 즈음하여 평소에 소장하고 있던 명기와 재화를 시녀와 애첩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죽은 후 각각 고향에 돌아가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여생을 조용히 살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모습이 퍽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조조의 아들 조비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그도 유조에서 죽으면 뼈에 통양의 지각은 없다. 그러니 볼모의 땅(경작할 수 없는 땅)에 묘를 쓰고, 금은 등을 넣어서는 안된다. 모두 기왓장으로 만들라 고 지시했던 것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4. 르네상스는 중세 문화의 결실기였다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의 뚜렷한 발전이 나타난다. 새로운 문화의 발전은 고전 문화의 부흥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앞장 선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에서 유래한 인문주의라는 말은 원래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해주는 글과 예술의 힘을 뜻했으며 시, 수사학, 역사 등 인문 교양 과목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었다. 중세에도 고전들이 교양의 기초가 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였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종교적 속박을 벗고 새로운 인생관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환영 받았던 것이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페트라르카(Petrarca, 1304~74)는 이탈리아 말로 서정시를 썼으며,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Boccaccio, 1313~75)는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들은 라틴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거나 그리스 어를 공부하여 고전 문화를 자신들의 작품 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미술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분야로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보티첼리(Botticelli, 1444~1510),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으로 대표되는 천재 예술가들은 고전 미술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자연과 인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당시 사람들은 찬란했던 고대 문화가 멸망한 뒤 암흑의 중세가 이어졌으며, 이제 자신들에 의해 멸망했던 문화가 부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16세기 중엽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전기를 썼던 바사리(Vasari, 1511~47)였다. 그는 치마부에(Cimabue, 1240~1320), 지오토(Giotto, 1266~1337)에서 시작하여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완성된 고전 미술의 부활을 리나시타(rinascita : 재생)라고 불렀고 이 말은 이후 프랑스 어인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말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단지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여 근대 문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을 확립한 사람은 19세기의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t)였다. 그는 르네상스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기초로 하여 인간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려는 경향으로 파악했으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를 시대적으로 중세와는 단절되고 고대와 직결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해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을 볼 때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의 배경은 넓은 의미에서 중세 사회의 붕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이전에 이미 봉건 제도가 쇠퇴했다. 지중해 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했고 이 속에서 상인층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원격지 무역과 모직물 공업,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 사회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견해도 많이 제출되었다. 먼저 12~13세기 유럽의 정신적 각성에서 르네상스의 원류를 찾는 주장이 나왔다. 중세의 연애시나 성자 프란체스코의 자연에 대한 천진난만한 태도, 당시의 종교 운동을 지탱시킨 인간의 신앙적 갱생 등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고전 문화의 부흥을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계기로 볼 수 없으며, 기독교와 게르만 민족 정신의 융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12세기 프랑스의 라틴어 고전이나 자연학의 부흥과 그에 수반된 새로운 생활 태도에 주목하여 `12세기 르네상스`를 제시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호이징아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저서에서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이 아니라 중세의 가을, 즉 중세 문화의 결실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론들을 통해 부르크하르트가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많은 것들이 중세의 산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제 르네상스를 단순히 근대의 시작으로는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관점은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는 실제로 중세적인 요소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신구 문화가 교차하여 혼재했던 하나의 과도기로 볼 수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3) 일본은 근신하며 조용히 지내야 한다 전후 일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발전은 아시아국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지금과 같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된 데는 일본이 어느 정도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토, 즉 지리적 위치나 면적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을 하나의 경제체로 여길 뿐 하나의 국가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이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2차대전 후 일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을 얻지 못했다. 일본은 공산주의의 불씨에 대항하는 도구로 미국에 이용당했던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사조와 전쟁 후의 '민주정치' 간에는 커다란 틈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갑작스럽게 닥친 외세에 의해 강행된 것이다. 미국의 협박과 양육 아래 일본은 기괴한 형태로 자라났다. 몸뚱이는 뚱보이면서 머리는 아주 작아졌고, 사나움과 난폭함을 깊이 감춘 얼굴에는 가식적인 겸손만 나타나 있다. 비록 전후 50년 간 일본은 놀랄 만한 물질적 풍요를 일구어내고 자랑스러운 신기술을 개발하였으며 놀랄 만한 외화를 축적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현대화 과정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명확한 이념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은 거의 모두가 일에 미친 사 람들이며 심지어 사장이라 하더라도 잔업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러나 많은 일본남성들은 일단 퇴근을 하게 되면 술집에 들러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방에서 한바탕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고 나서야 혼미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일본이 서양을 받아들일 때 서양인들의 정신적인 진수와 자신들의 정신을 융합시키지 못하고 단지 표면적인 면만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일본민족은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게돼면 세계를 놀라게 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솔직히 말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용의 머리와 같은 두목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들의 생존공간을 확장하려는 몽상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이런 증거들 만으로도 우리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일본 국내의 일부 역사가들과 정치가들 사이에는 2차 대전중 자신들이 취한 행위를 변호하는 작은 목소리가 일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를 서구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켜 공존공영을 실현하기 위한 취지에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며, 이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말들이 일종의 '세력과시'를 위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 는다.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다' 등과 같은 말을 할 때 아주 정밀하고도 신중하게 계산된 어휘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북한,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언론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있고, 아시아 국가들의 반웅에서 위험한 낌새를 채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문제나 중국의 핵실험문제에 대해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 및 미 .일 신안보체제의 황립, 일본 국내에 일고 있는 개헌논조 등과 관련하여 일본은 항상 '국제문제에 대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명을 달고 나온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은, 누가 이런 역할을 하든 상관없으나 일본이 이 역할을 맡게 되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심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해 한다. 일본의 민간정책기구인 세계평화연구소는 최근 '일본종합전략대강'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보고서의 첫머리에, 헌법은 불멸의 대전(大典)이 아니며 국가이익에 대한 고려는 정확한 개정의 근거가 된다는 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연구소 소장은 익히 알고 있는 일본의 전수상이며 '슈퍼 매파'라고 불리는 나카소네 이다. 그는 냉전이 종식된 후 중국을 '제일의 가상적국' 으로 삼는 일본의 아시아전?을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 펴고 있다. 동남아국가연맹의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베트남과 국방에 관계된 교류를 진행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함과 동시에 25조 엔이라는 거대한 예산을 들여 중반기 방위계획을 추진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필히 중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용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의 재황립내용의 핵심요소는 바로 중국에 대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장기 전략목표, 특히 그 가운데 중국에 대한 계획을 순조롭게 관철시키기 위해 클린턴은 동경에서 하시모토에게 그럴 듯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할 시기가 되었소. 일본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히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에게 강심제를 놓고 있는 행위이다. 게다가 일본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의 시대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사실 미국은 어느 국가도 리드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만을 이끌 수 있을 뿐이다. 일본 역시 어느 국가도 리드할 수 없고 어떨 때는 자기 자신조차 이끌 수없다. 그러므로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근신하며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용하게 근신하며, 첫째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자신들이 이전에 저지른 일에 대해 정확하고 진지하게 자아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자기반성에는 미국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그들의 국가적 정책을 검토해 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만일 자신을 여전히 미국의 보호를 받는 어린이로 여긴다면 일본의 건국기반은 붕괴될 날이 있을 것이다. 둘째 조용히 근신하며 지내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덕행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람은 착한 일을 할 때에 살아갈 가치가 있듯이 국가도 덕 행을 쌓아야만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 방면 에서 아주 부족하다, 일본의 이름깨나 있는 회사가 다른 나라, 특히 제3세계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사기 행각,-베이징의 소비자들이 미쯔시다와 소니를 고발한 것이 그 실례이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행한 배은망덕한 행동들 따위가 일본의 덕행이 부족하여 나타나는 구체적인 예이다. 일본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덕행을 싸아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무조건 항복을 한 일본이 지은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독일과는 판이하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민감한 심리를 고려하고 일본이 시도하는 개헌과 국민총생산액 대비 방위비의 증액 및 미국과의 동맹 수위문제 등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여 제멋대로 자기의 역할, 그것도 지도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따위의 졸부근성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리꽝야오는 일찍이 그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이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4) 믿지 못할 일본이 유엔상임이사국? 일본이 세계 각지에서 허리 굽혀 절을 하며 유엔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한 표를 구걸하고 다닐 때 중국은 이에 대한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일본의 생각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유엔은 2차대전 종결 후 회담 정신에 입각하여 동맹국들의 제창으로 성립된 국제기구이다. 패배국으로서의 일본은 전후 60년 간 아무리 많은 변화를 하였고 ' 국권에 의한 전쟁 발발을 포기한다'고 제아무리 헌법에 명시하였더라도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유엔의 초기구상에 저촉되는 것이다. 중국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에서 앞으로 영원히 일본을 제외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본의 2차대전에 대한 인식이 아직 명확하지 않고 평화체제의 보장도 황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지금 상임이사국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 뿐이다. 일본은 아직 국제적인 대표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유엔상임이사국이 되려면 일정수준의 대표성을 지녀야 함은 말할 필요또 없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자격이 없다. 단순히 경제대국이라는 것만으로는 상임이사국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일본은 요스키 나가이가 말한것처럼 국권을 상실한 나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국권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미국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면에 있어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너무나 달라 이미 그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골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일본은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맹목적으로 미국만을 추종하는 나라가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될 바에야 차라리 미국에게 두 개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대표성으로 말하자면 아시아에서는 인도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국가가 오히려 일본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독일이 도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일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불신임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일본이 아시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성심성의껏 공헌을 하고 싶다면, 먼저 대소국가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첨단기술의 합작과 투자, 그리고 경제원조에 있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이웃 나라를 도와야 할 것이다. 구미에 대해서는 무조건 숭배하면서도 아시아의 인접국가는 가난한 친척 보듯이 한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국의 존중을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잠시 맡는 상임이사국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외곽에 남아 상호 유익한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 민주주의를 해 보고 싶은 남해안 어느 섬에 나무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직선제 대통령을 뽑기로 의결하고, 서둘러 대통령 선거법을 정했다. 그리고 그 선거법에 따라 선거일을 공고하고 후보 등록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무도 후보 등록을 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무들은 다시 모여 문제점을 검토했다. 후보 자격 기준을 너무 까다롭게 정하지는 않았는지, 후보 등록 신청금을 너무 많이 책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검토, 보완해서 다시 후보 등록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 한 나무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나무가 없었다. 나무들은 다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대통령 추대 위원회'를 만들어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 중에서 한 나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추대 위원장은 나무들 사이에서 가장 젊고 인기가 있는 사과나무가 맡았다. 사과나무는 먼저 가장 나이 많은 동백나무에게 찾아가 대통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동백나무는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손을 내저으면서 거듭거듭 사양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기름을 만드는 일만 해도 벅차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과나무는 다시 오동나무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동나무도 "사람들이 즐기는 거문고의 좋은 재료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에 마음이 바쁘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사과나무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선뜻 나서기가 거북해서 다들 겸양의 미덕을 발휘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다시 용기를 내어 포도나무를 찾아갔다. "이웃 섬을 보십시오. 일찍이 민주주의를 꽃피워 우리보다 더 평화스럽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루 속히 민주주의를 꽃피워 이웃 섬보다 더 잘 사는 섬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역시 "사람들에게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사과나무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나무들의 그런 태도가 정말 싫었다. 나무들은 오직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열매를 맺는 일이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성실하게 산 하나의 결과라는 데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사과나무는 마지막으로 가시나무를 찾아갔다. 가시나무는 사과나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대통령 직을 수락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대통령이 되어 주마. 너희들은 다들 내 그늘에 와서 마음껏 먹고 쉬도록 하여라." 가시나무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사과나무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가시나무가 독재자가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락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나무들도 걱정이 되는 눈치였으나 다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사과나무의 그런 걱정은 적중되었다.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했다. 자기가 가장 잘나서 대통령이 된 줄 알고 왕성한 번식력만을 자랑해 나갔다. 섬은 점점 가시나무 숲으로 뒤덮여 갔다. 포도원도 과수원도 다들 못 쓰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뭄으로 불이 나 섬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몽땅 다 불타 버리고 말았다. 글터 → 이글저글 고양이와 호랑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지만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눈이 빛나는 것은 시신경 주위에 다른 곳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해주는 진주빛 세포층이 있기 때문이다.조개는 양성이어서 자유자재로 성을 바꾼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다시 여성으로... 변한다. 기린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보다 빨리 뛸 수 있다. BC46년에 시저가 로마에 기린을 갖고 옴으로써 서양에 처음으로 기린이 알려졌다.고양이는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살 수 있다. 고양이는 균형 감각이 아주 뛰어나서 떨어질때 항상 그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발바닥을 땅에 먼저 딛고 서기 때문이다. 또 이 발바닥은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하여 더욱 안전하다. 어떤 집 고양이는 20층의 건물 위에서 떨어졌는데도 아주 작은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고 한다.낙타는 말과의 단거리 경주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처음 6.4킬로미터의 경주 후에는 항상 낙타의 달리는 속도가 말보다 빨르다.진짜 상아는 코끼리에서 나오는것이 아니고 산돼지나 해마의 엄니에서 나온다.낙타의 혹(hump)에는 물이 저장되어 있어 사막에서도 1주일 정도 물이 없이도 살 수 있다. 무한한 힘을 나타내는 남성의 성기를 ‘hump’라고도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616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08Nov by 風文 2024/11/08 by 風文 Views 465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06Nov by 風文 2024/11/06 by 風文 Views 379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04Nov by 風文 2024/11/04 by 風文 Views 428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02Nov by 風文 2024/11/02 by 風文 Views 454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8Oct by 風文 2024/10/28 by 風文 Views 399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5Oct by 風文 2024/10/25 by 風文 Views 561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4Oct by 風文 2024/10/24 by 風文 Views 393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3Oct by 風文 2024/10/23 by 風文 Views 1000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2Oct by 風文 2024/10/22 by 風文 Views 834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1Oct by 風文 2024/10/21 by 風文 Views 852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18Oct by 風文 2024/10/18 by 風文 Views 836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17Oct by 風文 2024/10/17 by 風文 Views 603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16Oct by 風文 2024/10/16 by 風文 Views 552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15Oct by 風文 2024/10/15 by 風文 Views 651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14Oct by 風文 2024/10/14 by 風文 Views 476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13Oct by 風文 2024/10/13 by 風文 Views 509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12Oct by 風文 2024/10/12 by 風文 Views 481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10Oct by 風文 2024/10/10 by 風文 Views 466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09Oct by 風文 2024/10/09 by 風文 Views 379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08Oct by 風文 2024/10/08 by 風文 Views 370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07Oct by 風文 2024/10/07 by 風文 Views 34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06Oct by 風文 2024/10/06 by 風文 Views 403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0 호4339.11.27 (10.0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환경부에서는 환경보전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환경영화 시나리오”를 아래와 같이 공모합니다. 2006년 11월 24일 환 경 부 장 관□ 주 최 : 환경부□ 시나리오 주제 ○ 환경보전 의식을 제고할 수 있는 창작 시나리오로서 환경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내용 <예시> ·환경오염의 실상을 보여주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은 내용 ·환경과 건강과의 관계를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 ·정부·기업·사회단체에서의 환경보전 활동 내용 ·친환경상품이 무역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 등□ 응모자격 : 제한 없음□ 공모 일정○ 공모기간 : ‘06. 11. 24(금)~’07. 1. 31(수) - 접수기간 : ‘07.1.22(월)~’07.1.31(수)(10일)○ 제출방법 : 방문 또는 우편접수 ※ 우편은 등기, 접수마감일 소인까지 유효○ 제 출 처 - (427-729)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1번지 환경부 민간환경협력과 환경영화시나리오 공모전 담당자 앞 ※ 문의 : 환경부 민간환경협력과 (02-2110-6688, 박혜정)○ 결과발표 : 2007. 2. 15(예정), 환경부홈페이지 게재 및 개별 통보 글터 → 명언 / 격언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 법. 고령으로 죽더라도 젊음을 간직한 채 죽는다. / A.W.P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씨받이 여인의 한과 영광 - 공예태후 공예 태후 임씨는 고려의 제 16대 인종에게 사랑과 예절과 부재를 함께 바쳐온 현비였는데, 애초에는 왕자를 보기 위한 인종의 '씨받이 여인'으로 뽑혀들어온 궁인이었다. 임씨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로 문하시중 이위의 외손녀가 되니까 말하자면 문벌 좋은 집안의 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씨받이 여인으로 대궐 안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많은 설화적인 이야기를 뿌려 왔었다. 그녀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외조부 이위는 꿈을 꾸었다. "내 꿈에 황색의 커다란 기가 원서방(사위) 집 중문에 세워졌는데, 그 깃발의 꼬리가 대궐안 선경전 추녀 밑에 닿아서 나부끼더란 말일세." "그래서요?" 이위의 사위 임원후는 목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두고 보게. 이제 태어날 애가 여식이라면 다음에 틀림없이 대궐안 선경전에서 살 것이네." 그러한 기대, 실상 꿈으로 인한 기대였지만, 어떻든 그와 같은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안고 태어난 임씨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다. 그 때까지 대궐하고 아무 인연이 없게 되자 임씨의 부모는 혼처를 물색했다. 그녀는 평장사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를 치른 그날 밤의 일이었다. 신랑이 신부의 방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신부의 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신부는 거의 사색이 되어 방바닥을 뒹굴었다. 신부의 입장도 입장이려니와 일이 이지경이 되자 난처한 쪽은 신랑이었다. 이직 신방에 들어 초야를 밝힌 사이도 아닌데 신부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뛰어들어가 그녀를 간호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신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종종걸음만 치고 있는데 잠시 후 신부의 어머니가 방 안에서 역시 죽을 상이 되어 나왔다. "이 사람아, 신부가 저 지경으로 다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그, 글쎄요....." "진정 미안하게 되었네. 신부가 저런 꼴이니 저꼴로 신방을 꾸밀 수도 없는 일, 신방은커녕 의원을 불러 무슨 병인지 진맥부터 보아야겠으니 오늘은 그냥 자네 집으로 돌아가고 뒷날을 보세." 신부 어미의 간곡한 말에 신랑을 할 수 없이 신부집을 물러 나왔다. 신부의 병은 그날 하루가 지나자 씻은 듯이 가셨다. 신부 집에서는 점치는 사람을 불러 하필이면 신방을 꾸미려던 그 시각에 신부가 병이 난 까닭을 점쳐 보았다. 점쟁이는 점을 보고 나서 누가 엿들을세라 조심스런 말로 점괘를 털어놓았다. "병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집 따님의 귀함은 감히 저 같은 점쟁이가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위에 있던 가족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점쟁이의 입을 주시했다. "이 집 따님은 반드시....." 점쟁이는 잠시 말을 끊고 신부 임씨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반드시 국모가 될 것입니다." 하고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그 말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랐다.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왕비)가 된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졌다. 자연히 김인규 아들과의 혼사는 깨어져버리고, 급기야 이 소문은 당대의 세도가 이자겸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뭐라고?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될 거라고?" 이자겸은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이자겸은 이미 자기의 두 딸을 인종의 비와 차비로 들여보내 놓고 젊은 임금을 움직여 정사를 멋대로 흔들고 있었다. 이자겸이란 위인은 출세욕이 대단한 인물이라 진작부터 자기의 누이동생을 숙종의 비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고, 첫째 딸은 예종의 비로, 셋째와 넷째 딸은 인종의 비와 차비로, 이렇듯 내리 3대에 걸쳐 왕비를 들여보내어 제 한몸의 영달을 꾀해 오고 있었다. 인종은 자기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책봉하여 조선 국공으로 삼고 관부를 세워 따로이 관속을 두도록 하였으며, 백관들에게 그 사제에 나아가 하례하도록 지시했다. 이쯤되고 보면 이자겸의 권한은 임금인 임종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백관들이 행렬을 지어 이자겸의 집 뜰에서 하례를 할 만큼 세도 당당한 이자겸의 귀에 비록 점쟁이의 점괘이기는 하나 국모가 될 낭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배알이 뒤틀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흥,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 장차 국모가 된다고? 그러면 지금 국모인 내 두 딸을 쫓아내고 왕비로 들어온다는 말이지?" 안될 소리였다. 이자겸은 벌떡 일어나 가마를 타고 대궐로 들어 갔다. "당장 임원후를 중서령의 자리가 좋으리까, 국공." "원후를 내어쫓아 게성 부사 쯤으로 삼으심이 좋을 듯 하나이다." "알았소. 당장 개성 부사로 나가 있도록 하리다." 이자겸의 미움을 사서 임원후는 중서령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개성 부사로 밀려나고 말았다. 임원후가 개성 부사로 나가 있은 지 1년이 지나서였다. 하루는 아침 일찍 조복을 갖춰 입은 부수가 임원후에게 달려와 느닷없이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바로 어젯밤 일이옵니다, 사또마님." "이 사람, 아침부터 꿈 이야기는......" "아니옵니다. 하도 기이해서 꿈 이야기를 전해 드릴려구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습죠." "어디 들어보기나 하세." 부수가 꿈에서 보니, 사또가 있는 청사의 대들보가 뚝 부러져서 큰 구멍이 생기더니, 거기서 커다란 황룡이 기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이는 반드시 사또마님 집에서 별다른 경사가 있을 징조입니다." 개성 부사 임원후는 황룡 어쩌고 하는 꿈 이야기가 내심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집안에 별다른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부수의 해몽은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이 무렵 이자겸의 무리는 대궐 안팎에서 그 세도와 횡포가 더욱 심해 가고 있었다. 이자겸은 최근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승진한 척준경과 밀착되어 미구에 왕권을 손아귀에 넣을 심산이었다. 척준경은 본디 곡주 사람으로 글을 배우지 못한 무뢰한이었는데 예종 때 윤관 장군을 따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뒤로 출세길이 트인 자였다. 이자겸은 이 척준경을 정 2품의 벼슬 자리까지 올려 주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겸은 그의 아들 지원을 척준경의 사위가 되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은 준경·준신 형제의 권세는 지못 이자겸의 그것에다 비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자겸과 그 당여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 드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자겸이 그놈의 아들놈들 저택이 거리거리에 연하여 뻗쳐 있고, 날로 기세가 성하여 관작을 팔아 뇌물이 폭주하니 썩은 고기가 늘 수만 근이라." "그뿐인감? 즈이 집구석 노복을 풀어서는 남의 재물 약탈하기가 일쑤요." 또한 군국의 일을 주관하려고 왕을 자기 집에 행행하게 하여 책명을 줄 것을 청하며 시일을 강제로 결정, 왕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때마침 척준경의 아우 준신이 병부상서로 있었는데, 상장군 최탁 등이 준신을 미워하여 조만간 일은 터지고 말았다. 최탁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을 먼저 죽여서 그 시체를 궁성 밖에다 던져 버렸다. 낭중 왕의 는 성을 넘어 달려가서 이 사실을 이자겸에게 알렸다. 자겸은 그 아들 지미와 척준경 등 그의 당여들을 돌아보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일이 위급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각 성을 넘어 최탁의 무리를 섬멸합시다, 국공." 척준경이 서둘러 군사를 데리고 대궐 쪽으로 달렸다. 대궐 안에는 이미 상장군 최탁, 오탁,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대장군 권수, 고석 등이 군사를 독려하며 이자겸의 무리와 맞붙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척준경은 군사들을 데리고 주작문에 이르러 성을 넘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자물쇠를 부수고 신봉문에 이르자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최탁의 군사들은 척준경의 군사가 수적으로 많음을 직감하고 낙담이 되어 감히 나와서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척준경은 야음을 틈탄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동화문 행랑에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하여 삽시간에 궁인들이 거처하는 전각으로 번졌다. 놀란 궁인들은 잠자리에 든 모습 그대로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숨어 버렸다. 왕은 불길을 피해 가까스로 말을 타고 연덕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척준경의 무리들은 마침 왕을 호위하고 있던 오탁을 잡아 목 베어 버리고 반대파에 대한 소탕 작전에 나섰다. 대세는 그 사이에 이자겸·척준경의 무리 쪽으로 기울어갔다. 척준경은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원탁, 권수, 안보린 및 대장군 한경, 윤성 등 10여 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그날 밤의 화재로 궁궐은 불에 타 없어지고, 이자겸은 왕을 자기의 사제인 중흥택으로 옮겼다. 이 사건이 수습된 직후 척준경은 문하시랑 판병부사란 직함을 받았고, 자겸은 왕을 모시고 있던 내시 25명을 모두 내보내었다. 결국 왕의 목숨은 이자겸의 손안에 들어가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젊은 왕 인종은 쉬이 절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이자겸에게 붙어 있는 내의 최사전을 포섭하여 그와 비밀리에 이자겸 제거 계획을 세웠다. "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준경을 믿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최사전은 척준경의 위치를 설명하고 나서, "만약 전하께서 준경을 얻을 수만 있다면 병권이 준경에게 속해 있으니 자겸은 자연히 저 혼자 남게 될 것이옵니다."하고 척준경 포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경이 국공(이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까지 맺었고, 그 아우와 아들이 모두 관병에게 살해당했으니 이 일로써 국공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왕은 최사전을 척준경의 집으로 보내어 충의로써 왕실에 힘쓰기를 타일렀다. 겸하여 왕은 준경에게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마음을 다해 짐의 곁에서 돕기를 힘쓰라 당부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가느라고 때마침 이자겸의 아들 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과 서로 싸우게 되었다. 지언의 종은 척준경의 죄를 일일이 들어 죽을 죄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었다. 척준경이 그말을 듣고 마침내 이자겸과 틈이 생겨 버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최사전이 척준경을 달래어 결국 왕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다짐을 받았다. 척준경이 자기 쪽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를 채었는지 이자겸은 왕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급히 서둘렀다. 왕을 죽이는 하수인은 차비로 들여앉힌 자겸의 넷째 딸 이씨였다. 자겸은 차비 이씨에게 독약이 든 떡을 왕한테 올리라고 권했다. 그러나 차비 이씨는 이 사실을 왕한테 알리고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자 까마귀가 그걸 먹고 죽어 버렸다. 자겸이 두 번째로 독약이 든 국을 보내어 왕에게 올리라 했지만 차비 이씨는 이번에도 식기를 들고 거짓 미끄러져서 그 국을 모두 쏟아 버렸다. 이 소식을 왕으로부터 전해 들은 척준경은 일을 서둘러 이자겸의 무리를 급습, 일망 타진하고 말았다. 왕을 위기에서 구해준 차비 이씨나 정비 이씨는 역적의 딸이자 두 사람 다 임금에게 이모가 되니, 임금의 배필이 될 수 없다는 간관의 말에 따라 모두 폐하여 대궐에서 내어쫓았다. 하루아침에 두 비를 잃은 인종은 밤마다 널찍한 침소에서 혼자 잠을 설쳤다. 어느 날 밤 왕은 대궐에서 나간 두 비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서둘러 척준경을 입궐하라 일렀다. 왕을 도와 이자겸을 처치한 척준경은 공신의 칭호를 하사받고 겸하여 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의 별슬에 올라 있었다. "신 준경 등대이옵니다." "오, 어서 오오. 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임자 닷 되와 황규(해바라기) 석 되를 얻었으니 길몽인지 흉몽인지 풀이 좀 해보구려." 척준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임자 닷 되, 황규 석 되를 음미해 보았다. 이윽고 눈을 뜬 준경은 꿈이 길조라 먼저 제 입부터 벌어지는 것이었다. "전하, 임자는 임이니 임씨 성을 비로 맞아 들일 징조요." "옳거니....." "그 수가 또 다섯임은 다섯 아들을 낳을 상서요." "저런. 그리고는?" "그리고 황규의 황은 곧 황이니, 황왕의 황과 같고, 규는 규니 도규의 규와 같음이오니, 이른바 황규라 함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이고......." "옳거니. 그럼 황규 석 되의 그 되란 무엇을 이름이오?" "그야 물론 다섯 아들 중의 세 아들이 나라를 맡아 다스릴 징조이옵니다." 이에서 더 좋은 꿈풀이가 어디 있으랴! 왕은 당장 다섯 왕자를 슬하에 두고 싶었다. 인종은 꿈에 나타난 대로 곧 임씨 성은 가진 낭자를 물색하라 일렀다. 그러자 얼마 후 개성 부사 임원후의 딸이 덕문에서 나서 예절 바르고 부재를 겸비한 낭자라 하여 왕은 그녀를 왕자 다섯을 얻기 위한 씨받이 여인으로 입궁하게 된 처지가 부끄럽고 한스러웠으나 참기로 했다. 인종 4년에 입궁하여 호를 연덕궁주라 칭하게 된 임씨는 인종의 사랑을 받은 지 꼭 1년 만에 왕자 탄생이 길몽에 화합하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오랜만에 왕자를 얻게 되자 그 기쁨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임씨의 처소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기쁨을 전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은기, 채단, 포곡, 안마....... 애정 어린 왕의 예물이 임씨의 처소를 가득히 메웠다. 임씨는 그 뒤로 계속 왕의 사랑을 받이 인종 7년에는 정식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둘째 아들 경을 낳았다. 이어서 셋째아들 호, 넷째아들 충희, 다섯째 아들 탁을 낳았으며, 게다가 승경, 덕녕, 창악, 영화, 네 궁주(공조)를 낳으니 인종의 꿈대로 씨받이 여인의 사명을 다한 셈이었다. 왕비 임씨의 생애는 그러나 씨받이 여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뒷날 의종, 명종, 신종이 뒨 세 왕의 모후로서 왕비 임씨는 그 자식을 보전하는 데 힘썼고, 부도로서 그 부군(인종)을 섬겼으며, 반드시 예절을 따르고 검약으로 가히 그 몸을 지켰으니 75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버린 그녀의 생애는 인종의 찬사처럼 실로 고려의 경사를 더한 왕비였다. 왕비 임씨는 국모가 되어 선경전에서 놀 것이란 꿈 해몽 그대로 평생을 대궐 안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니 씨받이로 입궁했을 때의 조그마한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그 부끄러움은 뒷날 그녀에게 차지된 공예 태후의 예우로 말끔히 가셔진 셈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 이정란 (2/2)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고려시대에는 여성에게 균등한 재산상속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호구단자 등에 기록된 노비의 기록을 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여성이 가지고 온 노비의 소유권이 결혼하여 남자집에 산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즉 여자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노비는 결혼했다고 하여 남편에 귀속되지 않고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부인이 재혼할 경우나, 또는 후손이 없을 경우에 부인쪽의 노비는 다시 친정으로 귀속됨으로써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했던 것이다. 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나라가 법적으로 부부 별산제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부인 명의의 재산에 대해 세금을 더욱 높게 매김으로써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주는 것에 비하면, 고려시대 여성의 재산권 행사는 보다 안정적으로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고, 수절을 강요당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이혼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사신의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측보다는 남성측이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남편에 의해 이혼이 쉽게 요구되는 사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권수평의 경우이다. 당시 견룡이란 관직은 비록 지위는 낮지만 권귀에게 총애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원하였다. 권수평은 이 관직에 보임되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사양했다. 그 때에 친구가 이르기를 “이것은 영광스런 것이다. 대개 부인을 바꿔 부를 구하는데, 그대가 만약 새장가를 간다면 부잣집 중에서 누가 딸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당시 부를 핑계로 이혼하고 새장가를 가는 경우가 흔히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이혼이 남성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충숙왕의 다섯 번째 부인인 수빈권씨는 원래 전형이란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전씨 집안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이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왕명에 의탁하여 이혼을 하고 그후에 왕비가 되었다. 이 경우는 매우 특수한 예이지만, 어쨌든 여성에 의해 이혼이 요구되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혼은 남편과 부인 어느 한 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한 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미 설명한 수비권씨의 경우도 남편의 집안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혼을 할 수 없어, 왕명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서야 이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법적으로도 부모의 양해가 없거나 또 이유 없이 처를 버리는 자는 관직에서 파직되고 유배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칠거지악”이란 아주 애매한 조건으로 부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과 달리 애(아들)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부인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고려시대에는 아들선호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전이나 묘지명의 기록 중 “무자”라고 하여 자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것이 비로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혼 이후에 또는 과부로서 재혼은 법적으로 가능했는가? 고려시대에 법적으로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에 의해 청원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산기 이상의 처로 외명부의 사람이 된 자는 재가를 허용하지 말고, 판사 이하에서 6품 이상 관리의 처는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재가를 허용하지 말며, 어긴 자는 실절한 죄로 처하십시오. 또한 산기 이상 관리의 첩 및 6품 이상의 처와 첩이 스스로 수절하기를 원하는 자는 문려에 정표하여 상을 주십시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마직막 왕의 재위 기간까지도 여성의 재혼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일반 여성에 대한 재혼 금지규정이 아니고, 산기 이상 관리의 처로 외명부에 속한 여성의 경우 재혼을 허용하지 말고, 6품 이상 관리의 처인 경우도 3년간만 재혼을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청원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제한한 적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여성의 재혼은 흔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왕의 부인중에도 재혼녀가 있었다. 이미 앞에서 본 충숙왕비인 수비권씨의 경우도 그 예이다. 충렬왕의 세 번째 왕비인 숙창원비도 역시 과부였는데, 왕에게 재혼하였다. 또한 충선왕비인 순비허씨는 원래 평양후 현에게 시집가서 3남4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죽자 그 후 충선왕의 비가 되었으며,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여성의 재혼이 흔하였음을 보여주는 용어로 의자라는 것이 있다. 의자란 전 남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이런 의자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었다. 의자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들이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에까지 끼었다는 사실은 의자가 일반적인 존재였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여성의 재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고려시대는 “양측적 친속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도 역시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친족범위에 대한 민법 규정은 1990년에 와서야 비로소 개정되어 부계와 모계 혈족 모두 8촌 이내로 되었다. 이 민법의 개정 이전에는 조선 후기 부계중심의 종법제도의 영향으로 부계 8촌, 모계 4촌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또 하나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양측적 친속사회였던 고려에서는 그만큼 친속 내에서 외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처속이나 외가의 친족 내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복제와 음서제이다. 오복제는 상례에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법이다. 아버지의 상에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고 어머니 상에는 자최 3년복을 입으며, 조부모 상에는 그보다 낮은 단계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웃나라였던 중국에 비해 고려시대에 시행되 있던 오복제는 상대적으로 처족이나 외가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외할아버지 상에 5개월 상복을 입은 것에 비해 고려의 경우는 1년 상복을 입고 있으며, 중국에서 상복을 입지 않았던 처의 형제에 대해서 고려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처족이나 외족이 친족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친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관리등용방식은 과거제도 이외에 음서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음서제도에도 여성의 지위가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음직이 수여되는 범위는 해당 관리의 아들.손자.사위 등에서, 협5녀나 심지어 협22녀에까지 이르고 있다. 협5녀나 협22녀라는 것은 가족의 계보에 끼어 있는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옆과 같다. 옆의 그림에서와 같이 음직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음직을 주고받는 처음과 끝은 남성일지라도 그 사이에 1명에서 5명의 여성이 끼어 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을 주는 것이 바로 협5녀의 규정이다. 이렇듯 어머니에서 딸로, 비록 중간에 몇 명의 아들이 끼어 있을지라도 정해진 숫자만큼 여성이 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의 족보는 조선시대에 남계만을 기록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 쪽도 끝까지 밝혀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여성의 계보를 기록하여 놓지 않는다면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 족보가 음서의 혜택을 누리려는 목적만으로 여성의 계보를 기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상으로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적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비록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호적에 기록된 형제 자매의 서열 순서는 무조건 아들을 우선 순위로 기록하였던 조선시기와 달리 출생 순서였다. 즉 누이와 남동생이 있는 경우 호적의 기록은 누이와 남동생 순서로 이루어졌다. 또한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몇녀 몇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인 듯 싶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사과 한알에 담긴 설레임 아빠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쁙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내게는 며칠만에 나타난 아빠의 초췌한 모습과 불편한 산골 생활이 너무 낯설고 끔찍하기만 했다.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응해야만 했다. 우선 전학을 했다. 작은 산골 마을이라 그런지 급우들은 내가 왜 전학을 와야만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있잖아, 쟤가 집이 망해서 전학왔다는 그 애야." 내가 지나가면 모두들 수군거렸다. 비웃음 섞임 말에 몇 번이고 울컥했지만 그럴 때마다 입술을 꼬올 깨물었다. 그리고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엇다. 상처 받은 나는 그 아이들을 경계하고 미워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너무 외롭고 슬펐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다.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우정과 사랑은 설레임에서 시작한다고, 네가 아직 우리에게 설레임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우리는 너의 설에임을 기다리고 있어.'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삭막한 현실에 부딪쳐 까맣게 타 버린 가슴속에 훈훈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쩌면 내가 먼저 벽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내게 다가오는 게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바보처럼 그들만 원망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짝궁인 초희에게 사과하나를 내밀었다. "우리 할머니가 너랑 같이 먹으래." 그렇게 말해 놓고서 나는 부끄러워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그런 내게 초희는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그 뒤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참 행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쪽지는 초희와 몇몇 친구들의 공동작품이었다. 이제 가정 형편도 어느정도 나아졌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쪽지의 마지만 글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설레임이 있는 만남은 그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나에게 그런 행복을 일깨워 준 그 친구들이 너무도 고맙다. 이유록 님/경북 구미시 공단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0 - 새로운 철학의 문을 열다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년) 그때 세계에서는 1767년: 영국, 타운젠트 조례 제정 1778년: 프랑스, 미국과 공수동맹 및 통상조약 Immanuel Kant /1724-1804 '1781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하고 물으면 누구나 망설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1789년을 잘못 얘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해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1년 일어난 아주 조용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이 출간된 것이다. 물론 그 책의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서양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키 작은 세 거인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 베토벤 그리고 칸트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칸트는 가장 왜소한 체구에다 볼품없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대학의 사강사로부터 시작해 교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84세까지 살았으니까 다른 두 사람보다는 월등히 오래 산 셈이다. 그는 한평생 쾨니스베르크 시밖에 나가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일생동안 철학에 몰두했었다. 그 칸트가 18년 동안 어떤 학문적 작업에 열중해 있다는 사실은 동료교수나 친지들에 의해 알려져왔으나, 그 연구활동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바가 없었다. 다 아는 바대로 칸트는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본 일도 없었고, 혼자 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하곤 했는데, 단 한번 루소의 "민약론"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늦추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칸트가 계몽주의 사상에 뜻을 둔 것은 프랑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볼만도 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학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칸트가 자기 일생의 대표작이며 세계 철학사의 이정표가 될 정도의 저서를 내놓게 된 것이다. 그 책은 결코 쉬운 내용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철학계의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 책의 영향력은 확대되어나갔다. 초판을 수정한 재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수정한 제 3판이 나왔을 정도였고, 그 수정을 하게 된 원인도 사회적 물의에 의한 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책의 비중도 큰 것이나, 독일 사회의 문화 및 철학적 수준도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보아 좋겠다. 이 책이 갖는 몇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대륙의 철학자들, 곧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에 비롯한 이들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의 기초와 방법을 수학, 기하학과 같은 확실하고 명백한 기반 위에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대표적인 저서"윤리학"에는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논증된 문제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영국의 철학자들은 경험론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근거와 방법은 심리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인식은 심리적 과제이며, 그 사유의 정확성과 타당성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처음에 대륙적인 이성론을 따랐다. 모든 진리는 이성적 사고와 일치되어야 하며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D.훔을 읽고 난 뒤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철학의 제 3의 완전한 기초와 방법은 무엇인가? 칸트는 그것을 논리학이라고 생각했다.모든 지식과 진리는 논리적 사유에 따라야 하며, 논리의 원칙이 인식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륙적인 수학, 기하학적 연역방법이 논리적인 추리로 지양되고 영국적인 경험 심리주의가 보편타당성 있는 진리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논리적 철학의 체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 이후부터는 수학, 기하학은 물론 심리학이 유일한 철학의 과학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약화되고 논리학이 철학의 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논리실증주의나 언어분석의 철학이 그 원조를 칸트에게 두고 있는 경향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 혁명이 정치사에 큰 거봉을 만들었듯이 독일철학은 독일 관념론이라는 철학계의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은 그러했다. 우리나라 철학계의 선구자들도 대개는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철학과 강의실에서 열심히 강독되었다.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 서울대의 최재희 교수와 박종홍 교수, 고려대의 이종두교수 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들은 최근까지 필자와 같은 시기에 강의를 하고 있었던 분들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꿩 먹고 알 먹고'가 '일석이조'란 의미로 쓰이는 까닭은? 꿩 먹고 알 먹고'란 말은 '일석이조'란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지요. 왜 그러한 말이 나왔을까요? 꿩처럼 주위의 소리에 민감한 동물도 드물 것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는 소리만 들으면 금방 튀어 날라가 버리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을 품고 있을 경우입니다. 알에 대한 모성애가 강합니다. 꿩을 기르고 있는 곳이 있으면 한 번쯤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알을 품고 있는 꿩을 발견하면, 꿩도 잡고 알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꿩 먹고 알 먹고'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특이한 유언 - 황진이 / 조조 부자 길가에 시체를 버려주오 - 황진이 재색을 겸비한 명기 황진이는 한창 무르익은 나이 사십을 전후해서 죽었다. 송악산 옛 터전의 번화했던 그 시절 어쩌다 이 봄이 가을인양 쓸쓸한가.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의 도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 때는 서화담의 문화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그 시체를 동문 밖 길가에 버려서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해달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하지 않고 그녀를 황해도 장단 근교에 고이 묻었다. 조조, 그에게도 죽음이 난세의 영웅 조조 앞에도 죽음은 찾아왔다. 건안 25년(220년), 일세를 풍미하던 지략가 조조도 6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천하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만큼 굳이 옛날 법도에 따라 거창한 장례를 지낼 필요는 없다. 장례가 끝나거든 곧 상복을 벗고록 하며, 주둔지에 있는 장병들은 부서를 떠나지 말라. 또한 관리들도 평소대로 근무에 힘써라. 나의 시체에는 평복을 입혀야 하며 절대로 왕후 귀족의 옷을 입혀서는 안된다. 또한 관 속에 금은보화나 진귀한 물건을 넣어서도 안된다. (위지 무제기) 실제 조조는 왕후 귀족의 분묘를 파헤쳐 그 속에 있던 보화를 꺼낸 사람이다. 꺼낸 물건으로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왕릉을 치장한 진시황과는 정반대로 현실감각이 뛰어난 위정자였다. 이런 유언장 덕분에 갑작스런 죽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혼란없이 황태자인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여 정치의 공백을 메울 수가 있었다. 조조는 임종에 즈음하여 평소에 소장하고 있던 명기와 재화를 시녀와 애첩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죽은 후 각각 고향에 돌아가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여생을 조용히 살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모습이 퍽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조조의 아들 조비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그도 유조에서 죽으면 뼈에 통양의 지각은 없다. 그러니 볼모의 땅(경작할 수 없는 땅)에 묘를 쓰고, 금은 등을 넣어서는 안된다. 모두 기왓장으로 만들라 고 지시했던 것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4. 르네상스는 중세 문화의 결실기였다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의 뚜렷한 발전이 나타난다. 새로운 문화의 발전은 고전 문화의 부흥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앞장 선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에서 유래한 인문주의라는 말은 원래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해주는 글과 예술의 힘을 뜻했으며 시, 수사학, 역사 등 인문 교양 과목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었다. 중세에도 고전들이 교양의 기초가 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였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종교적 속박을 벗고 새로운 인생관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환영 받았던 것이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페트라르카(Petrarca, 1304~74)는 이탈리아 말로 서정시를 썼으며,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Boccaccio, 1313~75)는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들은 라틴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거나 그리스 어를 공부하여 고전 문화를 자신들의 작품 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미술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분야로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보티첼리(Botticelli, 1444~1510),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으로 대표되는 천재 예술가들은 고전 미술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자연과 인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당시 사람들은 찬란했던 고대 문화가 멸망한 뒤 암흑의 중세가 이어졌으며, 이제 자신들에 의해 멸망했던 문화가 부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16세기 중엽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전기를 썼던 바사리(Vasari, 1511~47)였다. 그는 치마부에(Cimabue, 1240~1320), 지오토(Giotto, 1266~1337)에서 시작하여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완성된 고전 미술의 부활을 리나시타(rinascita : 재생)라고 불렀고 이 말은 이후 프랑스 어인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말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단지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여 근대 문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을 확립한 사람은 19세기의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t)였다. 그는 르네상스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기초로 하여 인간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려는 경향으로 파악했으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를 시대적으로 중세와는 단절되고 고대와 직결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해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을 볼 때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의 배경은 넓은 의미에서 중세 사회의 붕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이전에 이미 봉건 제도가 쇠퇴했다. 지중해 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했고 이 속에서 상인층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원격지 무역과 모직물 공업,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 사회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견해도 많이 제출되었다. 먼저 12~13세기 유럽의 정신적 각성에서 르네상스의 원류를 찾는 주장이 나왔다. 중세의 연애시나 성자 프란체스코의 자연에 대한 천진난만한 태도, 당시의 종교 운동을 지탱시킨 인간의 신앙적 갱생 등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고전 문화의 부흥을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계기로 볼 수 없으며, 기독교와 게르만 민족 정신의 융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12세기 프랑스의 라틴어 고전이나 자연학의 부흥과 그에 수반된 새로운 생활 태도에 주목하여 `12세기 르네상스`를 제시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호이징아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저서에서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이 아니라 중세의 가을, 즉 중세 문화의 결실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론들을 통해 부르크하르트가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많은 것들이 중세의 산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제 르네상스를 단순히 근대의 시작으로는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관점은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는 실제로 중세적인 요소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신구 문화가 교차하여 혼재했던 하나의 과도기로 볼 수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3) 일본은 근신하며 조용히 지내야 한다 전후 일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발전은 아시아국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지금과 같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된 데는 일본이 어느 정도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토, 즉 지리적 위치나 면적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을 하나의 경제체로 여길 뿐 하나의 국가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이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2차대전 후 일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을 얻지 못했다. 일본은 공산주의의 불씨에 대항하는 도구로 미국에 이용당했던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사조와 전쟁 후의 '민주정치' 간에는 커다란 틈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갑작스럽게 닥친 외세에 의해 강행된 것이다. 미국의 협박과 양육 아래 일본은 기괴한 형태로 자라났다. 몸뚱이는 뚱보이면서 머리는 아주 작아졌고, 사나움과 난폭함을 깊이 감춘 얼굴에는 가식적인 겸손만 나타나 있다. 비록 전후 50년 간 일본은 놀랄 만한 물질적 풍요를 일구어내고 자랑스러운 신기술을 개발하였으며 놀랄 만한 외화를 축적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현대화 과정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명확한 이념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은 거의 모두가 일에 미친 사 람들이며 심지어 사장이라 하더라도 잔업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러나 많은 일본남성들은 일단 퇴근을 하게 되면 술집에 들러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방에서 한바탕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고 나서야 혼미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일본이 서양을 받아들일 때 서양인들의 정신적인 진수와 자신들의 정신을 융합시키지 못하고 단지 표면적인 면만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일본민족은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게돼면 세계를 놀라게 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솔직히 말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용의 머리와 같은 두목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들의 생존공간을 확장하려는 몽상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이런 증거들 만으로도 우리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일본 국내의 일부 역사가들과 정치가들 사이에는 2차 대전중 자신들이 취한 행위를 변호하는 작은 목소리가 일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를 서구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켜 공존공영을 실현하기 위한 취지에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며, 이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말들이 일종의 '세력과시'를 위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 는다.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다' 등과 같은 말을 할 때 아주 정밀하고도 신중하게 계산된 어휘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북한,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언론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있고, 아시아 국가들의 반웅에서 위험한 낌새를 채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문제나 중국의 핵실험문제에 대해 일본이 취해야 할 태도 및 미 .일 신안보체제의 황립, 일본 국내에 일고 있는 개헌논조 등과 관련하여 일본은 항상 '국제문제에 대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명을 달고 나온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은, 누가 이런 역할을 하든 상관없으나 일본이 이 역할을 맡게 되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심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해 한다. 일본의 민간정책기구인 세계평화연구소는 최근 '일본종합전략대강'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보고서의 첫머리에, 헌법은 불멸의 대전(大典)이 아니며 국가이익에 대한 고려는 정확한 개정의 근거가 된다는 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연구소 소장은 익히 알고 있는 일본의 전수상이며 '슈퍼 매파'라고 불리는 나카소네 이다. 그는 냉전이 종식된 후 중국을 '제일의 가상적국' 으로 삼는 일본의 아시아전?을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 펴고 있다. 동남아국가연맹의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베트남과 국방에 관계된 교류를 진행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함과 동시에 25조 엔이라는 거대한 예산을 들여 중반기 방위계획을 추진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필히 중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용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의 재황립내용의 핵심요소는 바로 중국에 대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장기 전략목표, 특히 그 가운데 중국에 대한 계획을 순조롭게 관철시키기 위해 클린턴은 동경에서 하시모토에게 그럴 듯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할 시기가 되었소. 일본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히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에게 강심제를 놓고 있는 행위이다. 게다가 일본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의 시대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사실 미국은 어느 국가도 리드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만을 이끌 수 있을 뿐이다. 일본 역시 어느 국가도 리드할 수 없고 어떨 때는 자기 자신조차 이끌 수없다. 그러므로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근신하며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용하게 근신하며, 첫째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자신들이 이전에 저지른 일에 대해 정확하고 진지하게 자아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자기반성에는 미국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그들의 국가적 정책을 검토해 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만일 자신을 여전히 미국의 보호를 받는 어린이로 여긴다면 일본의 건국기반은 붕괴될 날이 있을 것이다. 둘째 조용히 근신하며 지내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덕행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람은 착한 일을 할 때에 살아갈 가치가 있듯이 국가도 덕 행을 쌓아야만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 방면 에서 아주 부족하다, 일본의 이름깨나 있는 회사가 다른 나라, 특히 제3세계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사기 행각,-베이징의 소비자들이 미쯔시다와 소니를 고발한 것이 그 실례이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행한 배은망덕한 행동들 따위가 일본의 덕행이 부족하여 나타나는 구체적인 예이다. 일본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덕행을 싸아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무조건 항복을 한 일본이 지은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독일과는 판이하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민감한 심리를 고려하고 일본이 시도하는 개헌과 국민총생산액 대비 방위비의 증액 및 미국과의 동맹 수위문제 등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여 제멋대로 자기의 역할, 그것도 지도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따위의 졸부근성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리꽝야오는 일찍이 그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이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4) 믿지 못할 일본이 유엔상임이사국? 일본이 세계 각지에서 허리 굽혀 절을 하며 유엔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한 표를 구걸하고 다닐 때 중국은 이에 대한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일본의 생각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유엔은 2차대전 종결 후 회담 정신에 입각하여 동맹국들의 제창으로 성립된 국제기구이다. 패배국으로서의 일본은 전후 60년 간 아무리 많은 변화를 하였고 ' 국권에 의한 전쟁 발발을 포기한다'고 제아무리 헌법에 명시하였더라도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유엔의 초기구상에 저촉되는 것이다. 중국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에서 앞으로 영원히 일본을 제외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본의 2차대전에 대한 인식이 아직 명확하지 않고 평화체제의 보장도 황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지금 상임이사국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 뿐이다. 일본은 아직 국제적인 대표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유엔상임이사국이 되려면 일정수준의 대표성을 지녀야 함은 말할 필요또 없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자격이 없다. 단순히 경제대국이라는 것만으로는 상임이사국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일본은 요스키 나가이가 말한것처럼 국권을 상실한 나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국권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미국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면에 있어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너무나 달라 이미 그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골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일본은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맹목적으로 미국만을 추종하는 나라가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될 바에야 차라리 미국에게 두 개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대표성으로 말하자면 아시아에서는 인도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국가가 오히려 일본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독일이 도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일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불신임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일본이 아시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성심성의껏 공헌을 하고 싶다면, 먼저 대소국가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첨단기술의 합작과 투자, 그리고 경제원조에 있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이웃 나라를 도와야 할 것이다. 구미에 대해서는 무조건 숭배하면서도 아시아의 인접국가는 가난한 친척 보듯이 한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국의 존중을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잠시 맡는 상임이사국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외곽에 남아 상호 유익한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 민주주의를 해 보고 싶은 남해안 어느 섬에 나무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직선제 대통령을 뽑기로 의결하고, 서둘러 대통령 선거법을 정했다. 그리고 그 선거법에 따라 선거일을 공고하고 후보 등록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무도 후보 등록을 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무들은 다시 모여 문제점을 검토했다. 후보 자격 기준을 너무 까다롭게 정하지는 않았는지, 후보 등록 신청금을 너무 많이 책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검토, 보완해서 다시 후보 등록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 한 나무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나무가 없었다. 나무들은 다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대통령 추대 위원회'를 만들어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 중에서 한 나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추대 위원장은 나무들 사이에서 가장 젊고 인기가 있는 사과나무가 맡았다. 사과나무는 먼저 가장 나이 많은 동백나무에게 찾아가 대통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동백나무는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손을 내저으면서 거듭거듭 사양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기름을 만드는 일만 해도 벅차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과나무는 다시 오동나무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동나무도 "사람들이 즐기는 거문고의 좋은 재료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에 마음이 바쁘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사과나무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선뜻 나서기가 거북해서 다들 겸양의 미덕을 발휘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다시 용기를 내어 포도나무를 찾아갔다. "이웃 섬을 보십시오. 일찍이 민주주의를 꽃피워 우리보다 더 평화스럽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루 속히 민주주의를 꽃피워 이웃 섬보다 더 잘 사는 섬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역시 "사람들에게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사과나무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나무들의 그런 태도가 정말 싫었다. 나무들은 오직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열매를 맺는 일이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성실하게 산 하나의 결과라는 데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사과나무는 마지막으로 가시나무를 찾아갔다. 가시나무는 사과나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대통령 직을 수락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대통령이 되어 주마. 너희들은 다들 내 그늘에 와서 마음껏 먹고 쉬도록 하여라." 가시나무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사과나무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가시나무가 독재자가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락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나무들도 걱정이 되는 눈치였으나 다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사과나무의 그런 걱정은 적중되었다.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했다. 자기가 가장 잘나서 대통령이 된 줄 알고 왕성한 번식력만을 자랑해 나갔다. 섬은 점점 가시나무 숲으로 뒤덮여 갔다. 포도원도 과수원도 다들 못 쓰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뭄으로 불이 나 섬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몽땅 다 불타 버리고 말았다. 글터 → 이글저글 고양이와 호랑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지만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눈이 빛나는 것은 시신경 주위에 다른 곳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해주는 진주빛 세포층이 있기 때문이다.조개는 양성이어서 자유자재로 성을 바꾼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다시 여성으로... 변한다. 기린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보다 빨리 뛸 수 있다. BC46년에 시저가 로마에 기린을 갖고 옴으로써 서양에 처음으로 기린이 알려졌다.고양이는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살 수 있다. 고양이는 균형 감각이 아주 뛰어나서 떨어질때 항상 그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발바닥을 땅에 먼저 딛고 서기 때문이다. 또 이 발바닥은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하여 더욱 안전하다. 어떤 집 고양이는 20층의 건물 위에서 떨어졌는데도 아주 작은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고 한다.낙타는 말과의 단거리 경주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처음 6.4킬로미터의 경주 후에는 항상 낙타의 달리는 속도가 말보다 빨르다.진짜 상아는 코끼리에서 나오는것이 아니고 산돼지나 해마의 엄니에서 나온다.낙타의 혹(hump)에는 물이 저장되어 있어 사막에서도 1주일 정도 물이 없이도 살 수 있다. 무한한 힘을 나타내는 남성의 성기를 ‘hump’라고도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