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4 14:33 【독서편지】: 제 68 호 風磬 조회 수 9,436 추천 수 16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8 호4339.11.24 (10.04)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이외수님의 '내잠속에 비내리는데' 는 더 이상 독서편지를 통해 연재하지 않습니다. - 글터 -> 수필을 참조하세요. - 문학소식 경인일보사가 한국 문학의 미래를 만들어갈 재기발랄한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200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경기·인천 지역 일간지중 유일한 문인 등용문으로 해마다 공정하고 권위있는 심사를 통해 배출된 문인들이 활발한 활동으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올해 신춘문예 역시 재치있고 힘있는 문학도들의 참신한 작품으로 한국 문단을 빛낼 것입니다. 경인일보와 함께 한국 문학 미래의 한 획을 그어나갈 역량있는 문학도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응모마감:2006년 12월 8일(당일 소인 유효) ●응모부문:단편소설(200자 원고지 80~100매), 시(3편 이상) ●시상 및 상금:단편소설은 상패 및 원고료 300만원, 시는 상패 및 원고료 200만원 단, 당선자 없는 가작의 경우는 원고료의 반액을 수여 ●당선작 및 심사위원 발표:2007년 1월 2일자 경인일보 ●응모 및 문의:(442-702)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2의11 경인일보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031)231-5380, 5384 ※원고 하단에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도 함께 기재),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를 반드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접수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입한 원고나 기성작가의 응모, 표절작품의 경우에는 당선이 취소됩니다. 인터넷 및 전자메일을 통한 접수는 받지 않습니다. 글터 → 명언 / 격언 기회란 횃대에 앉는 일이라곤 없는 새와 같은 것./ C.M.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조선조 어머니의 표상 - 양사언의 어머니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거나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아마도 이 시조의 보급은 그 작자와 함께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 유명한 시조는 봉래 양사언이 지은 것이다. 양사언이라고 하면 조선 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해서 대동승을 거쳐 삼등, 함흥, 평창, 강릉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회양 군수, 철원 군수를 지낸 분이다. 말하자면 봉래는 '태산이...'로 볼진대 당대의 문명을 떨쳤음직한 시객이랄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보다는 40년 동안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선정을 베푼 지방 관리라는 게 맞을 것이다. 한때 유명한 점쟁이 남사고한테서 점술 공부도 한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지 양사언은 뒷날에 임진왜란을 예언하였다 해서 또 그 방면의 대가쯤으로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야 어쨌든 천의무봉하고 기발한 시재와 해서, 초서에 다 같이 명필이던 그 양사언은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 그처럼 대성할 수 있었는지 그의 출생에 얽힌 일화를 더듬어 보면서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민은 한량이었다. 양민이 전라도 영광 사또로 재직하고 있을 때다. 풍채가 좋고 호기 또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아 부임지마다 그럴 듯한 일화를 남겨 놓고는 하던 양민 사또. 신관 사또가 영광으로 부임하는 초행길은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풍류를 좋아하고 겸해서 술잔을 마다하지 않는 양민 사또의 성품으로 보아 머지않아 또다시 그럴싸한 이야깃거리가 생겨날 것이므로 사또를 호위하는 관속들은 신바람이 절로 났다. 마침 계절은 청명, 한식도 지나고 3월 중순. 사또의 행차를 맞는 시골 길가에는 듬성듬성 꽃들이 피어 있고, 산과 들에는 파릇파릇 푸른 싹이 돋아나는 호시절. 한양성을 벗어나 동작강을 건너고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는 양 사또의 마음에도 어느새 푸른 꿈이 돋아나고 있는 터라 행차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쉬이―, 사또 행차이시다. 길 비켜라―." 관졸들이 길가에 있는 개미새끼까지 쫒을 기세로 사또 행찻길을 트여가자 양민 사또는 문득 초라한 주막집을 발견하고는, "여봐라, 발을 멈추고 주막에 들여라―." 냅다 소리치는 것이었다. 주막이 나설 때마다 그 곳 술맛을 즐기고 아름다운 절경이 눈에 뜨일 때마다 가마를 멈추고 시 한 수를 읊어대는 양민 사또의 늑장으로 머나먼 영광행은 아득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을 그렇게 술과 풍류로 떠나자니까 이튿날 새벽이면 심한 갈증으로 선잠을 깨게 마련이었다. "물.....술국을 달라." 사또는 헛소리처럼 관졸들에게 외쳐댔으나 관졸들은 이미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고 코를 드르렁거릴 뿐이었다. 영광땅이 지척인 어느 주막잡에서 묵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술국.....물......" 그러나 사또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은 채 행차는 떠났다. 아침을 거른 채 가마 위에 올라탄 양민 사또는 배가 몹시 고팠다. 하나 웬일이지 길가에는 요기를 하고 떠날 만한 주막도 없었다. 참다 못한 양민 사또, 주위를 돌아보면서 호령이다. "누가 저 미가에 들어가 밥 한술 마련해 올 자 없느냐?" 체면이고 뭐고가 없었다. "밥이라굽쇼, 사또?" "오냐, 술이 아니고 밥이니라." "알아 모시겠나이다, 사또." 관속은 민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농사철이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들로 나간 것이었다. 이리 뛰고 절 닫지만 좀처럼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이거 이러다간 큰일이었다. "누구 아무도 없느냐?" 골목에 서서 냅다 소리 지르자 어느 집 사립문이 열리면서 마침 집을 지키던 열서너 살짜리 졔집아이가 뛰어나왔다. "옳지, 너 같은면 밥이야 짓겠지, 얘 여기서 밥 한 그릇 지을 수 없겠냐?" 관속이 말하자 계집아이는, "밥이라뇨, 누가 잡숫고 갈 밥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신관 사또 행차가 지금 이리루 지나가시는데 간밤에 약줒잔이 높으셔서 아침 진지를 걸르셨지 뭐냐." "그런데요." "해서 주막도 없고 민가에서라두 아침을 시벼 먹으려고 이렇게 들어왔는데 사람이 없구나." "바쁜 농사철이라 모두 들에 나갔어요. 그런 사정이사라면 소녀가 사또 진지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왜요. 진지에 돌이라도 들어갈까봐서 염려되시옵니까? 그런 염려라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 맹랑한 것. 좋다, 만일 진지에 돌이 들어가는 날엔 이내 볼기짝이 남아 나지 않을 터이니 알아서 지으렷다." "암은요, 만일 실수가 있다면 소녀가 대신 볼기를 맞을 터이니 마음 푹 놓으세요." "그럼......." "네, 곧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13세의 소녀는 관속에게, "사또께서 노상에서 진지를 드심은 고을 백서의 수치가 아닌가 합니다. 누추하나마 저의 집에 듭시어 잡수심이 어떠할지요?" 관속은 그 소리에 내심 무릎을 쳤다. '어허....나이도 어린 것이 고런 소견이 들 줄이야.' "암 그래야지. 그 참 어린 것이...." 관속은 연방 혀를 내두르며 양민 사또가 가마를 내리고 쉬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찌 되었느냐?" 양민 사또는 달려온 관속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묻는다. "예..... 아침 진지를 시켜 놓고 왔사옵니다. 어서 민가로 듭시오, 사또....." "민가로?" "예." "그 달갑지 않은 걸음이로구나. 신관 사또가 민폐를 끼치더란 소문이 나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거든." 사또는 그런 게 질색이었다. "하오나 사또, 저쪽 계집아이가 말하기를, 사또께서 노상에서 진지를 드시게 할 수 없다며 자기 집으로 오랍십니다." "호오." 일말의 호기심이 일면서 양민 사또는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오륙 칸 초가. 비록 초가이기는 해도 소녀의 집은 비질이 잘 되어 있어 보기에도 깨끗했다. 소녀는 신관 사또 양민과 그 수행원들을 따로따로 들게 하고 별로 서두르는 법 없이 밥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소녀는 이남박을 들고 토방으로 들어가서 쌀을 꺼낸 다음 우물가로 향했다. 안방에서는 신관 사또가, 그리고 책방으로부터 육방 관속들은 나머지 방에서 모두 자기 한 몸을 주시하는 줄도 모르고 소녀는 찬찬히 쌀을 일었다. 소녀는 그것을 부엌으로 가지고 가 솥에 넣고는 불을 때었다. 이러한 순서가 여느 아낙네들이 하는 그것과 다를 것이 없건만 그녀는 불을 때는 데 봉당이나 방으로 재티 하나 날지 않게 조심조심 때고 있었다. 밥이 다 된 뒤에도 먼저 신관 사또의 상부터 차려 올리고 다음에는 관속들의 상을 차리는데, 무엇 하나 서두름이 없고 실수가 없이 차근차근히 차려 올리는 것이었다. 이 모양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시장끼를 채운 신관 사또 양민은 슬그머니 그 소녀를 불러 올려 말을 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영리하고 숙성한 소녀인 듯했고 상 심부름, 물 심부름, 하는 맵시가 또한 귀히 살 만했기 때문이었다. "허어.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사또는 조금도 시골스러워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실눈을 뜨고 넌지시 물어본다. "예, 올해 열세 살이옵니다." 나직하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품이 여간 귀엽지가 않다. "그랴, 네 아비는 누구이며 어미는 어디 갔기에 보이지 않느냐?" "예, 아비는 본관에 매인 몸이라 일찍 출타하였고, 제 어미는 들일을 하러 나갔나이다." 열세 살짜리 소녀의 말이라기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낙의 말처럼 정연한 솜씨에 사또는 놀랐다. 신임 영광 사또는 소매 속에서 청선·홍선의 두 자루 부채를 꺼내 들었다. 소녀에게 무엇인가 고마움을 표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이 두 부채는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라." 사또가 내민 두 자루 부채를 받아야 좋을지, 받지 않아야 좋을지 잘 몰라서 망설이는 소녀에게 농을 걸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자 어서 받으렴. 이는 내게 너에게 채단 대신으로 주는 것이니....." "?" 소녀는 놀랐다. '사또께서 내게 채단을 내리시다니.' 소녀는 급히 윗방으로 건너가 장속을 뒤져 홍보를 꺼내 든다. '옳지, 이것을 깔고 채단을 받아야지.' 채단이라면 혼인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미리 보내는 청색, 홍색 등의 치마 저고릿감이 아닌가. 치마 저고릿감 대신 사또는 지금 청색과 홍색의 부채 두 자루를 내리시겠다니 빈 손으로 받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홍보를 깔아 놓고 소녀는, "사또 여기다 채단을 내려놓으소서." 했다. "아니, 이 홍보는 무엇인고?" "채단이란 예폐로, 예는 폐백에 바치는 것이 제일 중한 일인줄 압니다. 어찌 이 귀한 채단을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딴엔 그렇구나. 소녀의 말에 사또는 물론이고 그 장면을 기웃거리던 관속들이 일제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홍보 위에 두 자루의 부채가 놓여졌다. 소녀는 그 홍보를 소중하게 싸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영광 사또는 행차를 재촉하여 부임지로 떠났다. 세월은 흘렀다. 양민 영광 사또는 정무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따금 절경을 찾아 풍류로 하루 해를 보내기를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영광 관아에 사또를 뵙자고 달려온 노인이 있었다. 양민은 노인을 불러들이고, "네가 나를 만나러 온 까닭이 무엇이냐?"하고 묻는다. "예, 예." 노인은 연방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사또께옵서 한 삼년 전에 어느 동리를 지나시다가 뉘집 계집아이에게 아침 진지를 지어 잡숫고 오신 적이 있사옵니까?" 하고 묻는다. 사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무릎을 쳤다. "그렇지, 암..... 그런 일이 있었구말구." "그래 그 계집아이의 얼굴도 분명 기억하구 계신지요?" "암!" "계집아이가 어떻게 생겼더이까, 사또?" "그걸 왜 내가 모르겠나. 계집아이의 영리함이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인데." "듣자하니 그 때 사또께오서는 그 계집아이에게 무슨 물건을 주셨다던데요?" 사또는 여기서 잠시 삼 년 전의 일을 상기하는 듯하더니, "옳거니, 내 그때 계집아이를 귀히 여겨 색선을 상으로 준일이 있었거니." "그럼 틀림없는 일이로군요?" 노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그 계집아이 일을 나에게 와서 묻는고?" 사또는 진정 그것이 궁금해서 묻는다. "다름이 아니오라, 사또께서 색선을 선물로 주셨다는 그 계집아이가 소인의 여식이옵니다." "자네 딸이라구?" "예." "그런데?" "그 계집아이는 지금 나이 열여섯이옵니다. 시집갈 나이입죠. 하오나 아무리 소인이 시집을 보내려 하여도 딸년은 한사코 시집을 안 가겠다 뿌리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뿌리칠까?" "이미 사또한테서 채단을 받아 놓았으니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다 이거 올습니다." "허어." "소인이 달래어 보아도 막무가내, 매로 다스려 보아도 사또께 향한 일편 단심은 변함이 없더라 이거 올습니다." "허허허, 그러렷다!" "자네 딸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르는 체할 수 있겠느냐. 마땅히 택일하여 아내로 맞을 터이니 그리 알라." 이리하여 양민 사또는 삼년 전에 아침 한 끼 얻어먹은 소녀를 첩으로 들어앉혔다. 얼마 뒤 양민의 정실은 죽고 첩이 정실처럼 들어앉아 크낙한 살림을 맡게 되었다. 소녀는, 아니 이제는 사언, 사기 두형제의 어머니가 된 부인은 전처 소생의 사준까지를 돌보면서 대소사를 다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는 적서의 차이가 심하던 때다. 자라날수록 양사언, 양사기는 물론 이들의 형뻘되는 사준 삼형제의 재주는 참으로 뛰어났다. 봉제사 빈객의 예절에 바르고 가훈이 엄한 터에 양민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중에서도 부모에서 낳은 두 아들 사언, 사기 형제의 머리위에 띄어진 서자의 너울을 벗겨 보자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풍채가 당당하고 시재가 넘쳐 흐르는 사언 형제는 주위로부터, 혹은 친척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서자는 한스런 신분임을 어쩌랴. 때마침 양민이 죽게 되자 집안은 또다시 장례 문제로 분분했다. 양사언의 어머니는 습렴의 절차를 모두 보살핀 끝에 성복날이 오자, 기어코 그녀의 한스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양사준, 사언, 사기, 삼형제(상제)도 모였다. "오늘 성복을 당하여 집안 친척들이 모두 모이고 상제들이 다모인 자리에서 내가 평생 소원하던 말을 얘기할 터이니 들어주겠소?" 이렇게 묻는 부인의 눈에서는 어느새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맏상제 사준이, "서모, 서모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평생을 아버님 뜻에 어긋남이 없이 가사를 돌보시고 우리를 키워 왔으니 섬모는 누가 뭐래도 나의 어머니요, 또 우리 삼형제의 어머니십니다. 무슨 소원이신지 말씀하세요." 양사언의 어머니는 지극한 눈으로 본실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그럼 말하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첩이 양씨 가문에 들어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리 나라 풍습은 내 아들이 자라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슬프기만 하오. 아들이 재주 있고 풍채 비록 남다르다 하나 서자의 너울은 벗을 길이 없구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양사언의 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누 위에 흙을 쓰고 죽는 날에도 우리 큰 아드님은 석달 복밖에 입지 않을 터이요,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이 서자 소리를 면키 어려운 것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은 모를 터이니....." "서모 그게 무슨 말씀이오?" 사준이 꾸짖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그러나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양사언의 어머니는 본실 아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내 이미 마음을 다잡아먹은 몸, 무엇을 주저하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으련만....." 말을 잇다 말고 양사언의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해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가족들과 세 아들은 숙연한 채 말이 없었다. 그것은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무언의 답례였다. 이때 양사언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품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꺼내어 땅바닥에 폭삭 엎어졌다. "어머니....." 세 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부인을 일으켜세웠을 땐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태산이 높다하되....." 로 문명을 날린 양사언의 출세 뒤에는 이렇듯 그 어머니의 보살핌과 남다른 사랑이 자양분으로 동원되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궁궐 기왓장에 서린 백성의 한숨 - 박종진(숙명여대 교수) - 2/2 백성의 피땀으로 세워진 궁궐과 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궁궐과 절이다. 기둥 하나 기왓장 하나 하나 모두 백성의 힘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는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정종이 서경으로 서울을 옮기기로 하고 사람을 징발하여 원망이 많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다고 한다. 힘들도 고통스러운 요역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심정은 기뻐서 날뛰고도 남았으리라. 이렇듯 백성들의 노력과 원망으로 궁궐은 지어졌으며, 국가 사업으로 창건한 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국가주도로 궁궐과 정을 짓는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 차원의 토목공사가 결정되면 왕은 그 일의 책임자인 동역관을 임명하였다. 동역관에는 내시. 환관 등 왕 측근인사나 재상의 반열에 드는 고관들이 임명되었다. 왕은 동역관에게 사람을 징발하고 일을 추진하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동역관은 일의 규모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사람을 징발하였다. 일의 규모와 공사의 위치에 따라서 징발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군현단위로 작성한 호적을 기초자료로 썼다. 일의 성격에 따라서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막일꾼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사람과 전문 기술자라 할 수 있는 공장을 징발하였다. 1029년(현종20)개경의 나성을 축조할 때에는 막일꾼 238,939명과 공장 8,450명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공사를 하는 부근의 군현에서 징발하였다. 현종이 중광사와 나성을 축조할 때에는 개경사람을 징발하였으며, 인종이 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에는 서경사람을 징발하였고, 충예왕이 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에는 근처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개경 부근의 백성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요역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요역을 감면하라는 명령도 자주 내려졌다. 특히 교주도는 좋은 목재가 많아서 큰 공사가 있을 때마다 벌목이나 나무운반 같은 힘든 역을 지곤 하였다. 또 개경과 서경을 잇는 길 주변의 군현은 왕이나 사신의 행차가 잦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렇듯 요역은 모든 군현의 백성들이 똑같이 부담한 것은 아니었다. 동역관은 해당 군현의 수령과 향리의 도움을 받아서 정해진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결국 각 군현에 할당된 사람을 징발하고 동원하는 일은 수령과 향리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국가차원의 공사라도 규모가 작은 경우 해당 군현의 수령이나 향리층이 감독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국가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배를 만들 때 전주의 하급 관리인 진대유와 향리인 이택민이 함께 역을 감독하였다. 한편 징발된 사람들이 일하러 나오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였다. 1097년(숙종2)에는 빠진 날 수에 따라 1일에 태40, 4일에50, 7일에 장60, 10일에80, 13일에90, 19일에100, 23일에도1년이라는 가혹한 벌이 정해졌다. 향촌에서 촌장이 과역 대상자를 빠뜨렸을 때에도 엄하게 다스렸다. 이러한 것은 노동력을 지배하려는 국가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 준다. 삯노동이 필요했던 까닭은? 요역노동은 일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부역노동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에 삯노동이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다.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삯 노동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절을 지을 때 일이 없이 노는 사람을 고용한 사례는 고려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 와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요역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모되는 것은 공적인 일에서의 삯 노동이다. 국가의 공적인 토목공사에서 고용노동이 일반화 되는 것은 중세 노동력 지배정책의 붕괴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변화로 요역노동의 운영이 어려워지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도 공적인 역사에서 고용노동이 존재하였을까. 있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지배층들에게 토지가 집중되고 호적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서 민호의 유망이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 노동력을 제대로 징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품종 등으로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품종은 구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품관 등의 지배층으로부터 그들이 보유한 노동력을 징발하는 일종의 임시세이다. 충렬왕 6년 궁실 수리를 위하여 관료로부터 품종을 징발하였는데, 노비가 없는 양반은 녹봉지급증서인 녹패를 팔아 사람을 고용하여 부역 나간 사례가 있다. 이것은 양반 개인 차원에서 사람을 고용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에 삯노동의 여건이 어느정도 성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청을 짓는 데에 사람들이 고용된 사례도 있다. 133년(충숙왕후2)궁중 안에 있는 6개 관청의 청사를 개축하면서 재원이 부족하자 개인 집에서 돈을 빌려 재목과 기와를 샀으며, 관에 일할 사람을 청했지만 얻지 못하자 사적으로 고용하였다. 또 1390년(공양왕2)도평의사사의 청사를 새로 지울 때에도 필요한 모든 노동력을 고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호적제의 문란 등으로 요역징발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시켜 고려 후기에 요역제 자체가 변화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국가의 공적인 역사는 주로 일반 백성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국가의 역사에서 삯노동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고용할 인부와 인부를 살 재정을 확보하여야한다. 특히 재정은 역의 징발대상자가 노동력 대신 내는 현물세에 의하여 충당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예가 이른바 ‘역가’이다. 명종 때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으로부터 역가를 받고 공물 조달의 역을 면제해 준 사실이 있다. 이는 불법적인 것이어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지만, 요역 대신 역가를 받는 관행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관청에 예속된 기인이 도망가자 관청에서 해당 주군으로부터 기인의 역가를 받은 사례가 있으며, 이러한 것은 품종에게도 적용되었다. 요역노동은 일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 외에도 부정기적인 경우가 많아서 농업 등의 생업을 어렵게 하였다. 도한 징발기준도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역의 징발이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에 따라서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일에 나가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요역이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쓰라린 고통이요 무거운 짐이었다. 요역노동은 국가운영에 필요한 현물과 노동력을 직접 거두어서 쓴다는 고려시대 경제운영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 부담이 컸기 대문에 계속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호구 파악을 철저히 한다든지, 수령이나 향리들의 중간 수탈을 방지한다든지, 농번기에는 요역징발을 금지한다든지, 징발기준을 사람 수에서 소유토지의 면적으로 바꾼다든지, 다른 부세를 감면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요역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노동력이 필요할 때마다 노동력 자체를 징발하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할 수 없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제 손은 찬데요! 매일 아이들과 티격태격인 게 학교 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두 명의 말썽꾸러기는 선생님들을 몹시도 힘들게 하지만 오늘은 제 마음이 푸근하기만 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 치고 말썽꾸러기 아닌 아이가 없지만, 특히 오학년이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어리다고 할 수도, 나이가 많다고 할수도 없는 나이인 데다가 부모님의 관심도 줄어들 때이기에 더 별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학년 배정을 받던 날부터 잔뜩 긴장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학년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 말썽꾸러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말썽 꾸러기는 장난이 하도 심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그 애는 짝을 괴롭니다 나에게 야단을 맞았는데, 고개를 푹숙인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아이의 두손을 잡고 달래 보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하며 그 아이의 손을 잡았는데 아이의 손이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야!손이 너무 따뜻하구나. 손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도 착하고 따뜻하다던데, 아마 너 가슴은 더 따뜻할 거야. 얘들아, 너희들은 모르지?"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물론 손을 잡힌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감탄사를 쏟아냈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세요? 책상 밑으로 손을 내리더니 제 손들을 매만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키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손은 찬데요. 그럼 전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가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고 제가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 많기로 소문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뭘, 네 손도 따뜻한 걸." 그러자 그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돌아서는 순간 저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핬는지 모습니다. 어른든에게는 한 순간 웃고 넘어 갈 일이었겠지만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마음은 저를 무척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생활 속에서 메마름을 느낄 때, 생활이 힘들 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해맑은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작은 웃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은선 님/대구시 동구 방촌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8 - 자유와 평등 추구: 몽테스키외 등(1689-1755) 그때 세계에서는 1725년: 덴마크 베링(러시아 국적), 제 1차 북태평양 탐험 1755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 창립 영국의 존 로크의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영역에서 뿐 아니라 국민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인식론보다는 종교적 이신론, 정치사상, 교육이론 등이 직접 영국사회의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광범위한 성격을 그 당시의 지성 사회에서 평가한다면 계몽사상 및 계몽주의라고 불러서 좋을 것이다. 계몽사상의 핵심이 되는 것은 이성의 계발과 인간다운 삶을 육성, 확대시키는 일이라고 보아 좋겠다. 그리고 그것은 지성인의 교양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연히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종교적 신앙을 탈피하는 일이며, 자유로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의 방향을 택하게 된다. 이성적 인간은 개인에게는 자유를, 사회에서는 평등을 추구하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이러한 사상이 영국에 있어 급진적인 변혁을 일으키는 것을 본 프랑스의 사상가들이 그 정신을 성급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정치와 문물에서 모두 영국이 선진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라 메트리(La Mettrie, 1709-1751)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법리론을 받아들여 발전적인 국가관을 형성시키려 했고, 국민사상계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볼테르는 지금도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다. 영국의 이신론을 받아들여 발전시켰고, 뉴턴 연구로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회비판가였다고 보아 좋겠다.어떤 사람은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눈을 뜨게 해준 다방면의 계몽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종교와 이성적 신앙을 주장해 모든 미신을 반대했고, 전통적 기독교를 크게 공박해 교회와 교리 중심의 전통을 뒤흔들어 놓았다. 철학의 현학성을 떠나 상식적인 교양을 보급시켰다. 라 메트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물체론을 주장했을 정도의 유물론자가 되었다 결국은 반기독교 사상때문에 군의관과 공직을 잃고 화란으로 떠나야 했을 정도였고,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인간기계론"에서 그 당시의 유물론적 성향을 짐작케 된다.그는 인식의 주체는 감각이며, 인간의 행동은 밝혀지지 못한 기계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도덕의 기준도 신체적 의미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밟는 동안에 프랑스에서는 모든 지식과 학문은 집대성한다는 의도 밑에 백과전서 학자들이 등단하게 된다. 모든 학문을 교양적인 수준에서 집대성시키는 데 당시의 학자들이 대거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유물론적인 계몽주의 사상의 흐름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신 모든 학문에 걸쳐 자유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계몽정신의 보급을 돕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유물론이 자리잡는 곳에는 언제나 회의주의가 뒤따르는 법일까. 이 백과전서 시대에도 짙은 회의주의는 가시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계몽사상말기를 장식하는 한 특이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가 세계적으로 놀리 알려진 루소(J.J Rousseua, 1712-1778) 였다. 그는 볼테르 못지 않게 프랑스 국민들의 아낌과 존경을 받는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도 루소의 무덤은 혁명적으로 프랑스에 기여한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판테온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루소는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일생을 살았고, 그의 사상 또한 독창성을 지닌 것이었다. 말년의 그는 약간의 병적인 성격과 사생활을 보여주었다고 전기작가들은 말하고 있으나, 사실 루소는 유년기부터 천분을 지닌 병적 성격의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참회록", "에밀", "민약론"등이 번역되어 적지 않은 애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모두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저작들이다. "참회록"은 그의 생애를 소상히 각색한 자서전이다 누구나 읽어서 흥미있는 내용이며, 읽고 나면 루소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엿볼 수가 있다. 전반부가 나왔을 때 상당히 공격적이며 착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볼테르가 그 허점과 거짓으로 각색된 점들을 신랄히 지적했기 때문에 후반부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내용으로 바뀌어졌다고 전한다. 볼테르는 본래가 안하무인의 성격이었다. 투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부채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는데, 채권자의 뺨을 때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항의를 하는 채권자에게 볼테르의 측근이 "당신은 세계 제일 가는 천재에게 따귀를 맞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위로를 했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볼테르가 취급하지 않은 문제도 없었거니와, 유명한 인사 중에 볼테르의 비판을 모면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에밀"은 아주 독창적인 자연주의 교육론을 작품화시켜 서술한 것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교육학 및 교육철학자들의 연구논문으로도 많이 떠오르곤 했던 책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은 '참꽃'...먹을 수 없는 꽃은 '개꽃' '개나리'와 '진달래'의 '개-'와 '진-'이 접두사임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개나리'는 '나리'에 접두사 '개-'가 붙은 것이고 '진달래'는 '달래'에 접두사 '진-'이 붙은 것입니다. 나리꽃은 나리꽃인데, 그보다도 작고 좋지 않은 꽃이라고 해서 '나리'에 '개-'를 붙인 것이고, 달래꽃은 달래꽃인데 그보다는 더 좋은 꽃이라고 해서 '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 '나리'꽃은 '백합'꽃을 일컫던 단어였습니다. '백합'꽃과 '개나리'꽃을 비교해 보세요. '나리'꽃과 '달래'꽃을 아시는 분은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는 접두사 '진-'을, 좋지 않은 것에는 접두사 '개-'를 붙인 단어가 우리 국어에는 무척 많지요. 이러한 것의 전형적인 것을 들어 보일까요? '개꽃'과 '참꽃'을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아마도 대전과 군산을 잇는 경계선 아래에 고향을 두신 분입니다. 즉 이 단어는 영남과 호남의 일부지방에서만 사용되는 방언입니다. 그 북쪽이 고향이신 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은 '참꽃'이고 먹을 수 없는 꽃은 '개꽃'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이등박문의 죽음 요절한 일본의 민요시인 이시가와다꾸보쿠는 이등박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추도가 9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사건의 경위와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 아침 동경의 각 신문은 대부분이 모든 지면을 할애하여, 공이 조난당한 보도를 만재했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의 의심이 여지도 없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은 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해, 객차에서 내려 환영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한국 혁명당 청년이 공격을 하여, 복부에 2발의 권총 탄환을 맞아 30분 뒤에 차안의 한 구석에서 잠들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69년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활기찬 고동을 계속해 온 위대한 심장은 지금 홀연히 첫눈이 내리는 이역의 아침에 그 활동을 영원히 멈추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우리들 국민이 마지막 슬픔을 고 공작의 영전에 고해야 하는 날이다. (중략) 하늘도 흐리고 낮아졌다. 우리들은 오늘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공의 흉사가 세계에 미친 감동은 지대하다. 그렇다. 의외로 지대하다. (중략) 우리들의 슬픔은 길다. 그리고 또 이토공으로서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국사에 몸을 바친, 고인도 은근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인의 심사를 가련하다고 해야할까. 공이여 고이 잠드소서. (이하생략) 위에서 다꾸보꾸가 지적한대로 이토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국사를 위해 타국을 방문하던 공무집행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백발의 노인은 평소 동경에 있는 요시하라 술집에 파묻혀 살았는데 취하면 미인의 무릎을 벤 채 잠이 들었고, 깨어나면 천하 권세를 잡았노라. 고 외치던 자신의 말대로 만약, 기생의 무릎을 베고 거기에서 죽었다면 그러한 찬사와 대접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안중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름을 빛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토는 만주 출행을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썩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했다. 야심이 대단하던 그는 이번 만주 여행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은 한가한 여행 이라고 선언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적은 관동도독부를 철폐하고 한국통감이 된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중국에 통감을 두어 중국의 재정사무를 감독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만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해 러시아대신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말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였던 것이다. 이토는 중국 시찰을 앞두고 주역의 대가인 다카시마라는 사람이 이등박문의 출행점을 쳤다. 득괘는 간위산의 3효동으로 중산간이다. 간은 산 이니 간지간은 산넘어 산 이란 뜻이다. 간은 또한 멈추라 는 뜻이니 원행을 중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그는 말했다. 그를 사살한 안의사의 이름은 중근 (간간은 중간). 다카시마가 풀이한 역의 예시는 이와 같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2. 천하 무적 칭키즈칸 군대의 숨은 비결 불과 8만의 군대로 세계를 정복한 칭키즈칸의 괴력. 그 엄청난 파괴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해 칭키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키즈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친(칭기즈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 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얄궂게도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1206년 그는 마침내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키즈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이후 칭키즈칸의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획되었으나 칭키즈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로마 원정이 예정대로 행해졌다면 세계사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칭키즈칸 군대의 가공할 만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첫째, 이 군대는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군대 조직과는 전혀 다른 조직 원리를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을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칸(유목민의 군주 칭호)의 명령에 따라 만 호, 천 호, 백 호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각 부족장들의 권한은 약화되고 칸으로의 중앙집권이 이뤄졌다. 지휘관은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했고 무능하면 그 자리는 즉시 부하에게 넘겨졌다. 실제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둘째, 칭키즈칸은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특히 개방적인 종교정책을 취함으로써 각 종교가 엉켜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이 불교도인 퀴췰릭을 정벌할 때였다. 그는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 옹호를 선전했다. 민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 셋째, 칭키즈칸은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몽고군의 승리만이 상업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키즈칸에게 넘겨 주었다. 칭키즈칸은 또 이들의 입을 통해 몽고군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유포시킴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몽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평민 군대의 탄생이 테무친을 몽고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칭키즈칸의 개인적인 능력과 당시 국제 상인 조직의 뒷받침이 결합되어 전무후무한 정복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다. 칭키즈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칭키즈칸은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다. 1227년 8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전투중 무릎에 맞은 화살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다. 이 밖에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 탕구트 국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그와 동침할 때 국부에 상처를 입혀 그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죽자 몽고군 기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했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이 제목은 원래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스톡홀름 황실문학원에서 수상할 때 했던 연설제목 '모호한 일본의 나'에서 나왔다.오에는 국가와 국민을 분리시키는 이런 강력하고 예리한 모호(ambiguity) 증상은 일본과 일본인 간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대화는 단순히 서구모방 일변도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일본인 또한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일본문화는 서구에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서구의 이해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혹은 이해도가 오히려 정체 내지는 후퇴되어 암울한 면만 남겼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정치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으로도 일본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오에가 말한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말에 대해 아직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논단은 그 자체가 모호한 면을 잔뜩 가지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모호'가 어떻게 폭력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기이하고 신비스런 일본민족이 내심의 속박과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택한 일종의 극단적인 수단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구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방된 일본은 '이해의 정체'로 인해 여전히 허공에 떠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는 '자신에 대한 속죄와 성공'의 관건이 되고,민족영혼을 비출 수 있는 등불이 되어 버렸다. 작가를 고뇌스럽게 한 것은 전쟁과 그에 따른 현대화 과정이 일본 및 기타 아시아 국가 간의 골을 메워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도 이질화하는 현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통스럽고 오만하면서 위로를 갈구하는 민족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 무조건 항복' 한다는 한 마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동맹국의 승리는 철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미국처럼 깊고 넓지 못했다. 미국의 '신타협주의'로 일본은 황권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권은 일본의 상징이며 국민이 영혼을 기탁하는 곳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승리의 성과를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일본을 보호하여 자신의 전후체제로 끌어들인 것은 미국이 패권을 가진 나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가장 성공적인 깃발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영향을 받게 될 소지가 가장 많던 원동지역에 공산주의와 맞설 수 있는 보루를 구축하였다. 이때 2차대전의 피해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중국으로서는 전후 일본의 징계방법과 일본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효과적인 건의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부분적으로 상실했었다. 1972년 키신저가 일본을 피해 비밀리에 파키스탄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오자 일본 국내에서는 중 .일 국교정상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둥하여 일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들은 일본에게 한 마디의 사전통고도 없는 미국에 대해 처참한 자괴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외에도 중국과는 이웃에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단절로 양국의 관계가 진공상태에 있다는 사실로 일본인 스스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심리는 시간이흐를수록 심해졌다. 이와 같이 '사태가 급박해지는' 상황에서 다나까(中角榮)는 끝내 모든 간섭을 떨쳐 버리고 베이징으로 달려와 국교정상화를 모색하였다. 일본의 '모호'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유엔에서 대만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다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시키자는 의안에 대해 일본은 대다수 국가들과 상반되는 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고는 베이징으로 달려와 쩌우인라이와 건배를 한 것이다. 이런 노예근성과 자주의식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대책없는 행위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들의 세련되지 못함과 정책상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종 최후 순간이 되어서야 대책을 마련하느라 야단을 피우는 모양이다 중 .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여론이 일어나자 일본 국내의 많은 정치가들은 '중화민국' 과의 관계를 어떤 틀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 꿈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도의적으로 장지에쓰를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일본의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장지에쓰는 전후 일본이 일어서도록 도와 주었고, 또 중국대륙에 있던 수백만 명의 일본포로들이 시베리아로 보내지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지에쓰는 중국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하면서 까지 일본이 천황제를 유지하고 독일과 같이 양분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장 총통 각하께서 일본에게 베푼 은혜는 산과 같이 위대하고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다나까가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내각은 쓰이나(權名)라는 특사를 대만에 보내 일본의 입장을 해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쓰이나의 역할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명하고 어떻게 용서를 빌 것인가? 이는 막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 사이에 자주 보이는 광경과 비슷하였다. 또 다른 사랑이 현재의 부부관계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혼하자니 옛 정-하룻밤의 부부는 백일의 정[一日夫妻, 百日恩]이라 했던가-과 서로간에 얽힌 손익 때문에 망설여지고 피할 수 없는 도덕적 손상이 두려워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숙원을 이루면서도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재산상의 손해를 면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잘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쓰이나는 대만에 가기 전 자신의 임무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였다.'나더러 이 한 장의 비행기표를 가지고 가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 당시에 어떤 사람도 그에게 임무를 정해 주지 않았다. '눈치 보아가며 일을 처리하라'는 말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 정치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현실과 결과에 대한 감지력과 판단력을 잃었던 것 같다. 만일 일본의 소망에 따라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대만과도 '예전 같은'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두 아내를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혼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쩌우인라이가 일본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안 후 인민대회당에서 약간 격노한 어조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일본은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는가?'라고 경고하자, 일본은 발등의 불을 끄듯 베이징으로 달려와 해명하였던 것이다. 지금 당시의 상황들을 회상하자니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베푼 관용에 대해 일본의 많은 정치가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분명 중국과 아시아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너그러운 마음과 원한을 초월해 베풀 수 있는 관용정신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백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이러한 관용에 대해 감격한 나머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중국을 모략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일본은, 중국이 그때 자기들에게 지대한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의 '대중화(大中華)' 사상이라는 모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며, 또 다음 세기를 바라보는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중국이 일본과 역사적인 분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중국이 자기에게 유리한 현실적인 환경을 만들어 후일에 세계를 제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일본이란 나라와 발생한 문제를 처리할 때 중국은 어느 정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작은 꽃게의 슬픔 동해안에 사는 큰 꽃게 한 마리가 작은 꽃게 한 마리가 바닷가 모래밭 위로 올라왔다. 바닷가 모래 속이 너무나 춥고 답답해서 바다 구경도 좀 하고 햇빛도 좀 쐬고 싶어서였다. "밖으로 나온 일은 정말 잘한 일이야. 아이 시원해." "저길 좀 봐, 아이들이 발가벗고 파도를 타고 놀잖아. 아, 정말 멋있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 작은 꽃게가 밖으로 나올 때 만든 자기의 모래 구멍을 보고 큰 꽃게한테 말했다. "큰 꽃게야, 참 이상하다. 내가 만든 구멍은 이렇게 작은데 네가 만든 구멍은 왜 그렇게 크니?" 그러자 큰 꽃게가 말했다. "아, 그건 내 몸이 크기 때문이야. 네 구멍이 작은 것은 네 몸이 작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 몸에 맞추어서 구멍을 파야 돼." 작은 꽃게는 큰 꽃게의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큰 꽃게처럼 큰 구멍을 파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큰 꽃게보다 더 큰 구멍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작은 꽃게는 큰 꽃게 몰래 다시 바닷가로 나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발가락과 집게 다리를 열심히 놀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되는 큰 모래 구멍을 팠다. 파도가 밀려와 기껏 파 놓은 구멍을 무너뜨려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큰 구멍을 파 놓았다. '이만하면 큰 꽃게가 판 구멍보다 몇 배나 더 클 거야. 나도 이제 큰 꽃게가 부럽지 않아.' 작은 꽃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작은 꽃게의 더듬이를 따갑게 찌르는 한 불빛이 있었다. "야 찾았다! 여기 있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들려 왔다. 작은 꽃게는 덜컥 겁이 났다. 얼른 자기가 파 놓은 모래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작은 꽃게는 구멍이 너무 커서 자기의 몸을 다 숨기지 못하고 전깃불을 든 한 아이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글터 → 이글저글 돼지는 항상 오른쪽을 누워서 잔다.거북이나 자라는 이가 없고 말은 눈썹이 없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은 모두 쪽진 발을 갖고 있다. 앵무새의 부리는 둘 다 움직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들은 단지 한쪽 부리만 움직인다. 개구리는 입을 벌리고는 숨을 쉴수 없다. 억지로 계속 입을 벌리고 있게 하면 질식하여 죽을 것이다. 돼지는 두 다리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수영을 잘 하지 못한다. 물에 빠졌을때에는 쪽진 발끝으로 자기 목구멍을 찔러서 죽기도 한다. 산토끼는 눈꺼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눈을 감지 않는다. 대신 아주 얇은 막이 있어서 잠 잘 때나 쉴 때 눈을 가려준다.동물 중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것은 사자이고, 큰사슴, 바다사자, 늑대, 코끼리의 순으로 이어진다.다람쥐는 땅 위를 달리는 것보다 더 빨리 나무를 탄다.염소는 윗니가 없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6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30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59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387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395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59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52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42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949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12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04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10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570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16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16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17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450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63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15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60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5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14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375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8 호4339.11.24 (10.04)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이외수님의 '내잠속에 비내리는데' 는 더 이상 독서편지를 통해 연재하지 않습니다. - 글터 -> 수필을 참조하세요. - 문학소식 경인일보사가 한국 문학의 미래를 만들어갈 재기발랄한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200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경기·인천 지역 일간지중 유일한 문인 등용문으로 해마다 공정하고 권위있는 심사를 통해 배출된 문인들이 활발한 활동으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올해 신춘문예 역시 재치있고 힘있는 문학도들의 참신한 작품으로 한국 문단을 빛낼 것입니다. 경인일보와 함께 한국 문학 미래의 한 획을 그어나갈 역량있는 문학도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응모마감:2006년 12월 8일(당일 소인 유효) ●응모부문:단편소설(200자 원고지 80~100매), 시(3편 이상) ●시상 및 상금:단편소설은 상패 및 원고료 300만원, 시는 상패 및 원고료 200만원 단, 당선자 없는 가작의 경우는 원고료의 반액을 수여 ●당선작 및 심사위원 발표:2007년 1월 2일자 경인일보 ●응모 및 문의:(442-702)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2의11 경인일보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031)231-5380, 5384 ※원고 하단에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도 함께 기재),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를 반드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접수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입한 원고나 기성작가의 응모, 표절작품의 경우에는 당선이 취소됩니다. 인터넷 및 전자메일을 통한 접수는 받지 않습니다. 글터 → 명언 / 격언 기회란 횃대에 앉는 일이라곤 없는 새와 같은 것./ C.M.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조선조 어머니의 표상 - 양사언의 어머니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거나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아마도 이 시조의 보급은 그 작자와 함께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 유명한 시조는 봉래 양사언이 지은 것이다. 양사언이라고 하면 조선 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해서 대동승을 거쳐 삼등, 함흥, 평창, 강릉의 지방관을 역임한 후 회양 군수, 철원 군수를 지낸 분이다. 말하자면 봉래는 '태산이...'로 볼진대 당대의 문명을 떨쳤음직한 시객이랄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보다는 40년 동안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선정을 베푼 지방 관리라는 게 맞을 것이다. 한때 유명한 점쟁이 남사고한테서 점술 공부도 한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지 양사언은 뒷날에 임진왜란을 예언하였다 해서 또 그 방면의 대가쯤으로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야 어쨌든 천의무봉하고 기발한 시재와 해서, 초서에 다 같이 명필이던 그 양사언은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 그처럼 대성할 수 있었는지 그의 출생에 얽힌 일화를 더듬어 보면서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민은 한량이었다. 양민이 전라도 영광 사또로 재직하고 있을 때다. 풍채가 좋고 호기 또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아 부임지마다 그럴 듯한 일화를 남겨 놓고는 하던 양민 사또. 신관 사또가 영광으로 부임하는 초행길은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풍류를 좋아하고 겸해서 술잔을 마다하지 않는 양민 사또의 성품으로 보아 머지않아 또다시 그럴싸한 이야깃거리가 생겨날 것이므로 사또를 호위하는 관속들은 신바람이 절로 났다. 마침 계절은 청명, 한식도 지나고 3월 중순. 사또의 행차를 맞는 시골 길가에는 듬성듬성 꽃들이 피어 있고, 산과 들에는 파릇파릇 푸른 싹이 돋아나는 호시절. 한양성을 벗어나 동작강을 건너고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는 양 사또의 마음에도 어느새 푸른 꿈이 돋아나고 있는 터라 행차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쉬이―, 사또 행차이시다. 길 비켜라―." 관졸들이 길가에 있는 개미새끼까지 쫒을 기세로 사또 행찻길을 트여가자 양민 사또는 문득 초라한 주막집을 발견하고는, "여봐라, 발을 멈추고 주막에 들여라―." 냅다 소리치는 것이었다. 주막이 나설 때마다 그 곳 술맛을 즐기고 아름다운 절경이 눈에 뜨일 때마다 가마를 멈추고 시 한 수를 읊어대는 양민 사또의 늑장으로 머나먼 영광행은 아득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을 그렇게 술과 풍류로 떠나자니까 이튿날 새벽이면 심한 갈증으로 선잠을 깨게 마련이었다. "물.....술국을 달라." 사또는 헛소리처럼 관졸들에게 외쳐댔으나 관졸들은 이미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고 코를 드르렁거릴 뿐이었다. 영광땅이 지척인 어느 주막잡에서 묵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술국.....물......" 그러나 사또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은 채 행차는 떠났다. 아침을 거른 채 가마 위에 올라탄 양민 사또는 배가 몹시 고팠다. 하나 웬일이지 길가에는 요기를 하고 떠날 만한 주막도 없었다. 참다 못한 양민 사또, 주위를 돌아보면서 호령이다. "누가 저 미가에 들어가 밥 한술 마련해 올 자 없느냐?" 체면이고 뭐고가 없었다. "밥이라굽쇼, 사또?" "오냐, 술이 아니고 밥이니라." "알아 모시겠나이다, 사또." 관속은 민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농사철이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들로 나간 것이었다. 이리 뛰고 절 닫지만 좀처럼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이거 이러다간 큰일이었다. "누구 아무도 없느냐?" 골목에 서서 냅다 소리 지르자 어느 집 사립문이 열리면서 마침 집을 지키던 열서너 살짜리 졔집아이가 뛰어나왔다. "옳지, 너 같은면 밥이야 짓겠지, 얘 여기서 밥 한 그릇 지을 수 없겠냐?" 관속이 말하자 계집아이는, "밥이라뇨, 누가 잡숫고 갈 밥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신관 사또 행차가 지금 이리루 지나가시는데 간밤에 약줒잔이 높으셔서 아침 진지를 걸르셨지 뭐냐." "그런데요." "해서 주막도 없고 민가에서라두 아침을 시벼 먹으려고 이렇게 들어왔는데 사람이 없구나." "바쁜 농사철이라 모두 들에 나갔어요. 그런 사정이사라면 소녀가 사또 진지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왜요. 진지에 돌이라도 들어갈까봐서 염려되시옵니까? 그런 염려라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 맹랑한 것. 좋다, 만일 진지에 돌이 들어가는 날엔 이내 볼기짝이 남아 나지 않을 터이니 알아서 지으렷다." "암은요, 만일 실수가 있다면 소녀가 대신 볼기를 맞을 터이니 마음 푹 놓으세요." "그럼......." "네, 곧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13세의 소녀는 관속에게, "사또께서 노상에서 진지를 드심은 고을 백서의 수치가 아닌가 합니다. 누추하나마 저의 집에 듭시어 잡수심이 어떠할지요?" 관속은 그 소리에 내심 무릎을 쳤다. '어허....나이도 어린 것이 고런 소견이 들 줄이야.' "암 그래야지. 그 참 어린 것이...." 관속은 연방 혀를 내두르며 양민 사또가 가마를 내리고 쉬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찌 되었느냐?" 양민 사또는 달려온 관속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묻는다. "예..... 아침 진지를 시켜 놓고 왔사옵니다. 어서 민가로 듭시오, 사또....." "민가로?" "예." "그 달갑지 않은 걸음이로구나. 신관 사또가 민폐를 끼치더란 소문이 나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거든." 사또는 그런 게 질색이었다. "하오나 사또, 저쪽 계집아이가 말하기를, 사또께서 노상에서 진지를 드시게 할 수 없다며 자기 집으로 오랍십니다." "호오." 일말의 호기심이 일면서 양민 사또는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오륙 칸 초가. 비록 초가이기는 해도 소녀의 집은 비질이 잘 되어 있어 보기에도 깨끗했다. 소녀는 신관 사또 양민과 그 수행원들을 따로따로 들게 하고 별로 서두르는 법 없이 밥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소녀는 이남박을 들고 토방으로 들어가서 쌀을 꺼낸 다음 우물가로 향했다. 안방에서는 신관 사또가, 그리고 책방으로부터 육방 관속들은 나머지 방에서 모두 자기 한 몸을 주시하는 줄도 모르고 소녀는 찬찬히 쌀을 일었다. 소녀는 그것을 부엌으로 가지고 가 솥에 넣고는 불을 때었다. 이러한 순서가 여느 아낙네들이 하는 그것과 다를 것이 없건만 그녀는 불을 때는 데 봉당이나 방으로 재티 하나 날지 않게 조심조심 때고 있었다. 밥이 다 된 뒤에도 먼저 신관 사또의 상부터 차려 올리고 다음에는 관속들의 상을 차리는데, 무엇 하나 서두름이 없고 실수가 없이 차근차근히 차려 올리는 것이었다. 이 모양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시장끼를 채운 신관 사또 양민은 슬그머니 그 소녀를 불러 올려 말을 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영리하고 숙성한 소녀인 듯했고 상 심부름, 물 심부름, 하는 맵시가 또한 귀히 살 만했기 때문이었다. "허어.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사또는 조금도 시골스러워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실눈을 뜨고 넌지시 물어본다. "예, 올해 열세 살이옵니다." 나직하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품이 여간 귀엽지가 않다. "그랴, 네 아비는 누구이며 어미는 어디 갔기에 보이지 않느냐?" "예, 아비는 본관에 매인 몸이라 일찍 출타하였고, 제 어미는 들일을 하러 나갔나이다." 열세 살짜리 소녀의 말이라기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낙의 말처럼 정연한 솜씨에 사또는 놀랐다. 신임 영광 사또는 소매 속에서 청선·홍선의 두 자루 부채를 꺼내 들었다. 소녀에게 무엇인가 고마움을 표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이 두 부채는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라." 사또가 내민 두 자루 부채를 받아야 좋을지, 받지 않아야 좋을지 잘 몰라서 망설이는 소녀에게 농을 걸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자 어서 받으렴. 이는 내게 너에게 채단 대신으로 주는 것이니....." "?" 소녀는 놀랐다. '사또께서 내게 채단을 내리시다니.' 소녀는 급히 윗방으로 건너가 장속을 뒤져 홍보를 꺼내 든다. '옳지, 이것을 깔고 채단을 받아야지.' 채단이라면 혼인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미리 보내는 청색, 홍색 등의 치마 저고릿감이 아닌가. 치마 저고릿감 대신 사또는 지금 청색과 홍색의 부채 두 자루를 내리시겠다니 빈 손으로 받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홍보를 깔아 놓고 소녀는, "사또 여기다 채단을 내려놓으소서." 했다. "아니, 이 홍보는 무엇인고?" "채단이란 예폐로, 예는 폐백에 바치는 것이 제일 중한 일인줄 압니다. 어찌 이 귀한 채단을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딴엔 그렇구나. 소녀의 말에 사또는 물론이고 그 장면을 기웃거리던 관속들이 일제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홍보 위에 두 자루의 부채가 놓여졌다. 소녀는 그 홍보를 소중하게 싸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영광 사또는 행차를 재촉하여 부임지로 떠났다. 세월은 흘렀다. 양민 영광 사또는 정무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따금 절경을 찾아 풍류로 하루 해를 보내기를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영광 관아에 사또를 뵙자고 달려온 노인이 있었다. 양민은 노인을 불러들이고, "네가 나를 만나러 온 까닭이 무엇이냐?"하고 묻는다. "예, 예." 노인은 연방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사또께옵서 한 삼년 전에 어느 동리를 지나시다가 뉘집 계집아이에게 아침 진지를 지어 잡숫고 오신 적이 있사옵니까?" 하고 묻는다. 사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무릎을 쳤다. "그렇지, 암..... 그런 일이 있었구말구." "그래 그 계집아이의 얼굴도 분명 기억하구 계신지요?" "암!" "계집아이가 어떻게 생겼더이까, 사또?" "그걸 왜 내가 모르겠나. 계집아이의 영리함이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인데." "듣자하니 그 때 사또께오서는 그 계집아이에게 무슨 물건을 주셨다던데요?" 사또는 여기서 잠시 삼 년 전의 일을 상기하는 듯하더니, "옳거니, 내 그때 계집아이를 귀히 여겨 색선을 상으로 준일이 있었거니." "그럼 틀림없는 일이로군요?" 노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그 계집아이 일을 나에게 와서 묻는고?" 사또는 진정 그것이 궁금해서 묻는다. "다름이 아니오라, 사또께서 색선을 선물로 주셨다는 그 계집아이가 소인의 여식이옵니다." "자네 딸이라구?" "예." "그런데?" "그 계집아이는 지금 나이 열여섯이옵니다. 시집갈 나이입죠. 하오나 아무리 소인이 시집을 보내려 하여도 딸년은 한사코 시집을 안 가겠다 뿌리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뿌리칠까?" "이미 사또한테서 채단을 받아 놓았으니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다 이거 올습니다." "허어." "소인이 달래어 보아도 막무가내, 매로 다스려 보아도 사또께 향한 일편 단심은 변함이 없더라 이거 올습니다." "허허허, 그러렷다!" "자네 딸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르는 체할 수 있겠느냐. 마땅히 택일하여 아내로 맞을 터이니 그리 알라." 이리하여 양민 사또는 삼년 전에 아침 한 끼 얻어먹은 소녀를 첩으로 들어앉혔다. 얼마 뒤 양민의 정실은 죽고 첩이 정실처럼 들어앉아 크낙한 살림을 맡게 되었다. 소녀는, 아니 이제는 사언, 사기 두형제의 어머니가 된 부인은 전처 소생의 사준까지를 돌보면서 대소사를 다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는 적서의 차이가 심하던 때다. 자라날수록 양사언, 양사기는 물론 이들의 형뻘되는 사준 삼형제의 재주는 참으로 뛰어났다. 봉제사 빈객의 예절에 바르고 가훈이 엄한 터에 양민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중에서도 부모에서 낳은 두 아들 사언, 사기 형제의 머리위에 띄어진 서자의 너울을 벗겨 보자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풍채가 당당하고 시재가 넘쳐 흐르는 사언 형제는 주위로부터, 혹은 친척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서자는 한스런 신분임을 어쩌랴. 때마침 양민이 죽게 되자 집안은 또다시 장례 문제로 분분했다. 양사언의 어머니는 습렴의 절차를 모두 보살핀 끝에 성복날이 오자, 기어코 그녀의 한스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양사준, 사언, 사기, 삼형제(상제)도 모였다. "오늘 성복을 당하여 집안 친척들이 모두 모이고 상제들이 다모인 자리에서 내가 평생 소원하던 말을 얘기할 터이니 들어주겠소?" 이렇게 묻는 부인의 눈에서는 어느새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맏상제 사준이, "서모, 서모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평생을 아버님 뜻에 어긋남이 없이 가사를 돌보시고 우리를 키워 왔으니 섬모는 누가 뭐래도 나의 어머니요, 또 우리 삼형제의 어머니십니다. 무슨 소원이신지 말씀하세요." 양사언의 어머니는 지극한 눈으로 본실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그럼 말하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첩이 양씨 가문에 들어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리 나라 풍습은 내 아들이 자라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슬프기만 하오. 아들이 재주 있고 풍채 비록 남다르다 하나 서자의 너울은 벗을 길이 없구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양사언의 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누 위에 흙을 쓰고 죽는 날에도 우리 큰 아드님은 석달 복밖에 입지 않을 터이요,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이 서자 소리를 면키 어려운 것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은 모를 터이니....." "서모 그게 무슨 말씀이오?" 사준이 꾸짖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그러나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양사언의 어머니는 본실 아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내 이미 마음을 다잡아먹은 몸, 무엇을 주저하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으련만....." 말을 잇다 말고 양사언의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해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가족들과 세 아들은 숙연한 채 말이 없었다. 그것은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무언의 답례였다. 이때 양사언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품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꺼내어 땅바닥에 폭삭 엎어졌다. "어머니....." 세 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부인을 일으켜세웠을 땐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태산이 높다하되....." 로 문명을 날린 양사언의 출세 뒤에는 이렇듯 그 어머니의 보살핌과 남다른 사랑이 자양분으로 동원되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궁궐 기왓장에 서린 백성의 한숨 - 박종진(숙명여대 교수) - 2/2 백성의 피땀으로 세워진 궁궐과 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궁궐과 절이다. 기둥 하나 기왓장 하나 하나 모두 백성의 힘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는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정종이 서경으로 서울을 옮기기로 하고 사람을 징발하여 원망이 많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다고 한다. 힘들도 고통스러운 요역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심정은 기뻐서 날뛰고도 남았으리라. 이렇듯 백성들의 노력과 원망으로 궁궐은 지어졌으며, 국가 사업으로 창건한 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국가주도로 궁궐과 정을 짓는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 차원의 토목공사가 결정되면 왕은 그 일의 책임자인 동역관을 임명하였다. 동역관에는 내시. 환관 등 왕 측근인사나 재상의 반열에 드는 고관들이 임명되었다. 왕은 동역관에게 사람을 징발하고 일을 추진하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동역관은 일의 규모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사람을 징발하였다. 일의 규모와 공사의 위치에 따라서 징발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군현단위로 작성한 호적을 기초자료로 썼다. 일의 성격에 따라서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막일꾼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사람과 전문 기술자라 할 수 있는 공장을 징발하였다. 1029년(현종20)개경의 나성을 축조할 때에는 막일꾼 238,939명과 공장 8,450명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공사를 하는 부근의 군현에서 징발하였다. 현종이 중광사와 나성을 축조할 때에는 개경사람을 징발하였으며, 인종이 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에는 서경사람을 징발하였고, 충예왕이 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에는 근처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개경 부근의 백성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요역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요역을 감면하라는 명령도 자주 내려졌다. 특히 교주도는 좋은 목재가 많아서 큰 공사가 있을 때마다 벌목이나 나무운반 같은 힘든 역을 지곤 하였다. 또 개경과 서경을 잇는 길 주변의 군현은 왕이나 사신의 행차가 잦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렇듯 요역은 모든 군현의 백성들이 똑같이 부담한 것은 아니었다. 동역관은 해당 군현의 수령과 향리의 도움을 받아서 정해진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결국 각 군현에 할당된 사람을 징발하고 동원하는 일은 수령과 향리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국가차원의 공사라도 규모가 작은 경우 해당 군현의 수령이나 향리층이 감독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국가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배를 만들 때 전주의 하급 관리인 진대유와 향리인 이택민이 함께 역을 감독하였다. 한편 징발된 사람들이 일하러 나오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였다. 1097년(숙종2)에는 빠진 날 수에 따라 1일에 태40, 4일에50, 7일에 장60, 10일에80, 13일에90, 19일에100, 23일에도1년이라는 가혹한 벌이 정해졌다. 향촌에서 촌장이 과역 대상자를 빠뜨렸을 때에도 엄하게 다스렸다. 이러한 것은 노동력을 지배하려는 국가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 준다. 삯노동이 필요했던 까닭은? 요역노동은 일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부역노동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에 삯노동이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다.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삯 노동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절을 지을 때 일이 없이 노는 사람을 고용한 사례는 고려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 와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요역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모되는 것은 공적인 일에서의 삯 노동이다. 국가의 공적인 토목공사에서 고용노동이 일반화 되는 것은 중세 노동력 지배정책의 붕괴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변화로 요역노동의 운영이 어려워지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도 공적인 역사에서 고용노동이 존재하였을까. 있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지배층들에게 토지가 집중되고 호적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서 민호의 유망이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 노동력을 제대로 징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품종 등으로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품종은 구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품관 등의 지배층으로부터 그들이 보유한 노동력을 징발하는 일종의 임시세이다. 충렬왕 6년 궁실 수리를 위하여 관료로부터 품종을 징발하였는데, 노비가 없는 양반은 녹봉지급증서인 녹패를 팔아 사람을 고용하여 부역 나간 사례가 있다. 이것은 양반 개인 차원에서 사람을 고용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에 삯노동의 여건이 어느정도 성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청을 짓는 데에 사람들이 고용된 사례도 있다. 133년(충숙왕후2)궁중 안에 있는 6개 관청의 청사를 개축하면서 재원이 부족하자 개인 집에서 돈을 빌려 재목과 기와를 샀으며, 관에 일할 사람을 청했지만 얻지 못하자 사적으로 고용하였다. 또 1390년(공양왕2)도평의사사의 청사를 새로 지울 때에도 필요한 모든 노동력을 고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호적제의 문란 등으로 요역징발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시켜 고려 후기에 요역제 자체가 변화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국가의 공적인 역사는 주로 일반 백성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국가의 역사에서 삯노동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고용할 인부와 인부를 살 재정을 확보하여야한다. 특히 재정은 역의 징발대상자가 노동력 대신 내는 현물세에 의하여 충당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예가 이른바 ‘역가’이다. 명종 때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으로부터 역가를 받고 공물 조달의 역을 면제해 준 사실이 있다. 이는 불법적인 것이어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지만, 요역 대신 역가를 받는 관행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관청에 예속된 기인이 도망가자 관청에서 해당 주군으로부터 기인의 역가를 받은 사례가 있으며, 이러한 것은 품종에게도 적용되었다. 요역노동은 일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 외에도 부정기적인 경우가 많아서 농업 등의 생업을 어렵게 하였다. 도한 징발기준도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역의 징발이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에 따라서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일에 나가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요역이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쓰라린 고통이요 무거운 짐이었다. 요역노동은 국가운영에 필요한 현물과 노동력을 직접 거두어서 쓴다는 고려시대 경제운영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 부담이 컸기 대문에 계속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호구 파악을 철저히 한다든지, 수령이나 향리들의 중간 수탈을 방지한다든지, 농번기에는 요역징발을 금지한다든지, 징발기준을 사람 수에서 소유토지의 면적으로 바꾼다든지, 다른 부세를 감면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요역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노동력이 필요할 때마다 노동력 자체를 징발하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할 수 없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제 손은 찬데요! 매일 아이들과 티격태격인 게 학교 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두 명의 말썽꾸러기는 선생님들을 몹시도 힘들게 하지만 오늘은 제 마음이 푸근하기만 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 치고 말썽꾸러기 아닌 아이가 없지만, 특히 오학년이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어리다고 할 수도, 나이가 많다고 할수도 없는 나이인 데다가 부모님의 관심도 줄어들 때이기에 더 별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학년 배정을 받던 날부터 잔뜩 긴장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학년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 말썽꾸러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말썽 꾸러기는 장난이 하도 심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그 애는 짝을 괴롭니다 나에게 야단을 맞았는데, 고개를 푹숙인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아이의 두손을 잡고 달래 보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하며 그 아이의 손을 잡았는데 아이의 손이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야!손이 너무 따뜻하구나. 손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도 착하고 따뜻하다던데, 아마 너 가슴은 더 따뜻할 거야. 얘들아, 너희들은 모르지?"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물론 손을 잡힌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감탄사를 쏟아냈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세요? 책상 밑으로 손을 내리더니 제 손들을 매만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키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손은 찬데요. 그럼 전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가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고 제가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 많기로 소문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뭘, 네 손도 따뜻한 걸." 그러자 그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돌아서는 순간 저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핬는지 모습니다. 어른든에게는 한 순간 웃고 넘어 갈 일이었겠지만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마음은 저를 무척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생활 속에서 메마름을 느낄 때, 생활이 힘들 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해맑은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작은 웃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은선 님/대구시 동구 방촌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8 - 자유와 평등 추구: 몽테스키외 등(1689-1755) 그때 세계에서는 1725년: 덴마크 베링(러시아 국적), 제 1차 북태평양 탐험 1755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 창립 영국의 존 로크의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영역에서 뿐 아니라 국민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인식론보다는 종교적 이신론, 정치사상, 교육이론 등이 직접 영국사회의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광범위한 성격을 그 당시의 지성 사회에서 평가한다면 계몽사상 및 계몽주의라고 불러서 좋을 것이다. 계몽사상의 핵심이 되는 것은 이성의 계발과 인간다운 삶을 육성, 확대시키는 일이라고 보아 좋겠다. 그리고 그것은 지성인의 교양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연히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종교적 신앙을 탈피하는 일이며, 자유로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의 방향을 택하게 된다. 이성적 인간은 개인에게는 자유를, 사회에서는 평등을 추구하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이러한 사상이 영국에 있어 급진적인 변혁을 일으키는 것을 본 프랑스의 사상가들이 그 정신을 성급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정치와 문물에서 모두 영국이 선진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라 메트리(La Mettrie, 1709-1751)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법리론을 받아들여 발전적인 국가관을 형성시키려 했고, 국민사상계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볼테르는 지금도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다. 영국의 이신론을 받아들여 발전시켰고, 뉴턴 연구로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회비판가였다고 보아 좋겠다.어떤 사람은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눈을 뜨게 해준 다방면의 계몽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종교와 이성적 신앙을 주장해 모든 미신을 반대했고, 전통적 기독교를 크게 공박해 교회와 교리 중심의 전통을 뒤흔들어 놓았다. 철학의 현학성을 떠나 상식적인 교양을 보급시켰다. 라 메트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물체론을 주장했을 정도의 유물론자가 되었다 결국은 반기독교 사상때문에 군의관과 공직을 잃고 화란으로 떠나야 했을 정도였고,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인간기계론"에서 그 당시의 유물론적 성향을 짐작케 된다.그는 인식의 주체는 감각이며, 인간의 행동은 밝혀지지 못한 기계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도덕의 기준도 신체적 의미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밟는 동안에 프랑스에서는 모든 지식과 학문은 집대성한다는 의도 밑에 백과전서 학자들이 등단하게 된다. 모든 학문을 교양적인 수준에서 집대성시키는 데 당시의 학자들이 대거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유물론적인 계몽주의 사상의 흐름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신 모든 학문에 걸쳐 자유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계몽정신의 보급을 돕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유물론이 자리잡는 곳에는 언제나 회의주의가 뒤따르는 법일까. 이 백과전서 시대에도 짙은 회의주의는 가시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계몽사상말기를 장식하는 한 특이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가 세계적으로 놀리 알려진 루소(J.J Rousseua, 1712-1778) 였다. 그는 볼테르 못지 않게 프랑스 국민들의 아낌과 존경을 받는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도 루소의 무덤은 혁명적으로 프랑스에 기여한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판테온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루소는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일생을 살았고, 그의 사상 또한 독창성을 지닌 것이었다. 말년의 그는 약간의 병적인 성격과 사생활을 보여주었다고 전기작가들은 말하고 있으나, 사실 루소는 유년기부터 천분을 지닌 병적 성격의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참회록", "에밀", "민약론"등이 번역되어 적지 않은 애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모두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저작들이다. "참회록"은 그의 생애를 소상히 각색한 자서전이다 누구나 읽어서 흥미있는 내용이며, 읽고 나면 루소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엿볼 수가 있다. 전반부가 나왔을 때 상당히 공격적이며 착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볼테르가 그 허점과 거짓으로 각색된 점들을 신랄히 지적했기 때문에 후반부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내용으로 바뀌어졌다고 전한다. 볼테르는 본래가 안하무인의 성격이었다. 투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부채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는데, 채권자의 뺨을 때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항의를 하는 채권자에게 볼테르의 측근이 "당신은 세계 제일 가는 천재에게 따귀를 맞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위로를 했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볼테르가 취급하지 않은 문제도 없었거니와, 유명한 인사 중에 볼테르의 비판을 모면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에밀"은 아주 독창적인 자연주의 교육론을 작품화시켜 서술한 것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교육학 및 교육철학자들의 연구논문으로도 많이 떠오르곤 했던 책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은 '참꽃'...먹을 수 없는 꽃은 '개꽃' '개나리'와 '진달래'의 '개-'와 '진-'이 접두사임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개나리'는 '나리'에 접두사 '개-'가 붙은 것이고 '진달래'는 '달래'에 접두사 '진-'이 붙은 것입니다. 나리꽃은 나리꽃인데, 그보다도 작고 좋지 않은 꽃이라고 해서 '나리'에 '개-'를 붙인 것이고, 달래꽃은 달래꽃인데 그보다는 더 좋은 꽃이라고 해서 '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 '나리'꽃은 '백합'꽃을 일컫던 단어였습니다. '백합'꽃과 '개나리'꽃을 비교해 보세요. '나리'꽃과 '달래'꽃을 아시는 분은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는 접두사 '진-'을, 좋지 않은 것에는 접두사 '개-'를 붙인 단어가 우리 국어에는 무척 많지요. 이러한 것의 전형적인 것을 들어 보일까요? '개꽃'과 '참꽃'을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아마도 대전과 군산을 잇는 경계선 아래에 고향을 두신 분입니다. 즉 이 단어는 영남과 호남의 일부지방에서만 사용되는 방언입니다. 그 북쪽이 고향이신 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은 '참꽃'이고 먹을 수 없는 꽃은 '개꽃'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이등박문의 죽음 요절한 일본의 민요시인 이시가와다꾸보쿠는 이등박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추도가 9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사건의 경위와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 아침 동경의 각 신문은 대부분이 모든 지면을 할애하여, 공이 조난당한 보도를 만재했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의 의심이 여지도 없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은 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해, 객차에서 내려 환영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한국 혁명당 청년이 공격을 하여, 복부에 2발의 권총 탄환을 맞아 30분 뒤에 차안의 한 구석에서 잠들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69년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활기찬 고동을 계속해 온 위대한 심장은 지금 홀연히 첫눈이 내리는 이역의 아침에 그 활동을 영원히 멈추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우리들 국민이 마지막 슬픔을 고 공작의 영전에 고해야 하는 날이다. (중략) 하늘도 흐리고 낮아졌다. 우리들은 오늘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공의 흉사가 세계에 미친 감동은 지대하다. 그렇다. 의외로 지대하다. (중략) 우리들의 슬픔은 길다. 그리고 또 이토공으로서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국사에 몸을 바친, 고인도 은근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인의 심사를 가련하다고 해야할까. 공이여 고이 잠드소서. (이하생략) 위에서 다꾸보꾸가 지적한대로 이토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국사를 위해 타국을 방문하던 공무집행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백발의 노인은 평소 동경에 있는 요시하라 술집에 파묻혀 살았는데 취하면 미인의 무릎을 벤 채 잠이 들었고, 깨어나면 천하 권세를 잡았노라. 고 외치던 자신의 말대로 만약, 기생의 무릎을 베고 거기에서 죽었다면 그러한 찬사와 대접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안중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름을 빛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토는 만주 출행을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썩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했다. 야심이 대단하던 그는 이번 만주 여행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은 한가한 여행 이라고 선언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적은 관동도독부를 철폐하고 한국통감이 된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중국에 통감을 두어 중국의 재정사무를 감독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만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해 러시아대신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말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였던 것이다. 이토는 중국 시찰을 앞두고 주역의 대가인 다카시마라는 사람이 이등박문의 출행점을 쳤다. 득괘는 간위산의 3효동으로 중산간이다. 간은 산 이니 간지간은 산넘어 산 이란 뜻이다. 간은 또한 멈추라 는 뜻이니 원행을 중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그는 말했다. 그를 사살한 안의사의 이름은 중근 (간간은 중간). 다카시마가 풀이한 역의 예시는 이와 같았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2. 천하 무적 칭키즈칸 군대의 숨은 비결 불과 8만의 군대로 세계를 정복한 칭키즈칸의 괴력. 그 엄청난 파괴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해 칭키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키즈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친(칭기즈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 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얄궂게도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1206년 그는 마침내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키즈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이후 칭키즈칸의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획되었으나 칭키즈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로마 원정이 예정대로 행해졌다면 세계사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칭키즈칸 군대의 가공할 만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첫째, 이 군대는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군대 조직과는 전혀 다른 조직 원리를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을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칸(유목민의 군주 칭호)의 명령에 따라 만 호, 천 호, 백 호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각 부족장들의 권한은 약화되고 칸으로의 중앙집권이 이뤄졌다. 지휘관은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했고 무능하면 그 자리는 즉시 부하에게 넘겨졌다. 실제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둘째, 칭키즈칸은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특히 개방적인 종교정책을 취함으로써 각 종교가 엉켜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이 불교도인 퀴췰릭을 정벌할 때였다. 그는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 옹호를 선전했다. 민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 셋째, 칭키즈칸은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몽고군의 승리만이 상업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키즈칸에게 넘겨 주었다. 칭키즈칸은 또 이들의 입을 통해 몽고군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유포시킴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몽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평민 군대의 탄생이 테무친을 몽고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칭키즈칸의 개인적인 능력과 당시 국제 상인 조직의 뒷받침이 결합되어 전무후무한 정복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다. 칭키즈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칭키즈칸은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다. 1227년 8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전투중 무릎에 맞은 화살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다. 이 밖에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 탕구트 국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그와 동침할 때 국부에 상처를 입혀 그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죽자 몽고군 기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했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이 제목은 원래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스톡홀름 황실문학원에서 수상할 때 했던 연설제목 '모호한 일본의 나'에서 나왔다.오에는 국가와 국민을 분리시키는 이런 강력하고 예리한 모호(ambiguity) 증상은 일본과 일본인 간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대화는 단순히 서구모방 일변도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일본인 또한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일본문화는 서구에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서구의 이해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혹은 이해도가 오히려 정체 내지는 후퇴되어 암울한 면만 남겼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정치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으로도 일본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오에가 말한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말에 대해 아직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논단은 그 자체가 모호한 면을 잔뜩 가지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모호'가 어떻게 폭력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기이하고 신비스런 일본민족이 내심의 속박과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택한 일종의 극단적인 수단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구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방된 일본은 '이해의 정체'로 인해 여전히 허공에 떠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는 '자신에 대한 속죄와 성공'의 관건이 되고,민족영혼을 비출 수 있는 등불이 되어 버렸다. 작가를 고뇌스럽게 한 것은 전쟁과 그에 따른 현대화 과정이 일본 및 기타 아시아 국가 간의 골을 메워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도 이질화하는 현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통스럽고 오만하면서 위로를 갈구하는 민족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 무조건 항복' 한다는 한 마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동맹국의 승리는 철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미국처럼 깊고 넓지 못했다. 미국의 '신타협주의'로 일본은 황권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권은 일본의 상징이며 국민이 영혼을 기탁하는 곳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승리의 성과를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일본을 보호하여 자신의 전후체제로 끌어들인 것은 미국이 패권을 가진 나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가장 성공적인 깃발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영향을 받게 될 소지가 가장 많던 원동지역에 공산주의와 맞설 수 있는 보루를 구축하였다. 이때 2차대전의 피해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중국으로서는 전후 일본의 징계방법과 일본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효과적인 건의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부분적으로 상실했었다. 1972년 키신저가 일본을 피해 비밀리에 파키스탄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오자 일본 국내에서는 중 .일 국교정상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둥하여 일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들은 일본에게 한 마디의 사전통고도 없는 미국에 대해 처참한 자괴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외에도 중국과는 이웃에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단절로 양국의 관계가 진공상태에 있다는 사실로 일본인 스스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심리는 시간이흐를수록 심해졌다. 이와 같이 '사태가 급박해지는' 상황에서 다나까(中角榮)는 끝내 모든 간섭을 떨쳐 버리고 베이징으로 달려와 국교정상화를 모색하였다. 일본의 '모호'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유엔에서 대만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다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시키자는 의안에 대해 일본은 대다수 국가들과 상반되는 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고는 베이징으로 달려와 쩌우인라이와 건배를 한 것이다. 이런 노예근성과 자주의식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대책없는 행위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들의 세련되지 못함과 정책상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종 최후 순간이 되어서야 대책을 마련하느라 야단을 피우는 모양이다 중 .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여론이 일어나자 일본 국내의 많은 정치가들은 '중화민국' 과의 관계를 어떤 틀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 꿈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도의적으로 장지에쓰를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일본의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장지에쓰는 전후 일본이 일어서도록 도와 주었고, 또 중국대륙에 있던 수백만 명의 일본포로들이 시베리아로 보내지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지에쓰는 중국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하면서 까지 일본이 천황제를 유지하고 독일과 같이 양분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장 총통 각하께서 일본에게 베푼 은혜는 산과 같이 위대하고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다나까가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내각은 쓰이나(權名)라는 특사를 대만에 보내 일본의 입장을 해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쓰이나의 역할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명하고 어떻게 용서를 빌 것인가? 이는 막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 사이에 자주 보이는 광경과 비슷하였다. 또 다른 사랑이 현재의 부부관계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혼하자니 옛 정-하룻밤의 부부는 백일의 정[一日夫妻, 百日恩]이라 했던가-과 서로간에 얽힌 손익 때문에 망설여지고 피할 수 없는 도덕적 손상이 두려워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숙원을 이루면서도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재산상의 손해를 면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잘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쓰이나는 대만에 가기 전 자신의 임무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였다.'나더러 이 한 장의 비행기표를 가지고 가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 당시에 어떤 사람도 그에게 임무를 정해 주지 않았다. '눈치 보아가며 일을 처리하라'는 말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 정치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현실과 결과에 대한 감지력과 판단력을 잃었던 것 같다. 만일 일본의 소망에 따라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대만과도 '예전 같은'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두 아내를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혼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쩌우인라이가 일본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안 후 인민대회당에서 약간 격노한 어조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일본은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는가?'라고 경고하자, 일본은 발등의 불을 끄듯 베이징으로 달려와 해명하였던 것이다. 지금 당시의 상황들을 회상하자니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베푼 관용에 대해 일본의 많은 정치가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분명 중국과 아시아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너그러운 마음과 원한을 초월해 베풀 수 있는 관용정신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백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이러한 관용에 대해 감격한 나머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중국을 모략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일본은, 중국이 그때 자기들에게 지대한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의 '대중화(大中華)' 사상이라는 모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며, 또 다음 세기를 바라보는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중국이 일본과 역사적인 분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중국이 자기에게 유리한 현실적인 환경을 만들어 후일에 세계를 제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일본이란 나라와 발생한 문제를 처리할 때 중국은 어느 정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작은 꽃게의 슬픔 동해안에 사는 큰 꽃게 한 마리가 작은 꽃게 한 마리가 바닷가 모래밭 위로 올라왔다. 바닷가 모래 속이 너무나 춥고 답답해서 바다 구경도 좀 하고 햇빛도 좀 쐬고 싶어서였다. "밖으로 나온 일은 정말 잘한 일이야. 아이 시원해." "저길 좀 봐, 아이들이 발가벗고 파도를 타고 놀잖아. 아, 정말 멋있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 작은 꽃게가 밖으로 나올 때 만든 자기의 모래 구멍을 보고 큰 꽃게한테 말했다. "큰 꽃게야, 참 이상하다. 내가 만든 구멍은 이렇게 작은데 네가 만든 구멍은 왜 그렇게 크니?" 그러자 큰 꽃게가 말했다. "아, 그건 내 몸이 크기 때문이야. 네 구멍이 작은 것은 네 몸이 작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 몸에 맞추어서 구멍을 파야 돼." 작은 꽃게는 큰 꽃게의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큰 꽃게처럼 큰 구멍을 파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큰 꽃게보다 더 큰 구멍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작은 꽃게는 큰 꽃게 몰래 다시 바닷가로 나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발가락과 집게 다리를 열심히 놀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되는 큰 모래 구멍을 팠다. 파도가 밀려와 기껏 파 놓은 구멍을 무너뜨려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큰 구멍을 파 놓았다. '이만하면 큰 꽃게가 판 구멍보다 몇 배나 더 클 거야. 나도 이제 큰 꽃게가 부럽지 않아.' 작은 꽃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작은 꽃게의 더듬이를 따갑게 찌르는 한 불빛이 있었다. "야 찾았다! 여기 있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들려 왔다. 작은 꽃게는 덜컥 겁이 났다. 얼른 자기가 파 놓은 모래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작은 꽃게는 구멍이 너무 커서 자기의 몸을 다 숨기지 못하고 전깃불을 든 한 아이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글터 → 이글저글 돼지는 항상 오른쪽을 누워서 잔다.거북이나 자라는 이가 없고 말은 눈썹이 없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은 모두 쪽진 발을 갖고 있다. 앵무새의 부리는 둘 다 움직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들은 단지 한쪽 부리만 움직인다. 개구리는 입을 벌리고는 숨을 쉴수 없다. 억지로 계속 입을 벌리고 있게 하면 질식하여 죽을 것이다. 돼지는 두 다리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수영을 잘 하지 못한다. 물에 빠졌을때에는 쪽진 발끝으로 자기 목구멍을 찔러서 죽기도 한다. 산토끼는 눈꺼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눈을 감지 않는다. 대신 아주 얇은 막이 있어서 잠 잘 때나 쉴 때 눈을 가려준다.동물 중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것은 사자이고, 큰사슴, 바다사자, 늑대, 코끼리의 순으로 이어진다.다람쥐는 땅 위를 달리는 것보다 더 빨리 나무를 탄다.염소는 윗니가 없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